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은 그 사람의 겉모습을 판단하여 내면의 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이다. 생김새, 옷 매무새, 그 사람의 냄새나 말투, 그 말투로 인해 드러나는 성격 따위로 첫인상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이 여자의 경우 첫인상은 무척 독특했다. 얼굴도 예쁘고 드래니형의 흰 드레스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겉모습은 매우 호감적이었다. 하지만 독특한 느낌을 받은 것은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너, 이제부터 내 주인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할 법도 했지만 내 경우엔 달랐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어디선가 유행하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눈빛을 봤을 때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날 바라보는 강옥 같은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 없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이런 농
담 같은 것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를 주인이라 부르겠다.”
금색의 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다. 푸른색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기품과 도도함은 마치 제대로 교육받은 귀족과도 같았다. 이름은 리엘페니안즈 카스타니아라고 한다. 줄여서 리엘.
그녀가 나를 갑자기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이유는 자기가 원래 드래곤인데 1200년 전에 나의 선조와 맺었던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뭐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를 믿겠는가 하겠지만 어이없게도 그녀는 인간의 둔갑을 풀고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말 할 것 없이 납득하고 말았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변신했는지는 나중에 밝히겠다. 지금 밝히면 처음부터 글이 조잡하게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이런 드래곤님께서 날 주인으로 섬기는 이유 따윈 상관 없었다. 이런 여자의 주인이라면 해볼 만도 하니까. 일단 이용가치가 많을 것이다. 상냥한 얼굴로 차를 내준다든지, 나를 깨워줄 때도 이 여자가 깨워준다면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부려먹기에 좋다.
하지만 드래곤인 그녀가 날 주인이라면서 섬기는 진짜 이유는 뭘까? 혹시 날 먹어버린다거나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다던가 하는 건 아닐까? 그녀와 만난 뒤 몇 분쯤 후에 이런 생각들이 물 짜내는 스폰지처럼 쭈욱 올라왔다. 난 원래 의심 같은 건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이 재수없게도 마을이 드래곤에게 공격 당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리엘이 사람으로 둔갑한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키도 적당하다. 아니, 세세하게 설명 것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외모에 대한 찬사를 모두 쏟아 부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나는 처음에 리엘이라는 장미에도 가시가 붙어있을 줄은 몰랐다. 꽃 집에서 파는 것처럼 깨끗하게 다듬어진 장미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흠잡을 것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도 장미와도 같은 가시가 있었다.
“주인아, 차를 내오너라.”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반말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말을 쓰라면 쓰라지. 오히려 내가 고맙다. 나이도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존댓말로 불리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 주인이라 불러놓고 끝에마다 반말이면 날 은근히 무시하는 기분이라 싫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르랬더니,
“이름? 인간주제에 잘도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라는구나”
오히려 내 기분만 나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여자와는 초면이니까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인데…… 그 때 순간 울컥해버리는 바람에 온갖 욕을 다 내뱉으며 성질 부렸었다. 내 본 모습 그대로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불행히도 나는 그녀의 가시에 피가 나올 정도로 깊숙하게 찔리고 말았다.
처참하게도 난생 처음으로 여자한테 발로 짓밟혔던 것이다. 가시도 보통가시가 아니었다. 찔리면 반죽음이 되는 그런 가시였다.
“멍하니 뭐하느냐? 귀가 망가졌느냐?”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사이 그녀는 나에게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서 있고 그녀는 소파에 도도하게 앉아서 차를 더 내오길 바라고 있었다. 주객전도라는 건 이런 걸 말하겠지. 내가 역시나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으려니까.
“지금 그 태도는 무엇이냐?! 반항하겠다는 거냐?!”
그렇다. 이건 반항이었다. 그냥 차를 내주기가 싫었다. 남의 명령을 받는 것은 질색이다. 특히 이 여자의 명령만은 절대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차를 먹고 싶으면 네가 해서 먹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말했다.
