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 지하의 공주.
“나는 그 날, 지하의 공주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했다.”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졌고 숨 막히는 흙냄새와 악취,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불길한 땅울림도 이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잭, 콜슨, 빌리! 오늘은 자네들이 ‘처리’ 담당이야. 어디로 가는지 알지?”
옛 이야기에 나오는 현자처럼 온 얼굴에 구름 같은 수염이 무성한 노인이 말했다.
“제기랄, 전 엊그제 갔다 왔다고요. 시몬 아저씨, 저는 좀 빼주면 안 될까요?”
잭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알다시피 이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저쪽에서 정하는 거지.”
“그래도...”
“‘그래도’는 없어, 이 친구야. 얼른 움직여. 빅터, 체르조, 딕, 에이헴. 너희는 쓰레기
담당이다. 갔다 오면 별식이라도 좀 달라고 부탁해볼게. 오늘만 수고해라.”
“내일은 근무 빼주실 거죠?”
“말해볼게,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리고 나머진 나를 따라 버섯 농장으로 간다.
옷 입고 물통에 물 채워. 나중에 달라고 하지 말고...너 말하는 거다, 고든.”
시몬이 머리와 수염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울퉁불퉁하고 축축한 통로를 통해 버섯 농장으로 향했다.
깊은 지하지만 무슨 원리인지, 벽과 바닥에 박혀있는 파란색 돌멩이(우리는 그냥
반짝이, 또는 돌멩이라고 불렀다.)에서 은은한 불빛이 나와 주변을 간신히 볼 정도는
됐다. 횃불은 쓸 수 없어 이런 미약한 불빛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곧 바닥에 박힌
돌멩이나 나무뿌리를 밟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한 30분 정도 걸어가니 버섯 농장이 나왔다, 그곳은 다른 그 어떤 장소보다도 넓고
천장이 높았다. 흙바닥에는 정체 모를 버섯이 우글우글 모여 꼭 무슨 벌레 떼가
뭉쳐있는 것 같았다. 근처에 가면 향긋한 버섯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둠 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며 버섯을 캐는 ‘그것들’이 우리를
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대부분 3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에 집중했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루함, 나태함, 피곤함...그런 감정들이
공기 중에 퍼져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자 5Kg씩, 예외는 없다. 시작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이고 버섯을 따서 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이 버섯들은 무미건조한- 식감도 질퍽했다. - 맛이 나는 식용 버섯으로 이곳 주민들의
식량이자 우리의 목숨이기도 했다. 버섯 농사가 망하면 제일 먼저 우리가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한다고 시몬이 설명했다.
맛은 기가 막히게 맛없지만, 이게 없다면 우린 진작 굶어죽어 저 한 줌의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굽거나 끓이면 더 나을 것 같지만 여기선 불을 쓸 수 없다.
한참을 땀 흘려 일하다가, 할당량만큼 버섯을 캐면 시몬에게 검사받고 잠시 쉬었다가
모두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캐낸 버섯은 시몬이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우리는 버섯과 이끼(신기하게도 돼지고기랑 맛이 비슷했는데,
정말 슬프게도 하루에 한 주먹만큼만 주어졌다. 예외는 없었다.)로 배를 채우고
우물에서 퍼 올린 신선한 물을 마시며 몸을 깨끗이 닦아냈다.
흙구덩이 속에서 사니 몸이 깨끗할 날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씻었다.
식사와 샤워가 끝나면 잠시 남은 시간동안 옹기종기 모여 간단한 게임을 하거나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달구었다. 그러다가 보초가 오면 자리를 정리하고
흙과 돌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게 우리의 하루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원래 행상인이었다, 나를 포함한 행상인 20명은 각자 도시에서 팔 물건을
가지고 느릿느릿 나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런 꼴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느 날 밤, 평소처럼 불침번을 세우고 잠을 청하던 중 기이한 소리에 눈을 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와 창과 검을 겨누고 우리를 제압했다.
도적,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밤에 나타나 창을 겨누는 사람이라면 도적 말곤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금세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상반신의 여자였지만, 하반신은 그을린 잿더미 같은 색을 띈 통통하고 매끈한 개미의
몸통을 가진 괴물이 밤의 암흑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언트 앤트- 드물게 숲이나 산에서 나타나는 개미를 닮을 괴물들.
