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이 바닷속에 잠드는 곳.
휘영청 떠오른 달만이 어둠을 걷어내는 곳.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선율로 울리는 곳.
홀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철의 범고래가 은은히 보이는 곳.
이름 모를 작은 섬, 절벽 위에 올라선 사령관은 크게 숨을 들이쉰다.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공기, 습하지만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령관은 간만의 평화를 느끼며 두 팔을 벌린다.
오르카호 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의 바람.
이것이 얼마 만인지 사령관은 짐작도 못 한다.
"사령관.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사령관이 고개를 돌린다.
기다랗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사령관의 뺨을 콕 찌른다.
"바보 발견."
곱게 땋은 분홍 머리의 바이오로이드가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허벅지에 달라붙는 핫팬츠, 아슬아슬하게 가슴의 굴곡이 드러나는 티셔츠.
커다랗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망울, 입가에 아른거리는 홍조.
T-14 미호 모델이 금빛으로 빛나는 반지를 낀 손으로 사령관의 뺨을 찌르고 있다.
"미리내."
사령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준 새로운 이름을 부른다.
그 음성이 듣기 좋은 것인지 미리내는 살랑, 눈웃음을 친다.
부끄러웠는지 금세 웃음을 지운 미리내가 주변을 둘러 본다.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오늘 호위는 하치코 아니야?"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인간인 사령관은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도 홀로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언제나 한 명 이상의 전투원이 사령관을 경호한다.
사령관은 말없이 홀로 우뚝 솟아오른 야자수 아래를 가리킨다.
하치코가 축 늘어진 강아지 귀를 까딱거리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다.
방패와 유탄발사기는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굴러다닌다.
"저 바보!"
미리내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모두의 사령관을 홀로 남겨둔 채 저런 태평한 모습이라니.
당장에라도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감정을 억지로 참아내며 반드시 오늘 일을 블랙 리리스에게 알리리라 다짐한다.
"너무 화내지 마. 내가 쉬라고 했어."
"하지만! 사령관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사령관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화를 내는 미리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어차피 다른 대원들도 있어서 문제없었어."
[그래요! 사령관님은 귀여운 린티가 완벽하게 지키고 있거든요!]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리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 사이로 불빛 하나가 빠르게 움직인다.
[저도……. 있어요…….]
다이카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미리내는 치켜 올라간 눈썹을 내린다.
"그래도 블랙 리리스한테는 말할 거야."
화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닌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한다.
그 모습에 사령관이 소리 내 웃는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미리내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웃지 마!"
사령관이 배를 움켜잡고 눈물마저 흘리자 참다못한 미리내가 소리를 빽 하고 지른다.
그제야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사령관이 꿀이 떨어지는 듯한 눈빛으로 미리내를 바라본다.
"내가 그렇게 걱정돼?"
"흥! 하나도 안 걱정 되거든!"
사령관의 물음에 미리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그럼 여기는 왜 왔는데?"
미리내는 얼른 대답하지 못한다.
사령관의 말이 맞다.
절벽에 하치코만 데리고 나갔던 사령관이 걱정되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냥 놀리려고 온 거거든!"
절대 인정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른다.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미리내의 머릿결이 흩날린다.
충동을 참지 못한 사령관은 미리내의 반지를 낀 손을 쥐고 그대로 끌어당긴다.
"으앗!"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미리내를 가슴으로 받고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사령관은 품에 안긴 미리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미리내는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사령관의 시선을 느끼며 얼굴을 빨갛게 붉힌다.
두 사람, 또는 한 사람과 바이오로이드는 서로 눈을 마주한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미리내.
붉은 눈동자를 휙 하고 돌려 절벽 너머의 검은 바다를 바라본다.
"사령관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미리내는 말을 돌리며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널 보고 있었어."
사령관의 말에 미리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신은 방금 왔는데 날 보고 있었다니.
미리내의 표정을 본 사령관은 딱딱한 땅을 느끼며 손을 뻗어 광활한 하늘을 가리킨다.
"뭐가 보여?"
사령관의 손끝을 따라 미리내가 하늘을 바라본다.
여름의 대삼각형이 하늘의 끝에 걸려있다.
비록 미리내는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별?"
별자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미리내가 대답한다.
"저기 별들이 뭉쳐 있는 것 보여? 뽀얗게 빛나는 그곳."
사령관의 말에 미리내가 은하수를 바라본다.
"예쁘다."
"저게 은하수야. 다른 말로는 미리내."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미리내는 고개를 돌려 사령관을 바라본다.
사령관의 가슴에 귀를 대고 사령관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령관이 시선을 내려 미리내와 눈을 맞춘다.
"네 이름도 저기서 따 왔어. 아름답고도 어여쁜 미리내."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에 미리내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견디다 못한 미리내가 자신을 감싼 사령관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킨다.
"나 갈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짚는다.
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 가는 미리내를 바라본다.
열 걸음 정도 걸은 미리내는 제자리에 멈춰 몸을 돌린다.
자신을 붙잡지 않는 사령관을 쏘아본다.
사령관은 손을 흔들어 미리내를 배웅한다.
"돌아가면 방으로 찾아갈게."
그 감미로운 눈빛에는 오늘 밤을 기대하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전보다 더욱 머리에 피가 쏠린 미리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리를 움직인다.
부끄러움을 이기기 위해 여름밤을 가르며 달려간다.
미리내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다 사라지고,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치코.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조심스럽게 나무에 기대어 있는 하치코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린다.
"흠냐~."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하치코가 눈을 뜬다.
아직 잠이 달아나지 않았는지 눈을 몇 번 비비적거린다.
[복귀하는 건가요?]
무전을 통해 들리는 린트블룸의 목소리에 사령관이 대답한다.
"바로 씻을 수 있게 준비해줘. 미리내 방에 말이야."
[알겠…. 답니다…….]
다이카의 느린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말랑말랑한 하치코의 볼을 쭉 잡아당긴다.
"후엥, 아파요."
"오르카호로 돌아갈 시간이야."
하치코를 완전히 깨운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제 다시 바다 깊숙이 내려갈 시간.
사령관은 고개를 천천히 내리쏟아져 내린 별들이 박혀 있는 바다를 바라본다.
여름밤, 별의 바다로 들어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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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도 완전히 사라졌으니 지금보다 더 잘 보일거라 생각합니다. | 20.08.12 07: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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