“싫구나.”
“싫으면 마시지 마!”
“그것은 더욱 싫구나.”
“그럼 어쩌라는 거야!”
“캐슬린을 불러오너라.”
아, 리엘에게 차를 내주었던 게 캐슬린이었구나.
캐슬린은 시장에 갔다. 성실한 여자니까 평소처럼 필요한 물품만 사고서 돌아온다면 곧 돌아올 시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주기는 싫었다.
“캐슬린은 아까 시장에 갔어.”
“으음.. 그렇구나. 그럼 네가 하거라.”
“왜 또 얘기가 그 쪽으로 세냐? 정말로 먹고 싶으면 네가 끓이란 말야!”
“못 끓인다.”
“그럼 먹지마!”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얼굴을 찡그린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약간 무서워진 느낌이다. 위험하다. 약간이라도 잘못하면 금세 그녀의 가시가 튀어나올 것이다.
“인간주제에…. 날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목소리 톤도 살짝 변했다. 말 끝이 살짝 떨리었다. 그렇지만 이런 반응은 왠지 재미있었다. 잘못하면 또 다시 밟히겠지만 이번엔 그 때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파충류 따위가 감히 인간을 욕하냐!”
“파…파충류…. 라고 했느냐?”
리엘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다. 의외로 타격이 컸는지 입가를 씰룩씰룩 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파충류야.”
“미천한 인간 주제에….. 감히.”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난 여전히 일어서 있었고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신부의 대기실에 테이블 하나. 소파 뒤의 벽에는 실비아 여신의 초상화가 있다. 실비아는 1000년 전에 일어난 드래곤과 인간의 전쟁을 종결시킨 전쟁의 여신이다. 순백의 드레스에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여신은 햇살을 등진 채로 허공에 떠올라 등뒤의 커다란 날개로 몸을 감싼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너, 계속 일어서 있으면 힘들지 않느냐? 좀 앉거라.”
리엘은 자기 옆자리를 내주었다. 5인용 소파의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한 것이다.
“웬일이래? 평소엔 소파 옆에 앉지 못하게 하더니.”
의외의 선행에 속으로 기뻐하며 소파에 털썩하며 앉았다. 그녀의 바로 옆이다.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거냐? 후후, 하며 기뻐하는 나. 한심스럽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선행을 베푸는 줄만 알았으니까.
내가 자리를 편하게 앉은 것을 확인 한 뒤 리엘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앉은 채로 리엘을 생각 없이 바라봤을 때 문뜩 깨달았다.
그녀의 웃음이
무척 예쁘긴 한데.
주변에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씨익- 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 나쁜 미소..
그 얼굴 그대로.
소파를 잡고 내가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앞으로 넘어뜨렸다.
“우왓?!”
이대로 소파 밑에 깔려버리고 말았다. 마치 관에 들어간 시체처럼 말이다.
“뭐 하는 거야!”
“바보로구나. 내가 순순히 너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알았느냐?”
그 말을 끝으로 우호호호 하며 도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나는 소파를 뒤집어서 올라가려고 했지만 리엘이 누르기라도 하는 건지 소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충류 녀석아! 장난도 정도껏 치란 말야!”
이렇게 말하자 스윽 하고 내 몸통 위의 소파가 분리되었다. 마치 구원의 빛이라도 내려오는 듯 분리 된 부분에서 천장의 빛이 내리쬐었다. 눈 부신 순백의 빛이 내 가슴을 축복하듯 감쌌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으헉! 야 발로 쳐 넣지 마! 너 죽어?! 으악?!”
리엘이 그 틈새로 날 짓이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발인데도 무게가 실린 스톰프는 무척이나 아팠다.
