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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조작 장치는 아마도 과거에는 이 탄광단지를 관리하던 경영진의 사무소 내지는 중앙 제어 센터였을 마을회관 지하실에 있었다.
“흐음, 이게 그 장치야?”
“어. 시술 대상이 저 금속통 안에 들어가 있으면 여기 이 콘솔로 기억 수복 명령을 내리면 돼”
“내가 아는 기억 조작 장치랑은 형태가 좀 다른데, 보안관”
“이건 블랙리버제가 아니라 펙스제니까, 파티셰.”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싶어하는 듯한 아우로라와 그에 반박하는 애니의 대화에 발키리가 끼어들었다.
“아우로라. 이런 걸 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까?”
발키리의 말에 아우로라가 갑자기 어버버거렸다.
“아, 그, 그게, 그, 나도 블랙리버 연구소 출신이잖아. 우리 처음 만났던 데. 거기서 바이오로이드 피험체들을 위한 설비를 이것저것 본 적은 있거든.”
인간들의 연구소에서 ‘바이오로이드 피험체’ 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꽤 명료했고, 그게 여기 모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단어는 아니었으므로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뭐, 얘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녀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도 하고, 더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전 어떡하면 되죠?”
“별 거 없어. 저 금속제 실린더 보이지? 저 안에 들어가서 얌전히 누워만 있어. 조작은 이쪽에서 다 할 거야”
발키리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실린더의 덮개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생긋이 미소지어주었다. 마지막까지 불만과 걱정에 가득한 듯한, 그리고 이제는 거의 포기한 듯한 얼굴을 한, 그녀의, 오래된 60년지기 친구에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우로라”
“...그래. 웃으면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행운이나 빌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실린더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녀의 목에 걸린 은색 목걸이의 짤그랑 소리만 남기고서.
...
틱, 틱틱
“어,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던가? 이거 누르면 명령창 떠야 하는데?”
“.....애니 너, 이거 진짜 할 줄 아는 거 맞아?”
“가만 좀 있어 봐! 71년 전에 마지막으로 했을 땐 잘 했단 말야!”
“71년전?! 너 믿어도 되는 거야?”
바깥에서 아련히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들으며 발키리는 눈을 감았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에 응한 것은 단지 애니를 돕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궁금했다. 왜 자신은 멸망 전의 기억이 없는지. 왜 그 날 그 정체불명의 시설에서 깨어난 건지. 왜 그녀는 철충을 무서워하는지. 그녀는....멸망 전에 과연 누구였고, 무엇이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그 자기에 있었고, 왜 기억을 잃었으며,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내색하진 않았고 때로는 신경쓰지 않으려고도 해봤던 오만 가지 질문들이 지난 수십 년간 그녀의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누구든 궁금하지 않겠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원초적인 질문에 대해.
....설혹, 그 질문의 답이 아무리 끔찍할지라도.
애니가 뭘 눌렀는지 우웅, 하고 발키리 주변의 장치들이 한 차례 진동하며 불이 들어왔다.
“아, 아, 이제 된다. 잠깐 까먹었을 뿐이라니까?”
“너, 발러에게 뭔 일 생기면 이주고 뭐고 다 파토날 줄 알아. 넌 나랑 같이 여기서 죽는 거야”
“에헤이, 걱정하지 말래두”
킹, 킹, 킹, 하고 실린더의 오래된 전자장비들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음색은 아니다만, 어쩐지 익숙한데.발키리는 눈을 감았다. 시작되는군. 그녀는 한 차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각오했다.
다시 깨어나면, 예전과 똑같지는 않으리라. 절대로.
...
“좋아. 무의식 아래에 잠재된 기저의식이 있다면 한 시간 내에 표층의식으로 떠오를 거야. 바이오로이드의 기억이 억압되어 있다면 신경 회로가 재구성되는 그 과정에서 복구되겠지.”
“너 갑자기 굉장히 닥터 같이 말하네”
“그냥 옛날에 매뉴얼에서 봤던 걸 말하는 건데.”
“그래, 그래. 어련히 잘 되겠어”
중얼거리는 애니 옆에서 아우로라가 작게 핀잔주었다. 어쩐지, 약간 힘이 빠진 듯하게.
“아무튼, 내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제대로 복구될 거야. 네 친구는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기억을 되찾아서.”
“응...”
웬지 아우로라는 어딘지 시무룩해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혹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
뭔가, 눈앞이 흐릿하다. 아니, 흐릿하게 영상이 떠오르는 듯하다. 마치 수십년은 된 낡은 비디오테이프가 재생되는 것처럼.
