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제정신이야? 거기서 그걸 쏴제끼면 어쩌자는 건데!"
"이봐, 마스터. 난 분명 전술적인 판단 하에 일부만 보여줘도 되냐고 물었고, 그걸 허락한 건 너였잖아."
"내가 선 넘지 말랬지!"
윤아는 미칠 노릇이었다. 라이더의 말대로 보구의 편린 정도는 보여줘도 된다고 허락은 했지만 설마 대장군전을 발사해서 폐공장을 무너뜨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부 바닥이 작살나는 것 정도야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어떻게든 은폐를 할 방도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건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이렇게 되면, 승부는 물 건너간 것 같소."
모두의 시선이 윤아와 라이더의 말다툼에 집중되었을 때, 세이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처도 방금 전 상황으로 생각이 멈춰 보구 발동을 위해 꺼낸 조총들도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이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은 본인도 그렇고 본인의 주군도 원하는 바는 아니니 이만 물러나드리지. 그대들도 조심히 돌아가도록 하시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군. 무언가 함정이라도 준비한 것이오?"
아처는 상대에 대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그대가 본인의 성향을 간파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알려드리는 것이오. 본인은 그런 수단을 쓰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소."
"...그렇게 얘기한다면 물러나드리지. 다음 번에 다시 조우한다면 그 때는 서로의 진명을 걸고 정면승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구려."
"동의하오. 비록 지금은 이렇게 해산하지만, 다음 번엔 한번 제대로 승부를 겨뤄보지."
세이버는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아처도 손에 들고 있던 조총을 사라지게 하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왔다.
"갑시다, 주군."
"라이더, 그쪽은 정리되었어?"
"정리할 것도 뭣도 없이, 이 친구 더 싸울 생각이 없어보이는데?"
라이더의 말대로 버서커는 전의를 상실한 듯 멍한 표정으로 대장군전이 박혀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더가 갑옷을 해제하고 다시 처음 입고 있었던 트레이닝복의 모습이 되자 박혀있던 대장군전도 사라졌다.
"빨리 와.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여길 피해야 돼!"
라이더를 마지막으로 성민 일행은 그 자리를 떠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세이버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서번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래, 그대는 어쩔 것이오? 여기서 본인과 싸울테요?"
세이버의 질문에 멍하니 있던 버서커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니, 됐어. 애초에 그쪽이랑 싸울 생각도 없었고."
"그럼 그대도 빨리 모습을 감추는 게 좋지 않겠소?"
"그래야지. ......아, 그전에."
버서커는 뭔가 생각난 듯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세이버의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이전에 성민과 처음 조우했을 때 그에게 보여주었던 여성의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였다.
"혹시 이 여인을 본 적이 있나?"
"보아하니 그대는 본인보다 한참 후대의 인물같은데, 그렇다면 본인이 그 여인을 만난 적은 당연히 없을테지. 안 그렇소?"
"뭐, 그렇겠구만. 젠장."
버서커는 두루마리를 다시 품 속에 넣더니 영체화로 모습을 감추었다. 버서커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이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께 보고하기 골치아프겠군. 이 정도로 난장판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세이버도 영체화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나저나 라이더... 앞으로 또 충돌할 일이 있을 터인데... 쪼까 거시기허것구만."
* * *
"......이거 참. 날뛰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세이버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에서 달빛이 비춘 곳으로 나온 사람은 진청색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남성이었다.
"그자들의 눈도 거두어진 듯 하고, 저들이 오기엔 시간이 조금 있겠군. 그렇다면 눈속임을 할 시간은 있겠지."
도포를 입은 남자는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서였다. 남자는 고서를 펼쳐들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전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폐공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남자의 말이 멈추고 그가 책을 도로 덮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부서진 폐공장이 불길에 휩싸였다.
"이거면 대충 가스 폭발로 둘러댈 수 있겠지. 세이버가 하는 말을 생각한다면 그 마스터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겠지만, 그래도 협상의 여지는 있을 터."
도포의 사내는 다시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러자 바람과 함께 그의 옷차림이 검은 정장으로 바뀌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갓도 없어지고 짧고 단정한 머리로 바뀌었다. 삼명그룹 본사 폭발 현장에서 수사중인 형사들에게 수사 중단 지시를 전달했던 그 남자의 모습이었다.
