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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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어느 겁쟁이 바이오로이드의 기록: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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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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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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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이 다가온다. 발키리는 눈발 속에서 숨도 쉬지 않고 점점 커져오는 놈의, 정확히는 놈의 약점을 조준했다. 아무리 긴장되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공포를 직면해야 한다. 아무리 공포스러워도,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약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발키리는 놈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 철충들, 그 외계의 기괴한 괴물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몸과 마음 모두에. 그녀는 바로 그 약점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
그 부분을 파고들면, 거대하고 흉측한 괴수도 의외로 쉽게, 허망할 정도로 간단히 쓰러진다.
“시뮬레이션 종료. 수고했어, 발러”
“후우”
시험 종료를 알리는 상섭의 목소리와 함께 눈 앞이 암전되었다. 발키리는 바이저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가상 전투는 그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실제가 아닌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불과한데도 긴장으로 수축된 근육이 뻐근하고 사지가 나른하게 피곤해져 왔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가상현실 속의 철충들도 연구진이 설정한 메커니즘을 따라 진화한다. 놈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점점 더 강해지고, 점점 더 영리해진다. 지난 번 모의전투 때 애용하던 저격스팟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겼지만. 놈들의 근본이 바뀌는 건 아니므로.
“오늘도 애썼네, 자. 커피 한 잔 들겠나?”
“감사합니다.”
“자네 커피에 프림 안 타지? 내가 연구소 직원들 커피 취향은 다 알지.”
어깨를 돌리며 훈련장치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소장이 다가와 마실 것을 건넸다. 실험체를 대하는, 연구소 바깥 인간들의 태도가 아니라 엄연한 연구소 직원이자 동등한 동료로서 배려하는 그 태도에 그녀는 감사하며 그 커피를 받아들었다.
“어떻게 매번 철충들을 강화시키는데도 그렇게나 놈들을 잘 상대하는 건가?”
“음, 소장님.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발키리는 천천히 답했다.
“놈들에게도 감정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철충심리학이라고나 할까. 인간들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놀랍게도 놈들에게도 공포, 비이성적인 분노, 그리고 비릿한 복수심 같은 것이 존재했다. 8개월 동안 키예프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보았다. 그리고 활용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온 저격에 마치 인간들처럼 공포에 미쳐 날뛰는 놈들의 반응을,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여 비합리적인 돌격을 감행하던 놈들의 무모함을.
“.....인간처럼 말이죠”
그렇다. 어떤 면에서 놈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인간과 유사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전장에서 놈들의 냉혹한 사신인 발키리는 바로 그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했다. 철충들도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놈들도 기억이란 걸 한다면, 그녀의 존재는 놈들의 기억 속에 공포로 각인되었으리라.
“놈들의 행동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놈들 하드웨어는 계속 진화할지 몰라도 소프트웨어 쪽은 더딘 모양이죠.”
격한 감정은 비효율적인 행동과 판에 박힌 패턴을 만든다. 더 두꺼운 장갑을 달기는 쉬워도 그런 행동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거대한 적도 쓰러뜨릴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 철충을 ‘살아있다’ 고 해야 하는지 몰라도 - 산 자들이, 즉 감정 가진 자들이 한다. 철충조차도.
“알았으니까 눈에 힘 좀 풀게. 훈련 끝났으니”
그제야 발키리는 자신이 전투에 돌입할 때 짓는, 겨울바람도 잘라버릴 것 같은 예리하고 무시무시한 눈매를 하고 있다는 걸 꺠달았다. 상관에게 보이기에 그렇게 예의바른 표정은 아닌지라 그녀는 황급히 얼굴에 힘을 뺐다. 그러나 소장은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선 손을 흔들었다.
“저기 상섭이 오는구만.”
시뮬레이션 훈련실 옆의 통제실에서 나오는 그를 보자 발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발러. 오늘도 멋졌어. 도대체 넌 패배하질 않네.”
“그...발러란 별명은 뭡니까?”
