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유성의 7일 7화 직감
도박장 왼편에는 슬롯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따금씩 큰소리가 들려오긴 하는데 별로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반대로 오른편에는 룰렛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여기는 여럿이서 게임판을 보고 있으니 떠들썩함이 몇 배는 더 되는 것 같다. 조용한 등화도시에서 살다보니 이런 곳은 익숙지 않다.
“여기가 그 도박장? 안은 생각보다 깔끔하네요.”
“아저씨들만 있다면 모를까 남녀노소 중 남녀노 가 다 즐기는 곳이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도박장에는 젊은 아가씨부터 노년의 신사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모여 있어도 하나같이 시선은 눈앞의 게임기에만 쏟고 있었지만.
치아나는 도박장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향기씨의 아버지께선 어디 계신 걸까요?”
“거의 매일, 하루 종일 이 도박장에 계신다 했으니까 찾아보면 금방... 아! 저기 저 분 아니에요?”
치아나가 가리킨 곳에는 고개를 박다시피 룰렛판을 쳐다보는 아저씨가 있었다. 향기에게 들은 생김새가 얼핏 보였다.
“으음, 그런 것 같네요. 이제 가서 건네주기만 하면 되나?”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향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콜록, 콜록.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향기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 한다.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마을에서 마을로 가는 것은 무리라고.
그러던 중, 잿빛도시에 살던 향기는 부모님과 함께 공기 좋은 시골 마을인 보라시티로 이사 오게 되었다.
요양 목적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씨보라가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씨보라?”
“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108번 수로에 있었던 시설이요. 제법 뉴스가 되었다고 해요 전 그때 너무 어렸어서 잘 모르지만요.”
어제도, 바로 방금 전에도 이야기한 내용이 향기의 입에서 나올 땐 제법 놀랐다.
향기의 아버지는 씨보라의 공작반에서 일하고 계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난파선 사건 때문에 씨보라는 폐쇄되었고, 준비하던 프로젝트까지 실패하면서 하은씨네 아버지는 실직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결국 향기의 아버지는 잿빛도시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가족들과 함께 땅값이 싼 보라시티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보라시티에는 호연지방 유일의 도박 시설이 있다.
어떤 일인지는 짐작이 갔다.
“도박 중독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씨보라가 사라진 뒤 바로 도박장에 다니신 건 아니에요. 이거저거 일을 조금씩 하고는 계셨어요.
하지만 요 근래부터 도박장에 드나드는 횟수가 잦아지시더니 점점 집에 돌아오시지 않아서.”
향기는 조용하면서 나직하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기까지 오실 때 잿빛도시를 거쳐 오셨죠? 거기에 해양 조선소가 있는데, 그곳의 소장님이신 해양님도 원래는 대보라 직원이셨거든요. 보라시티의 체육관 관장이신 암페어님도 대보라의 임원이셨고.
두 분 다 아빠와 친분이 있으셨는데, 이번에 재취업을 도와주신다고 연락이 와서요. 그런데 정작 아빠는 도박장에만 계시고 저는 갈 수가 없어서.”
그러더니 향기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도박장의 아빠에게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전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편지를 전해 주기만 하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자식을 그냥 두고 보기 힘든 것도 있었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인데. 아빠가 돌아오면, 같이 파티를 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저런 말을 듣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집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도박 중독인 사람이 편지 한 장으로 돌아온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저기, 혹시 향기씨의 아버님 되시나요?”
“으응? 내 딸아이 이름이 향기인데. 누구신지?”
다행히 맞게 찾아온 것 같다.
“따님의 부탁을 받고 이 편지를 전해드리려 왔어요. 읽어 주시겠어요?”
“....... 미안하네.”
딸 이야기를 들은 아저씨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난 그 아이를 볼 낯이 없어. 여기까지 와줬는데 미안하지만 편지는 도로 들고 가주시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애써 시선을 피한 곳은 결국 룰렛판이었다. 이럴 거라 짐작은 했지만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 때 치아나가 갑자기 말했다.
“무슨 할 일이 있으신데요?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인가요? 혹시 이 룰렛?”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도박하는 걸 돕겠다니.
당황한 건 아저씨 쪽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잠깐을 고민하더니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있는 경품 중에 아차모 인형이 있지? 딸아이가 아차모를 좋아하거든. 하지만 저게 무려 1000코인이나 하지 뭐냐.
대박이 터지면 딸 수 있다, 저것만 따면 집에 돌아가자 하고 생각해서 계속 도전했지만 돈이 다 떨어져서, 다시 돈을 따기 위해 도박을 하고 다시 잃고... 생일 날 선물해 주려했는데,이러다 보니 벌써 생일날이 되어버렸어. 이렇게 말하니 한심하긴 하구나. 아버지란 인간이 이러고 있다니.”
아픈 딸을 위해 한다는 게 겨우 도박이라니.
속에서 심한 말이 올라오려는 걸 겨우 참아내었다. 괜히 더 상황만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원래 의도는 딸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건데, 그 방법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될까.
조심스레 말을 고르고 있던 와중, 치아나가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아차모 인형을 따기 위해 코인을 모으면 되는 거죠? 코인을 모으려면 도박에서 이기면 되는 거고?”
“그게... 맞긴 한데...”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 룰렛, 보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겠던데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저, 이런 거 잘하거든요! 흐음, 그러니까.”
치아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마에 손가락을 댔다.