"자, 그럼 먼저 여기로 올 경찰 양반들을 맞이하고. 그 다음엔 세이버의 마스터인가."
남자는 옅은 한숨과 함께 앞으로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 * *
"대단하구만. 이것이 영령의 싸움이라는 것인가."
어느 저택. 네 명의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복을 입은 사람 중 한 명은 백발의 노신사였고 다른 한 명은 네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었다.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은 그림. 하지만 거기에 그려진 것은 붓으로 그린 것 같으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림 속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작게 그려져 있었고, 그 주변은 공장 부지같은 모습이었다.
"과거의 영웅들이 현세에 불려와 마술사들에게 사역되어 만능의 원망기를 두고 전쟁을 벌인다. 이것이 바다 건너 일본의 후유키에 있었던 성배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의원님."
한복을 입은 노신사에게 의원님이라고 불린 남자의 이름은 박항진. 신미래공화당 소속의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그의 오른손 손등에는 붉은색의 문양, 영주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모종의 경로로 후유키에서 일어났던 성배전쟁의 존재를 알아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해체된 대성배의 파편을 얻어 들여왔다. 이후, 마술사 출신인 '선생'의 협력을 얻어 마술 혈통이 있는 자신이 주가 되고 보좌관이 마력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캐스터를 소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마력을 이용하면 그 대성배라는 물건을 가동할 수 있다는 말이구만. 선생께서 마술에 몸 담그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의원님과 보좌관 분이 마술 쪽의 혈통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캐스터를 사역하고 있진 못하셨을테니까요."
노신사는 여성 쪽을 보며 말했다. 캐스터라고 불린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저도 설마하니 진짜로 이 자가 도술에 몸을 담근 바 있던 여인일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선생께서 가지신 재능과 비교하면 소녀의 재능은 그저 이렇게 그림을 보여드리는 것 뿐이옵니다."
"그 그림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여기에 앉아서 저 상황을 볼 수 있었던 거지만 말이네. 버서커가 아주 큰 일을 해주었습니다, 선생."
선생이라고 불린 노신사의 오른손에도 박항진과 다른 형태의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노신사도 마찬가지로 버서커를 사역하고 있는 마스터였던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었던 그림은 다름아닌 캐스터의 도술을 이용한 것으로 어느 지점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말이 그림이지 사실상 원격으로 현장을 생중계하는 영상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었다. 즉, 그들이 지금까지 보고 있었던 것은 구로의 페공장에서 있었던 4기의 서번트의 전투. 모든 것이 버서커의 마스터인 '선생'이 버서커를 이용해 나머지 3기의 서번트들을 불러들여 충돌을 유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들에 대해."
"진명에 대한 추측을 묻는 것이라면 글쎄요. 저는 의원님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허허, 제가 선생만큼 이런 쪽에 대해 잘 알 리가요. 다만, 다른 둘이라면 모를까 라이더는 대충 감이 잡힙니다만..."
박항진은 난처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의원님. 제가 조언을 드리자면, 이런 것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조용히 있던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그의 진명이 무엇이던, 생전에 어떤 인물이었던 그는 지금은 서번트. 사역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희가 저 자를 격퇴하는 것에 거리낌이 있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보좌관 나리의 말대로입니다. 이 미천한 여인이 감히 아뢰건대, 그런 것에 신경쓰셔서야 나리께서 원하시는 대업을 이룰 수 있으신지요?"
"으음... 그것도 그렇구만. 그래, 정체가 무엇이든 서번트일 뿐이지. 안 그렇습니까, 선생?"
"그렇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법입니다."
다른 이들의 독려에 박항진은 껄껄 웃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상황도 종료되었겠다, 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이쿠,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럼 모셔다 드리지요."
"아닙니다, 의원님. 혼자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앞으로의 상황은 제게 맡겨두시죠. 버서커는 추적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이니 언제든지 의원님께서 원하시는 상황을 유도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노신사는 박항진과 악수를 하고 그의 저택을 나왔다. 한참 발걸음을 옮기던 때,
"나리. 돌아왔소."
골목에서 누군가가 나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버서커였다.
