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이터 3 캐릭터 노벨
제 3장 클레어 빅토리어스 편
「때묻지 않은 선택 2화」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어. 클레어, 네가 협조해줬으면 해."
어느 날, 갑자기 항구를 떠났던 에드릭 오빠가 내 앞에 나타났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돌아왔다. 그렇게 겸연쩍게 웃는 오빠의 모습에 나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응! 내가 반드시 아버지와 화해시켜 줄게!"
오빠가 돌아와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날 의지해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반드시 오빠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밝은 미소로 아버지를 불러냈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오빠의 바람대로.
분명 오늘 저녁에는 다시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저택의 뒤로 달려갔다.
오빠가 사라진 후 나는 저택의 뒤쪽에도 작은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오빠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마음에 드는 꽃에 소원을 담아 만든 꽃밭이다.
설마 그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지다니.
"아버지! 오빠!"
웃음꽃을 피우며, 나는 두 사람이 기다리는 장소로 달려갔다.
여기서부터 다시 한 번, 행복한 내일로 걸어가기 위해서.
"...어?"
형형색색의 꽃으로 장식한 꽃밭은 새빨간 피로 뒤덮여 있었다.
가슴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뒤로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버지...?"
휘청거리며 다가가 유해에 기대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몸을 약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뼛속까지 저리는 듯한 감각에 습격당해 호흡이 가빠져 간다.
필사적으로 흔드는 그 몸으로부터 온기는 사라져 갔고, 어느샌가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아...!?"
피투성이가 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아버지의 유해에 매달렸다.
왜? 어째서? 부풀어 오르는 의문에 답은 나오지 않았다.
터질 듯한 의식 속에서 피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문득 앞으로 향했을 때였다.
저 멀리,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림자는 이쪽을 향해 무엇인가 중얼거렸고, 그 순간 나는 의식을 잃었다.
항구에 침입한 도적에 의한 랜달 빅토리어스 살해 사건.
누군가가 빈 껍질처럼 되버린 나에게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었다.
대대적으로 치뤄진 장례가 끝나고도 아직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내게 이번에는 오빠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회역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현재로서는 사망이 확실하다, 라고.
소중한 가족들을 연달아 잃은 나는 며칠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음이 삐걱거리는 듯한, 강렬한 위화감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럼에도 주위의 어른들은 격려의 말을 건내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당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잊어버리면 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들의 말만 들으면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가차없는 '상냥함'이 내 안에서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래... 아버지는 도적에게 살해당했어. 오빠는 회역에서 죽고 말았어.
빅토리어스 가는 이제 내가 지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를 지켜준 사람들에게 이제는 내가 보답할 차례야.
결의와 함께, 나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그 무렵부터 저택 안이 분주해져 갔다.
글레이프니르의 고위 관리직 사람들. 다른 항구에서 온 사자. 그밖에도 정체 모를 사람들이 몇 명이나 저택에 드나들게 되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달라붙을 듯한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냈다.
랜달 님에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랜달 님의 친구입니다.
다들 정해진 듯 그렇게 말했고, 그 뒤로는 아버지의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나의 장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항구의 소유권이나 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대부분은 오랜 세월 집안을 섬겨준 사용인들이 응대했지만, 이 사람들 전원이 빅토리어스 가를 노리는 적이라는 것을 싫어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쉽게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들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는 날들은 내게는 너무 괴로웠다.
부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주할 때, 의연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내 마음은 언제나 그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랜달 님이 돌아가시고 에드릭도 사망이 확실한 지금 빅토리어스 가가 보유한 막대한 이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당주가 필요합니다."
어느 날의 일이다. 아버지의 측근을 맡아주고 있던 사람이 하인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약간만 문을 열고 안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허울뿐이여도 상관없습니다. 빅토리어스 가의 정당한 후예로서 클레어 씨가 나서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지킬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역시나.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빅토리어스 가를 지키고 싶다.
분명 많은 폐를 끼치게 되겠지만, 빅토리어스의 이름을 짊어질 각오는 되어...
"그럼 역시 클레어 아가씨께서는... 갓 이터가 되어 전장에 나가 주실 수밖에..."
"어...?"
그 말에, 무심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의 안쓰러워 하는 듯한, 그러나 어딘지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고압적인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힌다.
"무문(武門)으로 이름을 날리던 빅토리어스 가문이 건재함을 대내외에 드러내려면 그것 밖에는..."
이전에 아버지께 말한 적이 있다.
나도 갓 이터가 되어서 함께 싸우고 싶다. 아버지나 오빠가 함께라면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를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리가 없잖니. 너는 우리가 돌아올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거라."
나의 사명은 전장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느덧 그 말은 절대적인 것으로 내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빅토리어스 가를 잇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내가 전장에서... 아라가미와 싸운다?"
아버지도 오빠도 이제는 없다. 그 누구도 신용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클레어 아가씨..."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싫다고 말하면.
그 순간, 나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만다.
빅토리어스 가도. 우리를 따라주던 사람들도.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연약한 마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
"아, 아가씨... 기다려주세요!"
그 자리의 중압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달려나갔다.
