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 날뛰어야 할 놈의 의식은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 그 덕에 녀석은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내가 녀석의 의식에 간섭할 수도 없는 거 같아, 이상한 일이지 녀석의 능력 같지는 않은 데 대체 뭘까, 다른 이방인의 힘인 걸까.”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가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르실은 가온의 표정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여하튼 하운드가 그냥 미쳐 날뛰는 거라면 어느 정도 조종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놈의 의식을 보호하는 무언가 때문에 조종은 힘들어, 미안 가온, 모처럼 너의 부탁을 들어주려했는데, 힘들게 되었네.”
“…….”
“가온?”
못 한다고 말했으니 실망하거나 아쉬워하는 가온의 대답이 들려와야 했다.
아르실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온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가온은 계속 그 자리에 선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어, 저 군대를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놈의 의식을 유지하는 것도 그거였던 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가온의 말에 아르실은 화들짝 놀라며 냉큼 물었다.
“뭐야 가온 너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거야?”
아르실이 갸우뚱하며 물어보자 가온은 대답대신 하운드의 군세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튼 성을 에워싼 거대하고 기다란 하운드의 군세.
아르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 군세의 크기와 규모만 보이지만, 가온은 달랐다.
남들이 보지 못한 군세의 구석에 놓인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큰 어느 한 막사.
하운드가 머물고 있는 막사를 노려보며 차갑고도 굳어버린 낯빛으로 가온은 담담히 말했다.
“하운드는 내일 죽을 거야, 내 손에 말이야.”
수많은 군대를 박살내고 이방인들까지 이겨버린 무적과도 같은 이방인 하운드.
그런 하운드를 죽일 거라 가온은 장담했다.
자신감인지 아니면 그저 주제모르는 어리석음의 극치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스산하게 읊는 가온의 말에 아르실은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곤 다급히 말했다.
“내가 방금 말한 거 못 들었어? 하운드를 조종하는 건 무리라고.”
“하운드의 의식을 제어하는 물건만 없애면 조종 가능한 거지?”
“그, 그렇지, 쉽진 않겠지만, 가능할 거야, 근데 진짜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거야?”
“대충은.”
고개를 끄덕이는 가온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 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또 다시 눈을 감은 채 가온은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계획대로만 간다면 가능해, 하운드를 잡는 일이.’
필요한 인물들은 거의 다 모였고 적에 대한 단서와 정보 또한 충분했다.
‘아니 조금 부족해, 한 명, 한 명 정도의 쓸 만한 인물이 더 있다면…….’
하운드와 싸우고 직접 대화까지 나누면서 가온은 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어냈다.
적의 정보는 물론 약점까지 알아냈고 그를 바탕으로 한 계획까지 짜냈다.
‘적은 하운드 혼자만이 아니야, 정예 병력은 물론 강력한 기사 셋이나 있어.’
이들을 모두 감당하면서 하운드를 잡으려면 사람이 하나 더 필요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하밀부르크와 고드프리 정도의 강자가 말이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인물을 구한단 말인가.
이곳 하룬가 본가의 대부분의 정예 병력과 이방인들은 죽었고 말튼 성의 병력 또한 태반이 죽은데다 장군 급의 기사인 칼 리보렌은 적의 편이 되었다.
‘장군 급의 기사나 강자만 있다면……’
머리를 짜내던 가온의 귓가에 돌연 사방을 뒤흔드는 남성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끄, 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신음소리는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운드, 하밀부르크 그리고 고드프리가 뿜어냈던 기와 비슷한 힘이 담긴 비명이었다.
앞의 세 명보다는 그 힘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이만한 기를 자연스레 뿜어내는 인물은 흔하지 않았다.
그 비명에 지나가던 시녀들과 시종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군.”
“하룬가 놈의 장군이었던가? 징 하게도 살아있네, 하룬가의 모든 의원들이 달라붙어서 겨우 살아있는 건가?”
“일손 하나하나가 중요한데 저 놈 하나 살리겠다고 다 붙었다니, 재수 없는 하룬가 놈들, 퉤엣.”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도움도 안 될 놈들이야,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주위 사람들의 잡담을 듣던 가온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마지막 남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기쁨의 미소였다.