"수고했네. 덕분에 저쪽도 만족하고 있어."
"그러면 다행이네. 마지막으로 제대로 만족시켜드렸으니까."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노신사는 나지막히 물으며 버서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움에서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버서커는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나리. 나 이 일에서 손 떼야겠소. 그 두 사람을 유도하는 건 더 못해먹겠단 말이요."
"왜 그러는가, 갑자기."
"저 자들이랑 같이 있었다며? 그럼 나리도 보지 않았소? 그 라이더 말이요."
"라이더가 뭐 어때서 그러는가?"
"나리 시대 사람들 말로 하면 성웅이란 말이오, 성웅! 그 충무공이 상대라고!"
버서커의 외침에 노신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리는 말이요. 지금 나보고 그 위대하신 양반이랑 싸우라 하고 있소, 알고 계쇼? 내가 아무리 저자 바닥에서 제대로 된 도리고 뭐고 못 배운 인간이라 해도 그 유명한 영웅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 게 얼마나 미친 짓거리인지 알고 있다 이 말이요."
버서커의 말을 들은 노신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긴, 무리는 아닐세. 이해하네. 하지만..."
노신사는 버서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작게 무언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버서커는 잠시 놀란 빛이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그 말, 보증할 수 있소?"
"당연한 얘기일세."
"그렇다면 문제없지. 난 이만 물러가겠소. 또 필요하면 부르셔."
버서커는 영체화로 모습을 감추었다. 노신사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럴 리 없지. 불가능해. 아니, 가능하더라도... 그렇겠지.'
* * *
"설마하니 공투하게 된 자가 이름 높은 대영웅이었을 줄은 몰랐소. 영광이오."
성민의 자취방. 어제의 충돌 이후 네 명이 다시 모였다. 원래대로라면 그 날 수강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자체휴강을 하고 정비를 하자는 윤아의 제안에 성민은 마지못해 승낙하고 이렇게 모인 것이다. 그들은 어제의 상황을 통해 얻은 정보를 공유함과 함께, 재차 양쪽 서번트의 진명을 다시 한번 파악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오. 왜는 신의를 지킨 적이 없다 들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 귀화한 이가 있다고는 들었소만, 설마하니 그 당사자를 이렇게 대면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오. 항왜장군 '사야가', 모하당 김충선 공."
모하당 김충선. 본명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장수였을 시절의 이름은 사야가.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을 반대하였으나 억지로 출진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게 되었고, 이후 조선에 상륙해서 3천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순하여 전쟁에서 활약한 항왜장수의 대표주자 격의 인물. 그것이 아처의 진명이었다.
"지금은 사야가라 불러주시오. 이 영기는 내가 조선에 막 귀순할 당시의 모습이니."
"근데 왜 이 사람이 현계한 걸까요..."
서번트가 소환될 때에는 그 서번트와 연관이 있는 성유물이 촉매로 필요하며, 그것이 없을 경우 소환되는 서번트는 마스터와 제일 궁합이 좋은 영령이 소환된다. 성민이 처음 윤아에게 성배전쟁에 대해 들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소환되는 과정에서 촉매라 할 것이 없었던 성민 입장에서는 왜 사야가라는 영령이 자신의 서번트로 소환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내 생각에는 촉매가 있었다고 보는데?"
"네? 그게 무슨..."
"너 버서커한테 습격당한 게 나랑 같이 도서관에서 과제 자료 찾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지?"
"네. 그랬었... 아, 설마?!"
"그래. 어째서 그게 촉매로 작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조사한 항왜에 대한 과제자료. 그게 촉매가 되었던거겠지."
성민은 황당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로 촉매가 될 수 있는 거였나...
"그보다 내가 의문이 드는 건 어째서 거기에서 아처를 소환하고도 정식으로 마력 패스가 연결되어 있느냐는 거야. 내가 교수님께 들었던 바로는 정식으로 서번트를 소환하려면 마법진과 소환 영창의 보조가 있어야 하고, 그런게 없다면 마력 패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다고 들었거든."
"선배는 그렇게 소환하신 거에요?"
"어. 참고로 난 현충사 구 본전 근처에서 난중일기로 소환했어. 원본은 아니었지만."