지난날, 따뜻한 내일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정원을 향해.
하지만 꿈을 향한 첫걸음이었던 나의 꽃밭은 아버지의 시신을 처리할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꿈의 잔해를 앞질러서 나는 처음으로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저택의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만큼은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세계로 가고 싶어서.
"하아... 하아..."
이유도 모른 채 뛰어다니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항구의 격납고까지 와 있었다.
그곳에는 본 적 없는 거대한 회역답파선이 한 척, 중후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자리잡고 있었다.
만약, 만약에, 몰래 이것에 탈 수만 있다면...
"앗...!"
그 순간, 무심코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픔을 참으며 눈을 떠보니 오른손이 깊이 베여버린 듯 피가 흥건했다.
"으, 으으..."
피를 흘릴 정도로 상처를 입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제 안전한 우리 속에서만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분명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어른들의 그 눈빛에 노출될 것이다.
기대와, 연민과, 강압의 눈길.
비록 허울뿐인 당주라도 전장에 나서서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리고 혹시라도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내가 죽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클레어 빅토리어스의 운명일 것이다.
"싫어... 싫어...! 무서워... 무서워...!!"
줄곧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어른들의 시선이. 권력과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빛이 변하는 그 순간이 두렵다.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거짓말쟁이야.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머리 속에서 몇 번이고 울려퍼졌다.
버려버리라고. 자신의 미래를 살아가라고.
하지만 지금 버려버리면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조차도.
모든 걸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어.
그렇지만, 누가 좀. 누가 좀. 누가 좀.
"도와줘...!"
이 목소리를 듣고...
"그 상처, 잠깐 보여줄래?"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또래에 여자아이가 길고 아름다운 은발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차갑고 예리한 얼음 같은 눈빛이 나의 가치를 판단하듯이 바라보고 있다.
"미,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이런 상황이라도 누구에게나 고상하고 의연하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몸을 움직였다.
눈물을 훔치고 자세를 바로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피를 흘리고 울고 있던 여자아이를 괜찮다고는 말하진 않아요."
"앗, 아, 저기...!?"
그 아이는 억지로 나를 잡아끌어서 근처에 벤치에 앉히더니 꺼낸 소독액으로 상처를 정성스레 치료해주었다.
"미안해, 붕대가 없으니까 이걸로 참아."
흰 손수건이 부드럽게 상처를 감쌌다. 너무나도 뛰어난 솜씨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내 옆에 앉은 소녀의 오른팔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붉은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갓 이터... 그 나이에?"
"그런데, 그게 뭐? 너... 클레어 빅토리어스지?"
그 아이는 팔찌가 있는 오른손을 내밀며 작게 미소지었다.
"나는 에일 알베르트. 너와 친구가 되라는 명령을 받고 온... 너의 적이야. 잘 부탁해."
알베르트 가는 변경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가이며, 우수한 갓 이터를 배출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재앙으로 인해 영지의 대부분이 회역에 휩싸이면서 일족의 갓 이터들도 대부분 사망하고 알베르트 가는 몰락 직전의 상황에 처했다.
거기서 새롭게 알베르트 가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선택된 갓 이터가...
"바로 나야. 집안의 존속만을 위해 수많은 후보들 중에서 재수없게 뽑혔어."
오른팔에 있는 팔찌를 바라보면서 에일은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언젠가 글레이프니르에 소속될 거야. 그러니까 이틈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랜달 님의 조문을 빙자해 너와 친구가 되어서 커넥션을 만들어라, 라는 게 부모님으로부터의 지령이야. 참 싫지? 치사해서."
내 마음에 파고 들기 위해서 일부러 회역답파선을 타고 먼 곳에서 왔다고 말하는 에일은 불쾌한 듯이 코를 울리며 그렇게 내뱉었다.
"하지만 빅토리어스 가는 지금 가드가 단단해서 평소 교류가 없던 귀족 가문과는 접촉을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쫓겨나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참 신기한 인연도 있네. 덕분에 알베르트 가가 변변치 않은 귀족이라는 게 네게 알려졌어."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는 에일을 나는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 어째서... 그런 걸 말해주는 거야?"
남들 눈을 피해서 상처까지 치료해줬다. 에일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
속마음을 숨기고 다가왔다면 난 에일에게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방금전까지는 부모님 말씀대로 너와 친구가 될 생각이었어. 이런 식으로."
그렇게 말하며, 에일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살며시 몸을 기대어왔다.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 동년배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눈길에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근데, 바로 그 클레어 빅토리어스가 아무도 없는 격납고 구석에서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지..."
그렇게 탄식하며, 에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런 아이를 속이다니, 무슨 생각을 한 걸까... 하고 말이야. 식어버렸어."
피곤한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일은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왜 울고 있었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어줄게."
"그...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부모님의 꼭두각시니까. 누군가가 물어봐줬으면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기분 잘 알아."
에일은 겹친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뿐이야. 전부 듣고, 그리고 못 들은 걸로 해줄 게.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여기서 하고 가... 마음이 편해지니까. 응?"