“발러(Valor). 용기란 뜻이지”
어째 그 별명이 약간 낯간지러워져서 발키리, 아니 발러는 안 그래도 상섭 때문에 뜨거워진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글쎄, 하지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키예프에서 8개월 동안 홀로 괴물들과 맞서는 게 보통 정신머리로 되는 일은 아니지”
순수한 감탄과 동경이 뒤섞인 눈망을로 쳐다보는 그를 마주보기가 어쩐지, 이유도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발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근 몇 개월간 자꾸 이 남자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구소의 사람들은 소장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다들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발러는 자기 같은 바이오로이드에게도 그렇게 살갑게 구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그냥 자기 제조일자에 불과했던 생일까지 챙겨줬을 때에는, 이 인간님들이 뭐 전날에 잘못 먹었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군대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처음에는 이유도 없이 겁먹었지만, 몇 개월여가 지난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다만 한 가지 영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생각해봐, 비록 시뮬레이션이지만, 너 여기 온 이후로 무패라고, 무패”
“하지만 점점 상대하기 어려워지던걸요...”
“그거야 놈들도 계속 강해지니까.”
...이렇게 신이 나서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이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코앞까지 철충이 다가와도 호흡 하나 안 흐트러지던걸. 발러란 별명이 걸맞지 않아?”
“어...바깥에서...그런 것까지 보입니까...?”
“어, 그렇지? 시뮬레이션이지만 전투과정을 보려면 내부 진행 상황도 관찰하고, 너 몸상태도 체크해야 하니까?”
발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그렇게까지 들여다봐야 합니까?”
“내가 네 담당인데. 너에 대해서는 샅샅이 알아야 하지 않겠어?”
“제 몸 구석구석까지?”
“응?”
어쩐지 이 남자한테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다 보여진 듯한 기분이 들어 (사실이긴 했다) 와락 부끄러워진 발러가 시선을 회피했다. 얘가 왜 이러지, 하고 자기 담당 바이오로이드를 고개 갸웃하면 지그시 바라보던 그도 - 그 시선이 오히려 웬지 발러를 더 부끄럽게 했다 - 그제야 자기가 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말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연구에만 빠져 살다 보니 이런 쪽으로는 이해가 좀 늦게 찾아드는 모양이다.
“아...음...크흠”
어쩌면, 그녀가 그녀의 담당연구원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연구소 사람들은 모두가 그녀에게 친철했지만,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거의 찰싹 붙어 다니는(그게 그의 일이니까?) 이 젊은 연구원은 유독 그녀에게 더 따뜻하게 대했다. 때로는, 그와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발러는 자신이 그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착각에 빠져들려는 자기 자신에게 엄하게 경고해야 했다. 너는 인간이 아니라고. 실험체, 발키리 1127번일 뿐이라고.
그런데 때로는 이 생각 없는 남자 때문에 그런 그녀의 마음이 녹아드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는 게 문제였다. 연구소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발러가 시름시름 앓아 누운 일이 있었다. 구역질이 나고, 토하고. 괴로운 시기였다. 거의 모든 질병에 면역인 바이오로이드가 그렇게나 아프다는 건 희귀한 일이었는데, 역학조사 결과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시뮬레이션 장비에 그녀의 모듈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발러는 가만히 회고했다. 그녀가 아프다고 해서 이 남자가 연구소 병동에 누운 그녀를 굳이 밤새도록 간호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도구, 바이오로이드고, 그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상섭은 시뮬레이션 장비도, 그리고 발러도 자기 담당이었다고 자책하고선 발러가 퇴원할 때까지 거의 그녀의 침대 옆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는 걸 보자면 대체 어느 쪽이 바이오로이드인지 헷갈릴 지경 - 뭐, 바이오로이드는 남성형이 없으니 정말 헷갈리진 않았겠지만. - 이었다. 키예프에서 홀로 외로이 악착같이 살아남을 때, 아니, 인간들의 군대에 있을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진한 대접에 오히려 발러가 당혹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 이 남자가 그녀의 몸 상태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체크하겠단 것이지만...
“그러고보면 이상하단 말이지.”
“네?”
“너 말야. 심박수 체크해 보면, 시뮬레이션을 시작하기 직전이랑 훈련 종료 후에 이상하게 수치가 올라.”
“......”
“너도 알 거 아냐. 나랑 얼굴 마주하고 데이터 볼 때니까. 왜 이러는 거지? 훈련 중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훈련 중엔 심박수 안정되는데.”
