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은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는 예르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광대뼈가 도드라진 갸름한 얼굴에 중년인데도 피부가 뽀얗고 깨끗한 것이 아무래도 어부의 아낙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 여자가 정말 경사라면···, 어디 책을 좀 볼까?’
까치발을 하고 고양이 걸음으로 예르카의 뒤로 돌아가 책장을 살펴보았다. ‘테세이아의 지리와 기후, 늪지 식물학, 독성 곤충도감, 역시 약재사인가. 응? 고대의 현자들? 만트라 파동이론···, 프리어라키-잊혀진 신성어? 이 책들은 도서관 목록에는 있지만 열람이 금지된 구역에 있는 책들인데?’
프리어라키라는 책을 꺼내 펼쳐보니 페이지마다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큰 글자에 발음과 설명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다..하..크. 주의 : ‘크’를 발음할 때 ‘으’가 꼬리를 물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여기 기호처럼 보이는 게 신의 언어인가? 음, 신성어는 발음도 중요하지만 울림도 아주 중요하구나.
다른 페이지에는 붉은색으로 밑줄과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보였다. ‘심상 : 기질이 다른 두 가지 이상 질료를 서로 화합하도록 신의 말을 빌려 설득하는 것이므로 진심으로 부탁하는 마음이되 스스로를 낮춰서는 안 된다. 흐음···, 인간의 언어는 단어로 마음을 표현하는데 신의 언어는 발음 자체에 마음을 담는가 보구나.’
넬은 책상에 펼쳐진 책과 필체를 비교했다. ‘역시 둘 다 같은 필체야. 이 여자 라이트 헤이븐 출신이 틀림없어.’ 넬은 라이트 헤이븐에서 지낸 10년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모인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은 자신이 공부할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직접 필사해서 소유할 수 있었는데 모든 책들은 각 단계별로 구분되어 자신의 단계보다 높은 단계의 책은 열람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학문이 쌓이면 자신만의 연구를 통해 책을 저술하고 위원회에서 책의 내용이 저자보다 윗단계의 수준이라고 판정을 받아야만 다음 단계로 승급을 할 수 있었다. 라이트 헤이븐은 그렇게 공부한 프리셉터들을 아무 대가 없이 각지의 영주와 명문가의 고문으로 보내는 대신 외부의 어떤 무력이나 지배로부터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엘그로브가 토벌당한 이후 넬이 유모와 함께 신분을 숨기고 이곳으로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카스노아에 대한 복수와 왕국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 닥치는 대로 공부해서 경사가 될 때까지 직접 써서 모은 책이 이런 크기의 방 두 개를 가득 채웠었다. ‘그때는 정말 미쳐서 공부했었지. 하지만 뭘 공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낙담했던지···. ‘
- 유모, 이제 알았어, 아무리 공부해도 난 엘그로브를 되찾을 수 없어, 엄마아빠의 복수도 할 수 없다고! -
“왜 그러세요, 아가씨,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아요, 힘드셔도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 아니야! 다 소용없다고! 전술, 외교, 정치, 뭐든 엘그로브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싶은 건 죄다 공부했어.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런 것들은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 고작 집안일이나 보는 프리셉터에게 그런 힘이 어디 있어! -
“고작 집안일이라니요. 여기서 아가씨 나이에 경사가 된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요. 대사가 되셔서 힘과 야심있는 영주의 고문이 되시면 공부하신 것들이 반드시 빛을 발할 거에요.”
- 그런 영주들은 벙어리 프리셉터는 거들떠도 안볼거래. 그리고 고문이 되면 뭐하냐고! 어차피 결정은 영주가 하잖아. 겨우 꼬득여서 엘그로브를 공격하게 만들어봐야 결국은 영주의 차지만 될 뿐이잖아! -
“그럼 더 높은 종사가 되셔야죠. 아가씨가 말을 못하셔도 누구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거예요. 아니면 가장 높은 대종사가 되세요! 세계 곳곳에 있는 프리셉터들이 보내는 정보가 아가씨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들을 이용하면 여러 영주들을 아가씨 뜻대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 정말? 정말 대종사가 되면 그렇게 될까? -
“그럼요,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높은 분들만 다루는 숨겨진 지식이 있다고 들었어요.”
