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물소리처럼 가난하게 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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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이던 것이 오늘 새로 보이면 그것이 사랑이다. 아니
면, 이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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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속에는 꽃이 숨어 있다. 아니, 꽃 속에 당신이 숨어
있다. 세상으로 이어진 모든 끈을 놓는 아름다운 자유, 나를
풀어버리는 해방,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광기, 그게 꽃이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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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옷보다는 속옷이 깨끗한 사람, 속옷보디는 피부가 깨
끗한 사람, 피부보다는 그 속의 피가 깨끗한 사람, 맑은 피
보다도 영혼이 깊고 깨끗한 사람…… 이런 말도 모르고 그
냥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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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집은 나뭇가지로만 짓는다. 그것도 죽은 나뭇가지
로. 새들에게는 죽은 잔가지도 살 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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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꽃이고 싶어서, 나도 꽃같이 아름답고 싶어서, 나도
저 꽃처럼 내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어서, 그래서 사람들은
중심과 절정을 꽃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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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대지에 비 내리다. 강 건너 마을 뒤에 은행나무도
샛노랗게 젖다. 젖어 산이, 강이, 빈 들이, 젖어 천천히 오래
눕다. 내 마음이 젖지 않으면 저 아름다운 젖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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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은 해사해. 개망초꽃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
사해. 가다가 돌아와 개망초꽃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개망
초꽃은 해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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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따라다닌다. 가벼이 떠
서 나는 나비떼 같다. 저 오래된 인류의 희망, 꽃이파리들이
하얗게 굴러가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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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로 사라지는 눈송이들을 보라. 내게 사랑은 늘 그렇
게 왔다 갔다네. 계절처럼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
지면서 잎 피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비가 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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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들을 하지만, 우리는 늘 꽃 진 뒤
에 그 뜻을 깨닫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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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수많은 별이 저렇게 반짝이며 살아가듯이 인
생도 그러하다. 누구의 삶이 더 빛나고 누구의 삶이 더 희미
한 것은 아니다. 삶은 다 반짝인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별
이 반짝이듯이 지상의 모든 사람도 반짝인다. 풀잎 하나 나
뭇잎 하나 가만히 놓여 있는 돌멩이 하나가 다 지상의 것이
다. 삶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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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봄이 와서 풀과 나무에 꽃이 피듯이 당신 속에
도 꽃이 숨어 있다. 아니, 꽃 속에 당신이 숨어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믿는 그 생각으로는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한다.
그 생각은 꽃이 되지 못한다. 진 짐 부리고 불끈 쥔 주먹 펴
기를, 세상의 모든 것을 벗어던질 광기가 그대 속에도 숨어
있다. 그 광기가 저렇게 다디단 꽃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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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의 근심과 괴로움을 벗고 봄 물소리처럼 가난하
게 서보자. 가장 가난할 때 생각은 맑고 밝다. 우리도 저 피
어나는 꽃들처럼 환하게 마음을 다 열어보자. 가슴속에 아
무런 사심이 없을 때 이 봄 당신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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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낡을수록 좋은 것은 사랑뿐이어서 오래된 나의
사랑 노래들이 새파란 싹으로 돋아난다. 사랑은 끊임없이
샘솟는 물과 같아서 늘 새로운 노래가 되어 세상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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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쩌면 저 운동장가에 있는 미루나무 잎을 스쳐가
는 바람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계절의 모
퉁이를 돌며 자기의 인생 꼬라지를 생각하고 들여다보며
외로워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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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다 발라버린, 가시만 남은 고기처럼 마음이 앙상하
게 초라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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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겨울날 아침 문을 열면 펑펑 내리는 눈송이
만큼 중요하지도 않는 것으로 사람들은 싸우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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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아! 된서리 친 초겨울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 두 눈
을 부릅뜨지 말고 큰 소리로 말하지도 말라. 은행잎은 바람
한 점 없이도 땅으로 가만히 내릴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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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새는 살구가 익을 무렵 살구나무 가지를 포롱포롱 포
로롱 날아다닌다. 나는 아이들과 새들이 나는 모습을 오래
오래 바라본다. 그 새들이 마치 우리 아이들 같다. 세상을
나는 일이 어렵고, 낯설고, 서툴다. 그렇게 자기 새끼들을
키워 날려 보내면 새들은 자기들의 집을 버린다. 새들은 자
기가 지은 집에서 새끼만 길러내면 집에서 살지 않는다. 그
냥 자기들이 늘 자는 나뭇가지 위에서 잔다. 새들은 집을 버
린다. 죽은 풀과 죽은 나뭇가지와 자기 깃털로 만든 집을.
그 집은 금세 자연으로 돌아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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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바라보아야 생각이 우러나온다. 나무를 보고,
꽃을 보고,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아야 생각이 쌓이는 것이
다. 이렇게 생각이 쌓이고, 생각이 모여들고, 생각이 넓어지
면 사람들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의 질서를 배운다.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김용택,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