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점점 선선해지면서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름동안 안부가 뜸했던 사람들을 초대해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거나 티 타임을 갖기 좋은 계절이지요.
본격적으로 할 일이 밀어닥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랄까요.
그래서 간단하게 차를 마실 때 곁들이면 좋은 마들렌을 만들기로 합니다.
재료는 밀가루, 버터, 설탕, 달걀, 그리고 베이킹 파우더와 소금 약간씩.
여기에 더해 홍차 마들렌을 만들기 위한 찻잎도 약간 준비 해 둡니다.
달걀을 깨넣고 거품기로 저으면서 설탕을 조금씩 넣어줍니다.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소금, 홍차를 넣고 멍울이 지지 않도록 잘 섞습니다.
버터를 녹인 후 조금씩 흘려넣으며 계속 저으면 홍차 마들렌 반죽이 완성됩니다.
오늘의 홍차는 트와이닝스의 레이디 그레이.
포숑의 애플티, 마리아쥬프레르의 마르코폴로, 루피시아의 사쿠란보 등 유명한 홍차 회사라면 자신들의 상징이라고 할만한 홍차 브랜드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데 트와이닝은 레이디 그레이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레이디 그레이 이야기를 하자면 얼그레이 홍차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유럽의 여러 홍차 회사들이 아쌈이니 실론이니 다즐링이니 하는 차의 재배지역과 품종만으로 경쟁하다가
나중에는 여러가지 찻잎을 섞기도 하고 식물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넣기도 하면서 독특한 제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향 홍차 중에서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얼그레이입니다.
한 때 영국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던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따서 얼(Earl: 백작) 그레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레이 백작이 중국인 관리에게서 선물을 받은 홍차라는 말도 있고, 백작가에서 일하던 중국 출신 고용인이 석회질이 많은 물을 중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얼그레이 홍차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오렌지의 일종인 베르가못에서 추출한 향을 홍차에 입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게 흔히 생각하는 오렌지 냄새와는 좀 다른지라 호불호가 꽤나 갈리곤 하지요.
그래서 최초의 얼그레이 생산 회사(라고 주장하는) 트와이닝스에서는 좀 더 시트러스한 느낌을 살리고 부드러운 느낌의 레이디 그레이를 출시하게 됩니다.
찻잎만 봐도 알 수 있는 홍차인데, 말린 오렌지 껍질과 레몬 껍질, 그리고 다른 홍차에서는 볼 수 없는 푸른 꽃이 들어있는 특색있는 외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푸른 꽃의 이름은 콘플라워로, 옥수수꽃이 아니라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기르는 논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프러시아의 루이제 여왕이 프랑스군을 피해 도망치다가 콘플라워밭에 숨어서 위기를 넘긴 후로는 독일의 국화로 그 신분이 상승하기도 했지요.
'레이디'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향신료 느낌이 날 정도로 베르가못 향이 강한 얼그레이와는 다르게
좀 더 순한 오렌지와 레몬향이 친숙한 감귤향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여기에 콘플라워의 부드러운 국화향이 섞이면서 얼그레이가 너무 강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입문하기 딱 좋은 가향 홍차이기도 합니다.
다 만들어진 반죽은 짤주머니에 담아서 냉장고에 한 시간 정도 보관해서 숙성시킵니다.
반죽이 다 숙성되면 조개 모양의 마들렌 팬을 준비합니다.
마들렌을 단순한 스펀지 케이크와 차별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그 독특한 모양인지라 전용 틀이 없으면 마들렌 굽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팬에 기름이나 버터를 살짝 발라 나중에 떼어내기 쉽게 해주고, 반죽을 70~80% 정도만 채워넣습니다.
너무 많이 채워넣으면 나중에 부풀어 오르면서 넘쳐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합니다.
섭씨 175도 (화씨 350도) 오븐에서 10분 정도 구워줍니다.
빵이나 과자를 구울 때면 항상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하지만, 마들렌은 특히 그 향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은, 그리고 음식에 얽힌 맛과 향기는 다른 어느 것 못지 않게 강력한 기억을 남기는 듯 합니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략)
그 맛은 내가 어릴 적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아주머니 방으로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의 맛이었다.
실제로 마들렌을 맛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비록 사먹은 적은 없지만- 최근까지도 빵집 진열장에서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그 모습이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떨어진 최근의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연약하지만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집요하고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히 떠받치고 있다."
-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자전적 소설에서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주는 맛과 향기가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면서 주인공이 지금껏 잊고 있었던 과거를 회상하게 만듭니다.
소설 자체가 워낙 장편 소설인데다가 문장도 만연체의 수준을 넘어서 극악하다고 할 만큼 긴 문장들이 가득하기에 결국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맛과 향이 주는 강렬한 기억의 흔적은 깊이 공감했는데,
마들렌을 구으며 달달하고 고소한 그 냄새를 맡노라면 어릴 적 등교길에 지나치던 동네 빵집 앞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한껏 숨을 들이쉬던 기억이 떠오르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냄새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게 되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하기까지 하지요.
반죽이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가운데 부분이 솟아오르는데, 이른바 마들렌의 '배꼽' 부분입니다.
너무 설익으면 배꼽이 올라오지 않고, 너무 익으면 배꼽이 터져버리기 때문에 잘 구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때 지표로 사용되곤 합니다.
다 구워진 마들렌은 오븐에서 꺼낸 뒤 팬에 둔 채로 조금 식힌 다음, 팬에서 꺼내 배꼽이 위로 올라가게 해서 식힘망에 식혀줍니다.