격려도 아니고, 재기시켜 주려는 것도 아닌, 그저 감춰둔 연약함을 뱉어내면 된다고. 에일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동안 만났던, 가면을 쓰고 가짜 미소로 다가오던 어른들과는 달랐다.
자조적이지만, 그렇기에 성실한 분위기.
만일 이것이 처음부터 내게 접근하려는 에일의 작전이었다면 매우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그 말에는 무엇 하나 더러운 속셈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일에게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불쑥,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에 대한 감정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거기서부터는 나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날의 답답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제멋대로인 어른들에 대한 반감과 꿈이 찢겨져나간 허탈함을 차례로 쏟아내었다.
이렇게도 부정적인 감정이 쌓였었다니, 스스로도 웃어버릴 정도였다.
타버린 재 같은 감정을 나는 눈물과 함께 에일에게 닥치는대로 쏟아냈다.
"힘들었겠다..."
모든 걸 들은 에일은 손끝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이다. 그저 불평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에일이 말했던 것처럼 가슴에 있던 커다란 응어리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조금 편해진 것 같아."
"그랬다면 다행이네. 그런데 지금부터 어쩌려고?"
"나는... 역시..."
"역시 적합시험을 받아야겠지, 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난 반대해. 매일 어른들에게 감시당하면서 훈련과 공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비난하는 듯한 한숨 소리를 듣게 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로워."
에일은 붉은 팔찌를 원망하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게다가 아무리 단련해도 공부해도 전장에 나가면 죽음이 바로 옆에 있어. 각오가 없다면 그만 둬."
어딘가 쓸쓸한 듯이 에일은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럼 에일은... 각오를 했어?"
내 질문에 에일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일어섰다.
"나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끝낼 생각은 없어."
당당하게 팔찌를 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에일은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내왔다.
"부든, 명성이든 부모님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어보이겠어. 그리고 내가 알베르트 가를 지배하는 거야. 권력에 눈이 먼 부모님의 입을 다물게 하고 내가 원하는 알베르트 가를 만들어 보이겠어."
자신을 옭아맨 일족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 위해서...
운명에 항거하려는 그 눈빛은 내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청렴하고 아름다워보였다.
"후우...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건 나도 처음이야. 너도 잊어버려라?"
문득 힘을 뺀 에일은 수줍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클레어 아가씨! 클레어 아가씨!"
위층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중이 나온 것 같네. 이야기는 여기까지."
에일은 발길을 돌려 배를 향해 걸어갔다.
"제대로 적합시험은 받지 않겠다고 말해야 돼? 넌 빛속에 있는 게 좋아.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 그럼 갈게."
"아..."
가버린다.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아무런 관계도 쌓지 못하고, 이 순간이 끝나버려.
"내, 내가 갓 이터가 되는 게 이용가치가 있는 것 아니야!? 그런데 왜 말리는 것 같은 말만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그 등에 소리치고 있었다.
멈춰선 에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게... 후훗, 아까운 짓을 해버렸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봐주었다.
한낱 거짓없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애정 어린 눈.
에일의 미소에서 나는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잘 있어요, 클레어 빅토리어스. 언젠가 꽃으로 가득한 항구를 만들기 바래요."
마지막으로 들은 그 말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만난 지 겨우 십여 분. 맞닿았던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에 먹혀들기만 했던 내 마음에는 작은 불꽃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이 손수건, 돌려주러 갈게!"
맹세의 말이 에일에게 닿았다.
"필요없어... 네 피가 묻은 손수건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에일에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에일이 뭐라고 하든 난 결심했어! 반드시 돌려주러 갈 거야! 네가 세계의 어디에 있든 내 의지로 꼭 전해주러 갈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잊지 마!!"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숨겨둔 마음을 토해낸 상대가 있었다는 것을.
상냥한 너의 마음과 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물끄러미, 멀리서 내 눈을 바라보던 에일은 이윽고.
"그럼... 그 날까지 죽지 않고 기다릴게."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클레어 아가씨, 여기 계셨습니까!"
나를 데리러 온 사용인에게 나는 의연하게 돌아섰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저택에 돌아가서 모두에게 전할 말이 있어요."
아버지와 오빠가 쌓아온 빅토리어스 가의 영광.
글레이프니르라는 거대한 조직. 그리고 그것에 구원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을 내가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어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강한 빛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내게 차갑고 메마른 어둠 속에서 길을 제시해준 사람이 있었다.
설령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자신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꿈을 꾸어도 좋다고.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갓 이터가 되겠습니다. 빅토리어스 가의 당주로서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어요."
그것이 이정표와 용기를 받은 나의 대답이었다.
결국은 타인을 위한 것이냐며, 에일은 기가막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나를 이용하려는 어른들을 위한 게 아니다.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꽃을 피우기 위해 내가 계속 찾아해매던 길이기 때문이다.
피가 묻은 손수건을 움켜쥐고 나는 한걸음을 내딛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빛으로 이끌어갈, 내가 원했던 미래를 향해.
저자 : 카와세미 히스이 (주식회사 테일 포트)
원안 : 요시무라 히로시 (주식회사 반다이 남코 스튜디오)
역자 : ei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