‘찾았다.’
가온은 고개를 급히 들어 아르실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못 본 사이에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닌 건지 그녀는 간호 복 차림이었다.
이러면 더 잘된 셈이었다.
가온은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껏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닌 거야? 아르실 네가 약초 학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알지만,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만한 약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약초는 그냥 보여주기고 내 능력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킨 것뿐이야.”
“역시 그거였구나, 그럼 더 잘됐어, 일단 따라와 봐.”
“으읏, 갑자기 손을 잡다니 부끄럽게 시리.”
아리송해하는 아르실의 손을 과감하게 잡으며 가온이 간 곳은 적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은 하룬가의 장군 오툰이 있는 치료막사였다.
내성에 배치된 훈련장, 그곳에서 정비 중인 말튼 성의 잔존 병력들은 다가올 가망 없는 싸움에 두려워하고 절망했다.
이쪽의 수는 천 명 남짓에 대부분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약졸인 반면 성을 에워싼 적들은 수천 명은 전멸시킨 괴물 같은 이방인의 군대였다.
아무리 기운을 차리려 해도 엄습해오는 싸움의 압박감과 무력감에 병사들은 하나 둘씩 고개를 숙인 채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병사들 앞에 때마침 나타난 영주 샤로텐과 고드프리경.
두 희망의 출현에 병사들은 걱정도 잠시 오와 열을 맞추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무리해서 일어설 필요 없네, 편히 앉게.”
“그, 그래도.”
“상황이 이런데 무슨 격식을 차리겠나, 으챠, 내가 먼저 앉겠네.”
당황하는 병사를 보던 샤로텐은 피식 웃곤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고귀한 영주가 자신들이 앉을 흙바닥에 주저앉다니.
영주의 로브가 흙먼지에 더렵혀지자 병사가 만류했다.
“여, 영주님! 거기는 더러운 흙바닥입니다! 저희가 의자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자네들이 피와 땀을 흘려간 이 훈련장의 흙이 더러우면 그만큼 자네들이 훈련을 고되게 했다는 뜻이지, 고드프리경도 앉으시죠.”
“끌끌, 전 싫습니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 가시죠 영주님.”
“그러죠.”
병사들은 고드프리와 영주의 대화에 숨을 죽인 채 집중했다.
아무 이유 없이 두 사람이 나타날 리가 없다.
분명 뭔가 계획이 있는 게 확실했다.
병사들의 예측대로 이어지는 샤로텐의 말은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예측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희망적인 내용이어야 할 계획의 내용은 전략과 전술을 떠난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은 즉각 반발했다.
“말도 안 됩니다, 영주님 그런 명령은…….”
“성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세르갈, 그대의 목숨은 물론 그대의 동료와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야.”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건 정말…….”
“나를 믿어주게, 말틴.”
해괴망측한 계획을 설명하는 영주의 말에 병사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아무리 영주님이라도 이 계획은 정말…….”
“이게 적들을 물리칠 계획이라고?”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거 아니야?”
“서, 설마 우릴 미끼삼아 도망을…….”
술렁거리던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줄곧 가만히 있던 고드프리가 입을 열었다.
“주목!”
“……!”
고드프리의 말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고드프리는 말튼 성의 인물이 아닌 트라야비아가의 인물, 그러나 요 며칠 간 고드프리에게 거친 훈련을 받았던 병사들의 몸은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게끔 길들어져 있었다.
고드프리는 즉각 반응하는 병사들을 보며 짧게 일갈했다.
“무능한 놈들.”
“…….”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는 게 너희들의 일 아니더냐? 영주는 성벽 위에서 목숨을 걸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탈영해라, 내 직접 목을 베어 줄 테니.”
빈말이 아닌지 고드프리의 칼집에서 빠져나온 날카로운 검이 병사들을 향했다.
병사들은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칼이 무서운 것만은 아니리라.
자신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주기 위해 성벽 위에서 목숨을 걸고 돌아다녔던 영주였다.
그런 영주를 의심했다니,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침묵 속에서 한 병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