"뭐, 원본 가지고 소환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원본 가지고 소환했다면 그거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였겠지. 성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어제 교전으로 얻은 정보를 정리해보자."
노트북을 펼치며 윤아가 말했다.
우선은 버서커에 대한 정보다. 가장 격하게 싸워본 라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대장군전을 알아본 것으로 보아 버서커가 생전 살았던 시기는 빨라도 자신과 비슷한 시기, 아니면 그보다 후대. 정식으로 무예를 배우진 않았지만 저자와 뒷골목을 전전하며 싸움을 배운 강자. 거기에 웬만한 무관들도 연습으로 숙련도를 높이지 않으면 다루기 어려운 편전을 다룰 줄 아는 것으로 보아 당대의 무예 대부분은 통달한 수준이라고 한다. 다만, 정식으로 무예를 배우지 않은만큼 직감에 의존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 흠. 싸우면서 보구를 개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그게 그 쪽 마스터의 명령으로 보구 개방을 자제한 거라면, 그 자의 보구는 상시발동형의 일화성 보구일지도 모르지."
라이더의 추측대로라면 이전에 윤아의 위치를 찾아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스킬이 아닌 보구를 통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정리되었음에도 버서커의 정체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장길산 아닐까요?"
성민은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놓았다. 저자와 뒷골목을 전전하며 싸움을 배운 강자이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라면 의적이라 불린 인물이 가장 머리속에 떠오른다는 것이 그 이유. 조선시대 의적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홍길동과 임꺽정은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인물이니 자연스럽게 남는 사람은 임진왜란 이후, 숙종 시절 활동한 장길산 뿐이라는 것이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를 어떻게 추적하였느냐가 이해가 안 돼. 물론 장길산은 사료가 부족하다보니 우리가 모르는 일화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였다면 단번에 알아봤을텐데...'
라이더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버서커는 지금으로써는 난적 중의 난적이야. 무엇보다 사야가 공의 조총 포화를 뚫고 역습을 가할 정도의 실력자니까. 만약 그쪽의 마스터와 조우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포섭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내 의견이야."
"그런 의미에서 현재 버서커 진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버서커 그 자체의 전투력보다는 그의 마스터가 어떤 인물이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야가의 말대로였다. 성배전쟁의 승리, 나아가 이 성배가 후유키 대성배와 연관되어있을 경우 파괴가 목적인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상대가 협력해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버서커 진영에 대한 대처를 고민하려니 머리가 아파오는 윤아였다.
다음은 세이버에 대한 정보다. 사야가가 당시에 부딪쳐서 얻어낸 정보대로, 세이버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된 인물. 그리고 그 정도로 반응하기 어려운 공격을 자신의 의식과는 별개로 본능의 레벨에서 방어하는 것으로 보아 관련된 모종의 스킬이나 보구가 있을 것이라는 게 사야가의 추측이었다.
"만약 총격을 예상했다면 자신이 막고도 그런 얼떨떨한 표정을 짓진 않았겠죠. 그렇다면 스킬이나 보구를 통한 모종의 가호가 있어서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선 무의식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공격보다는 방어 쪽에 유명한 일화를 남긴 인물인걸까."
역사적으로 무공을 남긴 사람들 대부분은 적극적인 공세를 통해 외세를 물리친 것에 있었다. 방어전을 통해 이름을 남긴 인물은 전세계를 통틀어도 그 반대보다 적은 수였다. 성민의 머리속에도 당장에 세계적으로 범위를 넓혔을 때 생각나는 인물이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왕 뿐이었다.
"...라이더, 하나 물어볼게."
"뭔데?"
말없이 생각하던 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너도 세이버의 얼굴은 봤지?"
"그랬지."
"그럼 그 얼굴, 당신이 아는 사람이었어?"
윤아의 질문의 의도를 읽었는지 라이더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말해두자면, 그 양반 정발 대감이나 송상현 대감은 아니야. 두 사람은 내가 생전에 한번씩 본 적 있으니 기억하고 있어."
"엑, 아니었어?!"