“뭐 해, 발러”
누군가가 불러서 문득 발키리는 정신을 차렸다. 누구지? 아우로라가 부른 건가? 그러나 그건 남자 목소리였다.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지?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먼지 쌓인 버려진 마을 회관 지하실이 아니었다. 훨씬 밝고, 깨끗하고 번듯한 공간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하다. 인간들, 인간들이. 발키리는 와락 겁먹었지만, 이윽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꺠달았다.
‘무섭지...않아?’
온 사방이 인간인데 전혀 두렵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당장 눈 뒤집고 쓰러져서 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인파들의, 인간들의 뇌파들 한복판에 있음에도 그녀는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그 얼굴들 앞에서 어떤 뜻모를 그리움마저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들 하나하나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음에도, 그녀를 축복해주는 얼굴들이, 어쩐지 그리웠다. 정말 오랜만에 보고 싶던 옛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았다.
그들이 하나하나 그녀에게 축하를 건네 온다.
“축하해, 발러!”
“전시(戰時)에도 부부는 축복받아야지, 암!”
“맨날 전쟁 얘기만 듣다 이런 경사가 생겨서 너무 기뻐!”
“행복해야 해, 발러!”
“???”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성 혹에서 어리둥절한 채, 그제야 발키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차림을 믿을 수가 없어졌다. 웨딩드레스라니. 티 하나 없이 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라니. 그녀 일평생 전혀 기대해본 적도 예상도 해본 적 없는 옷을 자신이 입고 있자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자신이 평생 입을 일이 없는 옷이라 생각했는데...
“발러,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혹시 긴장돼?”
재차 물음이 들려오자 발러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좀 더 정확히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여긴...그제야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대충 감을 잡을, 혹은 기억해 낼 수 있엇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있었다. 조촐하긴 하지만, 누군가를 축복해주기엔 충분한.
그리고, 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당신이 오늘 주인공인데 그렇게 얼떨떨해 하면 어떡해”
그때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이 결혼식장의 주인공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그녀가, 그러나 한껏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바로 오늘, 바로 이곳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 말쑥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자는....
처음 보는 남자다, 아니 처음 보는 남자여야 했다. 그러나 아니다. 가슴이 아리다. 그 남자의 얼굴만 봐도 발키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기억나지 않는데, 그런데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사무칠 만큼, 눈물날 만큼. 갑자기 발키리는 울고 싶어졌다.
“큼큼, 자, 그럼 주례를 서 볼까?”
나이 지긋한 중년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가 단상에 올라섰다. 몇 번 헛기침을 해서 하객들의 시선을 모은 그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하객 여러분...오늘 하나의 짝이 만나 이렇게 아름다운 가약(佳約)을 맺고자 하는 자리에 참석해 주시어...”
“소장님, 빨리빨리 하시죠. 어차피 다 아는 사이들인데.”
“이놈이...세상에는 절차란 게 있는 법일세”
“소장님 머리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라져 버렸지만요”
“좀 있다 피로연 때 두고보세"
턱시도를 맵시있게 차려입은 남자와 중년 사내의 만담을 바라보고 있자니 발키리는 이유도 모르게 맘이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했다. 포근했다. 그리웠다. 이 모든 것이. 특히, 특히,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녀 옆의 이 남자가.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다. 아니, 아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점점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났다. 박수치는 저 얼굴들이, 흔치 않은 경사에 흥분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지루한 주례사를 늘어놓는 그녀 앞의 대머리 아저씨가. 발키리는 새삼 결혼식장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보고 싶었던 모두가 그녀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쁘게, 바로 이 자리의 주인공, 발키리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기뻤다. 반가웠다.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질 수가 있나! 탕비실에 술 꺼내오게! 전부 다! 오늘 싹 다 비워보세!”
“요리는 준비되어 있어? 우리 요리사가 또 실수한 거 아냐?”
“에에이, 저도 이런 좋은 날에는 실수 안 한다고요!”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사방을 둘러보던 발키리의 눈이 커졌다. 예식장을 누비며, 하객들에게 신나게 다과를 나눠주고 있는, 그리고 그러면서도 부러움 반 축하 반으로 발키리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저 파티셰는....
...