배꼽이 부드러운 부분인지라 식힘망에 닿으면 그릴 자국 난 스테이크마냥 무늬가 남기 때문입니다.
한쪽 면은 바삭바삭하고 다른 쪽은 부드러운 마들렌은 달달하면서 폭신폭신한 것이 홍차나 커피와 곁들여 먹기 좋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스펀지 케이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버터와 설탕의 비율이 높아서인지 고소하면서 단 맛이 강한 게 살살 녹네요.
오렌지향이 잘 어울리는 과자인지라 오렌지 껍질을 긁어 넣는 레시피도 있는데
이번에는 그 대신 오렌지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홍차를 넣어서 더 마음에 듭니다.
티파티에 사용하기 위해 2층 트레이에 담아놓으니 그럴 듯 하네요.
1층에는 바나나빵(http://blog.naver.com/40075km/221086931591)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원래는 마들렌이 달달한 간식거리인지라 고소하고 짭짤한 스콘이나 비스킷을 놓으면 궁합이 더 잘 맞을텐데
스콘에 발라먹을 과일잼도 없고, 클로티드 크림도 없고, 크림 치즈도 없는지라 그냥 바나나빵을 올려놨네요.
마들렌은 마들렌이라는 이름의 요리사가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5세에게 조개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왕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요리사의 이름을 과자에 붙이도록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왜 마들렌이 조개껍질 모양을 하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하는지라 개인적으로는 성 야보고(영어로는 세인트 제임스, 프랑스어로는 생자크, 스페인어로는 산티아고)와 얽힌 전설이 더 마음에 듭니다.
성 야고보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스페인까지 순례를 떠났던 사람으로,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교한 뒤 성자로 추존됩니다. 성 야고보의 관은 그의 제자들이 바다에 띄웠는데 조개들이 시신을 덮어 보호해주면서 스페인까지 떠내려갔다고 하지요. (혹은 성 야고보가 물에 빠진 기사를 구해줬는데, 온 몸에 조개가 가득 붙어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후로 조개는 성 야고보의 상징이 되었고, 심지어는 프랑스에서는 생 자크라고 하면 조개 요리를 의미하기까지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들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820km 길이의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걸어갔고, 순례자들은 조개 껍질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교회에 보여주면서 자신이 순례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한 끼의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로레인 지방에 살던 마들렌이라는 요리사가 순례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빵을 조개 모양의 틀에 구워서 만든 것이 오늘날 마들렌의 시초라는 설이 있지요.
하지만 프랑스 과자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만들기가 쉬운 덕에 이제는 굳이 머나먼 순례길을 걷지 않아도 주변에서 마들렌을 쉽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만드는 난이도는 어렵지 않은 반면 입에서 살살 녹는 맛있는 과자인지라 손님을 초대할 때 간단하게 구워내기 좋은 메뉴이기도 하지요.
향긋한 홍차를 끓여내고 달콤한 마들렌을 곁들여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티타임을 보내다 보면 마들렌에 군데군데 박혀있는 수레국화의 꽃말이 떠오릅니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네요.
(IP보기클릭)218.148.***.***
(IP보기클릭)211.206.***.***
영광의 첫 댓글이네요. 좋은 음식도 음식이지만 관련 정보 주는게 너무 좋아요. 이번 글도 잘봤습니다.
(IP보기클릭)211.46.***.***
오늘도 품격있는 글 잘보았습니다. 글쓴이분 문장을 읽다보면 저도 절로 교양있어지는 그런 느낌이네요
(IP보기클릭)163.152.***.***
프루스트라는 이름과 마들렌이 익숙해서 보니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군요
(IP보기클릭)49.167.***.***
어디서 가게 여시나요? ㅋㅋ
(IP보기클릭)211.206.***.***
영광의 첫 댓글이네요. 좋은 음식도 음식이지만 관련 정보 주는게 너무 좋아요. 이번 글도 잘봤습니다.
(IP보기클릭)89.3.***.***
(IP보기클릭)112.144.***.***
(IP보기클릭)210.121.***.***
(IP보기클릭)218.148.***.***
(IP보기클릭)49.167.***.***
어디서 가게 여시나요? ㅋㅋ
(IP보기클릭)59.6.***.***
(IP보기클릭)112.172.***.***
(IP보기클릭)61.43.***.***
(IP보기클릭)1.234.***.***
(IP보기클릭)163.152.***.***
프루스트라는 이름과 마들렌이 익숙해서 보니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군요
(IP보기클릭)211.46.***.***
오늘도 품격있는 글 잘보았습니다. 글쓴이분 문장을 읽다보면 저도 절로 교양있어지는 그런 느낌이네요
(IP보기클릭)106.245.***.***
정말 공감합니다. 좋은 레시피와 함께 음식에 얽힌 이야기까지.. 크으, 멋진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17.09.14 18:59 | |
(IP보기클릭)183.98.***.***
(IP보기클릭)220.90.***.***
(IP보기클릭)14.45.***.***
(IP보기클릭)119.201.***.***
(IP보기클릭)211.216.***.***
(IP보기클릭)125.176.***.***
(IP보기클릭)220.123.***.***
(IP보기클릭)110.9.***.***
(IP보기클릭)125.190.***.***
배가...고ㅍ./.,ㅍ, 프 다///\\\
(IP보기클릭)112.170.***.***
(IP보기클릭)123.140.***.***
(IP보기클릭)124.54.***.***
(IP보기클릭)219.249.***.***
(IP보기클릭)223.57.***.***
(IP보기클릭)110.11.***.***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