나는 멈출 줄 모르는 발길질을 팔로 막아내다가 슬쩍 피해서 다리를 잡고 그대로 넘어뜨렸다. 의외의 상황에 놀란 건지 리엘은 ‘어?’ 하고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그 틈을 노려서 소파에서 빠져 나온 나는 리엘을 위에서 덮쳤다. 배 위로 올라 타 팔목을 붙잡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상한 짓을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냥 따끔하게 손을 봐줄 생각으로 이랬던 것이다. 하지만 리엘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변함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보니 오묘하게 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웃는… 건가?
난 그냥 이 정도로 끝냈어야 했다. 리엘의 웃음의 의미를 빨리 파악했어야 했다. 내가 꿀밤이라도 먹일 마음으로 손을 치켜 들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들어오고 말았다.
“어라라라라?”
왠지 기쁜 듯이 웃으며 캐슬린이 등장했다. 검은색의 차이나 드레스 같은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곱슬곱슬 풍성한 느낌의 머리. 웃는 게 어딘가 맹해보인다.
“제가 방해했나 봐요. 죄송해요.”
여전히 나릇하게 웃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깐, 왜 사과하는 거지? 뭘 방해했다는 거야?
이런 의문을 품었을 때, 두 번째 사람이 등장했다.
“역시 주인과 하인 관계란 이런 것이군.”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카논이었다. 귀공자처럼 길게 내린 머리카락. 오똑한 콧날과 차가운 느낌의 눈 때문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특유의 날카로운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상황은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는 머리 위로 ? 마크를 띄우는 나와 이긴 것처럼 웃는 리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여자와 그렇고 그런 것을 할… 것으로……..헉, 안 돼!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고 일어서려 했을 때, 이미 카논의 뒤에서는 이 교회의 크루세이더인 미노 가넨스가 지켜보고 있었다.
“랜더스…. 도란트리….!!”
별명, 강철주먹의 은여우. 이 도시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미노는 포니테일로 묶은 짧은 생머리를 살랑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미처 변명도 하기 전에
“짐승에게 말 할 권리는 없어!”
하며 날 요괴 퇴치하듯 두들겨 팼다.
이게 프롤로그의 끝이다.
본편부터는 시점을 변경해서,
주인공인 랜더스와 리엘이 만나게 된 삼일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이 여자의 경우 첫인상은 무척 독특했다. 얼굴도 예쁘고 드래니형의 흰 드레스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겉모습은 매우 호감적이었다. 하지만 독특한 느낌을 받은 것은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너, 이제부터 내 주인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할 법도 했지만 내 경우엔 달랐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어디선가 유행하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눈빛을 봤을 때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날 바라보는 강옥 같은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 없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이런 농
담 같은 것을 너무나도 진지하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를 주인이라 부르겠다.”
금색의 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다. 푸른색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기품과 도도함은 마치 제대로 교육받은 귀족과도 같았다. 이름은 리엘페니안즈 카스타니아라고 한다. 줄여서 리엘.
그녀가 나를 갑자기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이유는 자기가 원래 드래곤인데 1200년 전에 나의 선조와 맺었던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뭐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를 믿겠는가 하겠지만 어이없게도 그녀는 인간의 둔갑을 풀고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말 할 것 없이 납득하고 말았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변신했는지는 나중에 밝히겠다. 지금 밝히면 처음부터 글이 조잡하게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이런 드래곤님께서 날 주인으로 섬기는 이유 따윈 상관 없었다. 이런 여자의 주인이라면 해볼 만도 하니까. 일단 이용가치가 많을 것이다. 상냥한 얼굴로 차를 내준다든지, 나를 깨워줄 때도 이 여자가 깨워준다면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부려먹기에 좋다.
하지만 드래곤인 그녀가 날 주인이라면서 섬기는 진짜 이유는 뭘까? 혹시 날 먹어버린다거나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다던가 하는 건 아닐까? 그녀와 만난 뒤 몇 분쯤 후에 이런 생각들이 물 짜내는 스폰지처럼 쭈욱 올라왔다. 난 원래 의심 같은 건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이 재수없게도 마을이 드래곤에게 공격 당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리엘이 사람으로 둔갑한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키도 적당하다. 아니, 세세하게 설명 것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외모에 대한 찬사를 모두 쏟아 부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나는 처음에 리엘이라는 장미에도 가시가 붙어있을 줄은 몰랐다. 꽃 집에서 파는 것처럼 깨끗하게 다듬어진 장미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흠잡을 것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도 장미와도 같은 가시가 있었다.