“이번에는 여기, 빨간 마자 쪽에 걸어보세요.”
“한 칸에? 어어, 그래. 뭐 어차피 몇 개 남지도 않았으니.”
룰렛은 돌아가고 그 위로 구슬이 던져졌다. 달그락 소리를 내다가 룰렛이 멈추자 구슬은 마자가 그려진 빨간색 칸 위에 멈춰 있었다.
“대, 대단하구나! 한 칸으로 맞히면 배율이 무려 12배야! 하지만 아직 1000개에는 한참 모자라. 거는 양도 한계가 있으니까, 12배율이라도 1000개를 모으기는.......”
“그러면 몇 번 더 하면 되죠. 다음에는 여기!”
그 뒤에 일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치아나가 12칸 중 하나를 찍으면, 구슬은 거짓말처럼 치아나가 말한 곳에 쏙쏙 들어갔다.
그렇게 얻은 구슬을 전부 걸어 다시 12배를 벌었다. 구슬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자, 이제 1000개가 넘었죠? 아차모 인형을 받으러 가요! 그리고 여기, 편지도 읽어 주세요.”
아저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경품 교환소에 갔다. 주위 사람들도 지금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차모 인형을 든 채로 아저씨는 편지지를 꺼냄과 동시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운 눈으로 편지지를 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편지지는, 예전에 씨보라에서 일했을 때 딸이 좋아하던 항구메일이야. 잿빛도시에서만 파는 거지. 물결무늬가 예쁘다고 했었지.”
이후, 편지를 읽어가는 아저씨의 눈에는 금방 눈물이 맺혔다.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딸의 진심이 담긴 편지였을 것이다.
마음속으론 그렇게 울 거면 진즉에 돌아갔어야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 일에서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다.
“이젠 변명도 할 수 없겠구나. 딸에겐 정말 미안한 것뿐이야. 암페어씨와 해양 녀석이 그렇게까지 해준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딸에게도 당당해 져야 하고.”
“그 말씀, 따님 앞에서 제대로 해 주세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그렇구나. 그래도 자네들에게도 감사인사를 하고 싶어. 정말 고맙네.”
향기의 집에 들어서자 향기는 우리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와 같이 들어온 그녀의 아버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녀왔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버지가 너에게 너무 심한 짓을 했구나. 힘든 건 나뿐이 아닌데도 말이다. 내일부터라도 잿빛도시에 가서 해양과 만나봐야겠다. 더 이상 도박장에는 가지 않으마.”
향기의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코인케이스를 꺼내 탁자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이건, 그, 선물이다.”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아차모 인형을 꺼냈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딸.”
***
두 사람의 감사인사를 듣고 마을의 광장으로 나왔다.
“이걸로 얼추 해결했네요. 도박이란 것도 재미있었고. 후후.”
가족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나름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대체 뭐였죠?”
“뭐라뇨? 그냥 곤란한 사람을 도운 건데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정말 모르는 건지 능청스러운 건지.
“방법을 물은 겁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직감이 좋다고 넘길 건 아니죠? 룰렛을 그렇게 맞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요.”
룰렛에서 12칸 중 하나를 맞히는 일까지는 놀랍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일이 네 번 연속으로 일어난다면 말이 다르다.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만분의 1도 안 된다.
“후후, 거의 불가능한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평소 같은 가벼운 웃음이 아니다. 신성하다고까지 느껴지는 표정, 예전에 자신을 유성의 민족이라고 이야기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다.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한 건지. 한번 상상해 보시겠어요?”
“상상요?”
또다. 상상이라니. 자꾸 그런 말을 한들.
“만분의 일도 안 되는 일을 한 번에 해내는 가능성 같은 건, 잘 모르겠는데요.”
“후후, 상상력이 부족하시네요. 관장님.”
치아나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해 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곤란해요. 아마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실 테니.”
치아나는 111번 도로로 몸을 돌렸다.
“폭포에 가면, 그래, 폭포에 가면 전부 알려 드릴게요. 서두르죠.”
아직 나는 치아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알고 있는 거라곤 이름이랑 유성의 민족의 당주라는 것 정도 뿐. 폭포에 가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걸까.
설마, 세계가 위험하다는 것도.......
“뭐하세요? 멍하니. 빨리 폭포로 가야죠.”
“자, 잠깐 기다려요. 저 아직 볼 일이 있다고요.”
“볼 일?”
치아나가 뒷짐을 진 채로 상반신만 살짝 돌려봤다.
“무슨 볼 일인데요?”
“여기 올 때 말했잖아요. 암페어씨를 뵙고 간다고. 잠깐이면 되니까. 아니면 같이 가-”
순간 치아나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둘러야 한다는 건 진짜였나.
“는 건 좀 그러네요. 서둘러야 하니까 그냥 갈까요?”
“아뇨. 그냥 갔다 오세요. 저는 주변을 좀 둘러보고 있을 테니.”
치아나씨는 다시 생긋 웃었다.
“빨리 갔다 오셔야 해요.”
치아나씨의 표정이 굳은 건, 그저 여정에 차질이 생겨서 라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p.s. RSE의 보라시티에는 도박장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게임을 위해 필요한 코인케이스는 마을 가장 남쪽 집(프렌들리 숍 왼쪽 집)의 여성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여성은 잿빛마을에서만 파는 항구메일을 사고 싶은데 자신은 갈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 메일을 가져다 주면 감사의 표시로 코인케이스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