성민은 당황했다. 방어전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라면 임진왜란 당시 부산성에서 왜군의 첫 상륙을 막아내며 장렬히 전사한 정발 장군이나, 바로 그 다음 동래성에서 '전사이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동래성을 수호하다 전사한 송상현 장군을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추측이 보기 좋게 빗나가다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 거요, 성민 군?"
"아니... 난 아처도 조선시대, 라이더도 버서커도 조선시대니까 세이버도 조선시대 사람인 줄 알았지..."
성민의 변명에 윤아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장성민 씨. 성배전쟁이라는 건 어느 한 시대의 인물들만 서번트로 현계하는 게 아니야. 3명의 서번트가 우연찮게 비슷한 시대의 인물일 뿐 아직 우리가 조우해본 적도 없는 캐스터는 뜬금없이 진명이 환웅이나 장각, 우리가 잘 모르는 남미나 아프리카 신화의 주술사일수도 있어."
윤아의 지적에 성민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무엇보다 그의 갑옷은 조선에서는 본 적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갑옷 양식이라고 하기엔 일본은 분명히 아니지요."
"당시 명의 갑옷도 그런 생김새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일단 세이버는 우리랑 동일 시대의 인물은 아닐 거야."
두 서번트의 의견을 들은 성민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윤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적어도 서번트 하나는 더 만나고 결론을 내리려고 했던 내 개인적인 추측인데."
"일단 말해보시오. 지금은 불투명한 단서라도 필요할 수 있으니."
"...이 성배전쟁, 불려온 영령은 아마 전부 한국계일 거라고 생각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성민이 처음 윤아에게 성배전쟁에 대한 지식과 함께 후유키에서 있었던 성배전쟁에 대해 함께 들었을 때, 당시 후유키의 성배전쟁은 주로 서양의 여러 영령들이 서번트로 현계했다는 것을 들었다. 일본계 영령이 나왔던 것은 5차 성배전쟁 때. 그조차도 정식 서번트가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현계된 서번트였다고 했다. 그래서 성민은 아직 조우하지 못한 다른 서번트의 정체를 추측하면서 한국계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나라의 인물들까지도 생각나느대로 후보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의 추측이 맞다면 진명 추측 난이도가 훨씬 낮아진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어쨌든 한국계 영령 중에서만 후보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아직 100% 맞다고 할 수 없는 추측은 아니지만 그걸 전제로 둔다면 얘기는 쉽게 흘러갈 것이다.
"일단 그걸 전제로 추측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아니라면 그 때 추측을 다시 하면 될 일이고."
라이더의 제안에 나머지 모두 동의했다. 덕분에 세이버의 정체를 추론할 수 있는 범위는 급격히 좁아졌다. 방어전으로 이름을 남겼으면서 사야가나 라이더와는 시대가 다른 한국계 영령. 순간 성민의 머리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선배, 혹시..."
"어?! 잠깐만, 다들 이것 좀 봐봐."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본 윤아는 당황한 표정과 함께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인터넷 뉴스. 가스 폭발 사고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사고가 난 위치는...
"구로역에 인접한 폐공장? 여기 설마..."
"네. 어제 저희가 교전을 치뤘던 거기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세이버나 버서커가 저렇게 했다고 하기엔..."
"화재의 흔적이 너무 커. 그 때 내가 대장군전으로 한쪽 벽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것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박살나서 싹 다 타버렸어."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거기에 있던 4기의 서번트 중 그 누구도 이 화재현장 조성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얘기는 하나. 누군가 그 현장을 보았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현장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만약 서번트라면..."
"누가 거기에..."
- - - -
지금까지 마스터-서번트(진명) 및 여타 관련 등장인물 정리
장성민 - 아처(사야가)
김윤아 - 라이더
곽창훈 - 랜서
불명 - 세이버
불명 - 어새신
박항진(&보좌관) - 캐스터
'선생' - 버서커
진청색 도포의 남성
일단 라이더는 작중 직접적으로 진명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서번트의 진명은 직접적으로 드러난 아처만 적어둡니다.
어쩌다보니 삘받아서 2편 연속으로 적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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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예상이지만 꽤 많은 분들이 캐스터는 누구일지 예상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예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버서커도 만만치 않게 정체 예상하기 힘들것 같은 케이스라고 생각은 하지만... | 20.09.14 16: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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