푸쉭-하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실린더에서 발키리가 비틀거리면서 걸어나았다. 어지간히 어지러운지, 그리고 두통이 도지는지 그녀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휘청했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익스프레스와 애니가 다가갔다. 시술이 잘못되면, 그래서 만약 발키리가 뇌손상으로 오히려 불구가 되었다거나 하면 상황이 매우 심각해진다. 철충과 같이 싸워줄 동료는커녕 짐만 늘어난단 얘기니까. 그러나 발키리는 부축하려는 익스프레스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른 이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눈은, 어쩐지 헛헛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우로라를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당신....”
그 다음 발키리의 행동은 꽤 인상적이었다. 다짜고짜, 어쩐지 다 알고 기다리는 듯이 무방비하게 서 있던 그녀의 얼굴을, 힘껏 주먹으로 후려쳤으니까.
쿠당탕!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것도 아닌, 전투용 바이오로이드가 진심을 담아 내지른 주먹이다. 그 매서운 충격에 아우로라는 그만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어찌나 강하게 맞았는지 그대로 날아간 아우로라의 몸은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옅게 피내음이 났다. 아우로라의 피답게, 향기롭고 달콤한 피내음이. 그러나 발키리는 60년지기 친구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애니를 포함한 주변의 모두가 당황해 머뭇거렸다. 뭐지, 너네들 같은 편 아니었어? 친구 아님? 하는 뚱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애니를 뒤로 하고, 발키리가, 으스러질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거의 증오에 가까운 원망을 담고서.
“왜...왜 지금까지 침묵했습니까, 아우디!!!”
침묵? 이건 무슨 소린가? 황망해하는 이들을 두고, 입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우로라는 씩 웃었다.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이. 결국 올 게 왔다는 듯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더할 수 없는 원망을 담아 자신을 노려보는 발키리에게, 아우로라는 차라리 허탈하게 웃었다. 올 게 왔다는 듯이, 헛헛하게.
“그래, 이제야 아우디라고 불러주는구나”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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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삽입된 곡은 서부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의 OST, Jim Crose 가 부른 "I got a name"입니다. 이제 발키리는 자신의 이름을 찾아,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납니다. 그리고 이 곡의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처럼 처음에 기억 수복 장치 안에 들어갈 떄의 발키리는 아우로라와 화기애애하게 헤어졌지만.....
2) 삽입된 두 번째 곡은 "윤하"의 "우린 달라졌을까" (2012)입니다. 과연 과거의 발키리와 지금의 발키리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3) 삽입된 세 번째 곡은 "Little big town"의 컨트리 음악 "Tornade" (2012)입니다. 이제 발키리의 앞날에 광풍이 펼쳐집니다. 아 그 전에 과거 회상 좀 하고.
4) 중간에 삽입된 결혼식장 사진은 더케이 호텔 서울의 한강홀을 가져왔습니다( https://www.thek-hotel.co.kr/skmh/en/wedding/wedding5.do).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바이오로이드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건 공식 설정입니다만, 그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2) 중간에 아우로라가 애니에게 협박조로 말한 "너는 나랑 같이 여기서 죽는 거야" 는 '아이돌마스터 샤이니 컬러즈'의 "마유즈미 후유코"의 상징적 대사를 가져왔습니다(...)
2.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소설에 넣을 웨딩 발키리 스킨이 없는 게 천추의 한이군요. 발키리가 최애는 아니긴 하지만, 스마조는 어서 근본있는 원년멤버, 라오진 고인물들의 영원한 효녀, 정실부인 발키리의 웨딩스킨을 내 놓아라!
2) 등장인물들 표정이 좀 더 다양했음 좋겠는데, 이걸 어디서 구할 수도 없으니 뭔...
3) 아우디라는 별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2편(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564) 을 참조해주세요.
2. 잡담
1)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오늘 좀 이런 저란 사건들이 터졌네요. 지갑도 잃어버리고 카드도 사라지고, 일은 일데로 손에 안 잡히고....대신 이번엔 좀 길게 썼습니다.
2) 발키리 이야기의 다음 편은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저녁께 올라오겠습니다. 당분간은 회상 편입니다.
소설은 읽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도, 제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달아주시는 댓글에 모두 빠짐없이 답글을 단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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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게임 스토리텔링 불후의 명작이죠. 제 이야기는 이것만큼 감탄이 나오게 정교하고 치밀한 플롯을 갖춘 건 아닙니다만...비극이기는 합니다. | 21.07.23 01:05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1.235.***.***
다음 편은 회상편입니다.ㅎㅎ | 21.07.24 13: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