- 그게 뭔데? -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마법이라는 천사들의 힘에 대한 거라고 하더군요. 아가씨가 그 힘을 손에 넣으면 직접 전하의 복수도 하고 엘그로브도 되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시고 좀 더 힘을 내세요.”
- 마법...? 천사들의 힘? -
‘그때 유모가 숨겨진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다시 공부를 시작하지 못했을 거야. 다니엘 그 개자식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종사가 되서 금지구역의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이 여자는 경사인데도 어떻게 이 책들을 갖고 있는 거지?’
“책도 좋아하나 봐?”
예르카의 말에 화들짝 놀라 책을 놓친 넬은 재빨리 손을 허우적거려 책을 잡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음, 책을 아주 소중히 여기네? 일어나,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예르카는 넬을 데리고 주방으로 가서 삶은 감자와 생선구이를 내주었다. 넬은 음식 냄새를 맡자 잠시 잊고 있던 허기가 확 밀려왔다. 생선을 두 손으로 잡고 게걸스럽게 뜯고 삶은 감자도 크게 베어 물었다. 단출한 음식인데도 혀에 닿는 족족 전해지는 감칠맛에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라이트 헤이븐에서 자주 해먹었던 것과 같은 레시피야.’
순식간에 식사를 뚝딱 해치운 넬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곧바로 설거지까지 끝냈다. 예르카는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넬은 습관처럼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김을 타고 올라오는 차 향기를 맡았다. 라벤더 향에 캐머마일과 민트가 섞인 것이 이 시간대와 잘 맞아떨어졌다.
‘식후에 차를 마시는 게 얼마 만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을 생각뿐이었는데 애런이 아니었다면 이미 들짐승이나 물고기 밥이 되었겠지. 사람 일은 정말 한 뼘 앞을 모르는 거로구나. 부디 살아있길 바라.’
예르카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고는 가슴께에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 너 방금 먹은 거 만들 줄 아니? -
- 아니요. 처음 먹는 거예요. -
예르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 거짓말. -
‘응? ···, 앗!’ 넬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모양을 지어가며 수어로 대답한 것을 깨달았다.
“후훗, 혹시나 했는데 정말 라이트 헤이븐에 있었구나. 노예가 글을 아는 건 드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깨지는 꽃병처럼 대하는 건 딱 한 부류의 사람들만 하는 짓이지. 그곳에서 책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
‘이런, 갑자기 수어로 묻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어. 여우 같은 아줌마 같으니. 더 조심해야겠어.’ 넬은 자세를 고쳐 앉고 손가락으로 몇 가지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 차를 물으시는 줄 알았어요. 첫 번째 주인 가문의 따님이 라이트 헤이븐에서 공부하실 때 수발을 들었는데 생선 감자는 주인님이 보여주신 요리책에 있는 것을 익혔고 수어는 주인님께 배웠어요. -
“호오, 이제 말문이 트였나? 하긴 글보다는 수어가 편하긴 하지. 네 주인이 보여준 요리책은 산체스 화이트라는 대학사가 쓴 건데 학도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은 책이야. 골목식당 주인들까지 그 책을 손에 넣으려고 서로 웃돈을 올려 부르곤 했지. 내가 좋아하는 요리책이기도 하고. 넌 착한 주인을 만난 덕에 아주 값진 걸 배웠구나.”
‘내가 있을 때 학도들에게는 고든 앰비가 쓴 요리책이 더 인기였어. 학사만 되어도 볼 수 있었거든.’ 넬은 바삐 손을 놀려 대답했다.
- 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라이트 헤이븐 밖에서 수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곳에 계셨던 분들뿐이에요. -
“그래? 이렇게 좋은 대화 수단이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어? 하긴 프리셉터들이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예르카가 혀를 끌끌 차고 차를 홀짝 마셨다. 넬이 손을 놀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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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엘더사가 -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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