“주인아, 차를 내오너라.”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반말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말을 쓰라면 쓰라지. 오히려 내가 고맙다. 나이도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존댓말로 불리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 주인이라 불러놓고 끝에마다 반말이면 날 은근히 무시하는 기분이라 싫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르랬더니,
“이름? 인간주제에 잘도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라는구나”
오히려 내 기분만 나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여자와는 초면이니까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인데…… 그 때 순간 울컥해버리는 바람에 온갖 욕을 다 내뱉으며 성질 부렸었다. 내 본 모습 그대로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불행히도 나는 그녀의 가시에 피가 나올 정도로 깊숙하게 찔리고 말았다.
처참하게도 난생 처음으로 여자한테 발로 짓밟혔던 것이다. 가시도 보통가시가 아니었다. 찔리면 반죽음이 되는 그런 가시였다.
“멍하니 뭐하느냐? 귀가 망가졌느냐?”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사이 그녀는 나에게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서 있고 그녀는 소파에 도도하게 앉아서 차를 더 내오길 바라고 있었다. 주객전도라는 건 이런 걸 말하겠지. 내가 역시나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으려니까.
“지금 그 태도는 무엇이냐?! 반항하겠다는 거냐?!”
그렇다. 이건 반항이었다. 그냥 차를 내주기가 싫었다. 남의 명령을 받는 것은 질색이다. 특히 이 여자의 명령만은 절대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차를 먹고 싶으면 네가 해서 먹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말했다.
“싫구나.”
“싫으면 마시지 마!”
“그것은 더욱 싫구나.”
“그럼 어쩌라는 거야!”
“캐슬린을 불러오너라.”
아, 리엘에게 차를 내주었던 게 캐슬린이었구나.
캐슬린은 시장에 갔다. 성실한 여자니까 평소처럼 필요한 물품만 사고서 돌아온다면 곧 돌아올 시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주기는 싫었다.
“캐슬린은 아까 시장에 갔어.”
“으음.. 그렇구나. 그럼 네가 하거라.”
“왜 또 얘기가 그 쪽으로 세냐? 정말로 먹고 싶으면 네가 끓이란 말야!”
“못 끓인다.”
“그럼 먹지마!”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얼굴을 찡그린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약간 무서워진 느낌이다. 위험하다. 약간이라도 잘못하면 금세 그녀의 가시가 튀어나올 것이다.
“인간주제에…. 날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목소리 톤도 살짝 변했다. 말 끝이 살짝 떨리었다. 그렇지만 이런 반응은 왠지 재미있었다. 잘못하면 또 다시 밟히겠지만 이번엔 그 때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파충류 따위가 감히 인간을 욕하냐!”
“파…파충류…. 라고 했느냐?”
리엘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다. 의외로 타격이 컸는지 입가를 씰룩씰룩 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파충류야.”
“미천한 인간 주제에….. 감히.”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난 여전히 일어서 있었고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신부의 대기실에 테이블 하나. 소파 뒤의 벽에는 실비아 여신의 초상화가 있다. 실비아는 1000년 전에 일어난 드래곤과 인간의 전쟁을 종결시킨 전쟁의 여신이다. 순백의 드레스에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여신은 햇살을 등진 채로 허공에 떠올라 등뒤의 커다란 날개로 몸을 감싼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너, 계속 일어서 있으면 힘들지 않느냐? 좀 앉거라.”
리엘은 자기 옆자리를 내주었다. 5인용 소파의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한 것이다.
“웬일이래? 평소엔 소파 옆에 앉지 못하게 하더니.”