“그, 그게 말이죠....”
“너 혹시 아직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그거야, 장치에 들어가기 직전과 직후에 담당연구원인 이 남자 얼굴을 보게 되니까. 그러나 이 순진한 질문에 ‘당신이 근처에 있어서 그래요’ 하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발러는 그냥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하는 걸로 응답을 대신했다. 그 바람에 둘 사이에서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약간 동떨어진 제3자가 된 기분을 느끼던 소장이 주의를 환기했다.
“험험, 둘이 분위기 좋은데 말이지, 아직 할 일이 다 끝난 게 아니라네”
그 말에 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소장은 자기도 약간 맘에 안 든다는지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다들 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되겠네.”
“?”
“연구소 본부에서 높으신 분이 오거든. 사열을 받고 싶다고 하셔서”
“높으신 분이요?”
“그래. 아주 높으신 분일세. 요번에 본부장으로 부임하신 분이니까”
상섭의 눈썹이 약간 찡그려졌다. 사열식 같은 거 좋아하는 사람 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별로 없던데.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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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가장 처음 삽입된 그림은 김턱과 파공 님의 공식 만화에서 가져온 컷입니다(https://cafe.naver.com/lastorigin/630575 /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67716).
2) 삽입된 곡은 가수 '윤하'의 "내일도 맑은 하늘처럼"(2007)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더 나은 곡이 있을 거 같군요. 추천 받습니다.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중간에 언급된 '철충심리학'은 라스트오리진 유저들이 공략 짜면서 철충의 행동패턴을 연구하는 걸 '철충심리학'이라고 우스개로 부르는 걸 패러디했습니다.
2) 철충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스토리에서 보여 준 모습들도 그렇고, 철충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암시들로 미루어보아 분명 그들에게도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이 있을 것입니다.
3) 오르카의 시뮬레이션 장치들은 사령관이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만, 이 이야기(발키리 회상편)이 진행되는 중에는 이 기술이 좀 불안정할 수도 있겠죠. 더구나 연구소의 것은 그 시대 기준으로 첨단(달리 말하면 이제 막 나온 신형 프로토타입)이기도 하고요.
2.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어느 행복했던 바이오로이드의 기록'은 발키리의 회상편입니다.
2) 이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은 이제 발키리의 '발러'란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이번 편에서 알게 되셨을 겁니다.
3. 잡담
1) 근 한 달 만입니다. 발키리 회상편을 끝내야 얼른 후반부로 넘어갈 텐데요. 이거, 장편으로 계획하긴 했었고 스토리 얼개도 다 짜여져는 있습니다만, 언제 끝나지 이거....
소설은 읽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도, 제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달아주시는 댓글에 모두 빠짐없이 답글을 단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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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이던 그 삼안 소장 말이지요.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놀랐네요. 감사하기도 하고). 쓸 계획이 없으니 그냥 말하자면 그 소장은 해당 소설의 시점 직전에 죽은 상태입니다(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아 어디 장기출장 가셨다보다, 혹은 행불 상태인 줄 아는 거죠). 당시에는 약간 코스믹 호러 공포물처럼 써볼려 했는데, 철충과 FAN파 관련 공식설정 이외의 요소가 약간 필요해서 그만두었었습니다. | 21.08.23 10: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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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도 그렇고 설정상 죽었다는 캐릭이 재등장하는건 늘 있던 일이죠ㅎ 신분위조도 여러모로 클리셰기도하고요. 은닉이든 사칭이든. 발러가 레오나나 발할라를 생각 안하는거보면, 키예프에서의 임무 수행을 위해 제조되어 활약했던 개체로 봐도 되려나요? 멸망전쟁 2년차인 소설 시점에서는 전멸했겠지만. | 21.08.23 1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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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키예프에서 저격수가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단독으로 제조된 개체입니다. 사실 발러가 그렇겐 안 보여도 은근히 외로움 타고 있는 상탭니다. | 21.08.23 1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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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마세요. 발키리는 당분간은 무사합니다. | 21.08.23 12:04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222.112.***.***
그리고 줬다 뺏으면 더 아프겠죠? 히히히 | 21.08.23 13: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