의외의 선행에 속으로 기뻐하며 소파에 털썩하며 앉았다. 그녀의 바로 옆이다.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거냐? 후후, 하며 기뻐하는 나. 한심스럽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선행을 베푸는 줄만 알았으니까.
내가 자리를 편하게 앉은 것을 확인 한 뒤 리엘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앉은 채로 리엘을 생각 없이 바라봤을 때 문뜩 깨달았다.
그녀의 웃음이
무척 예쁘긴 한데.
주변에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씨익- 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 나쁜 미소..
그 얼굴 그대로.
소파를 잡고 내가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앞으로 넘어뜨렸다.
“우왓?!”
이대로 소파 밑에 깔려버리고 말았다. 마치 관에 들어간 시체처럼 말이다.
“뭐 하는 거야!”
“바보로구나. 내가 순순히 너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알았느냐?”
그 말을 끝으로 우호호호 하며 도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나는 소파를 뒤집어서 올라가려고 했지만 리엘이 누르기라도 하는 건지 소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충류 녀석아! 장난도 정도껏 치란 말야!”
이렇게 말하자 스윽 하고 내 몸통 위의 소파가 분리되었다. 마치 구원의 빛이라도 내려오는 듯 분리 된 부분에서 천장의 빛이 내리쬐었다. 눈 부신 순백의 빛이 내 가슴을 축복하듯 감쌌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으헉! 야 발로 쳐 넣지 마! 너 죽어?! 으악?!”
리엘이 그 틈새로 날 짓이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발인데도 무게가 실린 스톰프는 무척이나 아팠다.
나는 멈출 줄 모르는 발길질을 팔로 막아내다가 슬쩍 피해서 다리를 잡고 그대로 넘어뜨렸다. 의외의 상황에 놀란 건지 리엘은 ‘어?’ 하고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그 틈을 노려서 소파에서 빠져 나온 나는 리엘을 위에서 덮쳤다. 배 위로 올라 타 팔목을 붙잡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상한 짓을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냥 따끔하게 손을 봐줄 생각으로 이랬던 것이다. 하지만 리엘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변함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보니 오묘하게 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웃는… 건가?
난 그냥 이 정도로 끝냈어야 했다. 리엘의 웃음의 의미를 빨리 파악했어야 했다. 내가 꿀밤이라도 먹일 마음으로 손을 치켜 들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들어오고 말았다.
“어라라라라?”
왠지 기쁜 듯이 웃으며 캐슬린이 등장했다. 검은색의 차이나 드레스 같은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곱슬곱슬 풍성한 느낌의 머리. 웃는 게 어딘가 맹해보인다.
“제가 방해했나 봐요. 죄송해요.”
여전히 나릇하게 웃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깐, 왜 사과하는 거지? 뭘 방해했다는 거야?
이런 의문을 품었을 때, 두 번째 사람이 등장했다.
“역시 주인과 하인 관계란 이런 것이군.”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카논이었다. 귀공자처럼 길게 내린 머리카락. 오똑한 콧날과 차가운 느낌의 눈 때문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특유의 날카로운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상황은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는 머리 위로 ? 마크를 띄우는 나와 이긴 것처럼 웃는 리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여자와 그렇고 그런 것을 할… 것으로……..헉, 안 돼!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고 일어서려 했을 때, 이미 카논의 뒤에서는 이 교회의 크루세이더인 미노 가넨스가 지켜보고 있었다.
“랜더스…. 도란트리….!!”
별명, 강철주먹의 은여우. 이 도시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미노는 포니테일로 묶은 짧은 생머리를 살랑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미처 변명도 하기 전에
“짐승에게 말 할 권리는 없어!”
하며 날 요괴 퇴치하듯 두들겨 팼다.
이게 프롤로그의 끝이다.
본편부터는 시점을 변경해서,
주인공인 랜더스와 리엘이 만나게 된 삼일 전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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