우리는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제압당했고, 곧 노예가 되었다.
그들의 본거지, 지하 깊은 곳의 땅굴로 들어와 살기를 한 달 째.
탈출하고 싶어도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에, 어두컴컴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길목마다 창과 방패를 든 자이언트 앤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즉, 탈출하고 싶어도 땅이 무너지지 않는 한(물론 진짜 무너지면 다 죽겠지만.) 내가 여길
빠져나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낮은 게 아니라,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그걸 깨달은 동료들은 모두 납득...아니, 체념했다.
그야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정돈 겪지 않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포기하면 영영 이곳에 갇혀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 게 뻔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본심을 숨긴 채, 지난 한 달을 살아남았다.
그러나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시간은 쌀쌀맞은 아가씨처럼 내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이봐, 린트...자네, 무슨 짓을 했나?”
그 날도 평범한 날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덜덜 떠는 시몬을 만난 뒤, 생각을 바꿨다.
“무슨 짓이라뇨?”
“여왕이 자네를 호출했어, 그것도 직접. 저기 보초들 보이지?”
날 선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는 두 마리의 자이언트 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나도 몰라,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 그냥 데려오래.”
“젠장.”
여왕은 이 땅굴의 지배자이며, 이 괴물들의 왕이다.
노예인 내가 마주칠 일이 절대로 없는 그런 존재다.
“알겠어요, 저기 시몬? 혹시 제가 안 돌아오면 애들한테 잘 설명해주세요.”
“오냐.”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보초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말없이 내 양쪽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말해도 보초들은 내 말을 무시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더 깊은 지하- 여왕의 방은 가장 아래에 있다. -까지 끌려오니
보초들이 나를 놔주고 어느 방으로 밀어 넣었다.
버섯 농장도 넓었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았다. 주위에는 여왕이 낳은 사람 몸통만한,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흐르는 하얀색 알이 그득했고 그걸 육아 방까지 들고 옮기는
일꾼들이 보였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병정개미들도 우글거렸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에게서 관심을 돌려, 방 가장 으슥한 곳에 있는 여왕을 보았다.
다른 자이언트 앤트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나는 보자마자 그것이 여왕이라는 걸
알아챘다. 다른 게 아니라, 그것에겐 알 수 없는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둥글고 쌓은 흙더미 가운데에 누워, 커다랗게 부푼 배를 손으로 감싼 채 매서운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는 그 괴물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꿇어라.’
개미의 페로몬에 익숙해진 나였지만, 그토록 강력한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페로몬은 일종의 언어이며 감정이고, 동시에 글이다.
페로몬을 느끼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왕에게선..기이하게도 묘한 상냥함과 다정함이 느껴졌다.
‘...좋은 냄새로군.’
여왕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라.’
그게 전부였다, 여왕은 고작 5분 만에 나를 돌려보냈다.
나를 왜 불렀던 건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나로선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건 한참 지난, 땅굴에 온 지 3달째가 되던 날이었다...
“또 내가 처리 담당이야? 시몬, 진짜 봐줘요. 저것들 상대하는 게 어떤지 알잖아요.”
“저번에도 말했듯이, 내가 정하는 게 아냐. 그래, 저런 괴물들이랑 떡을 쳐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알아. 그렇지만 우린 노예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왜 빌어먹을 알도 못 낳은 것들이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잭이 흙더미를 발로 차며 말했다.
“물론 일개미나 병정개미는 알을 못 낳지. 근데 욕구는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평소에 쌓인 성욕을 우리한테 푸는 거지...이번에도 별식 챙겨줄 테니까 후딱 갔다 와.”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잭을 비롯해 호명된 몇 명이 보초를 따라 처리 방으로 갔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버섯 농장으로 가거나, 애벌레와 알을 돌보러 육아 방으로
갔다. 그도 아닌 사람들은 땅을 파거나 쓰레기 처리장으로 가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남은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나만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저는요?”
“그게, 이런 말 하기 정말로 미안하지만...넌 이제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어.”
“네!? 잠깐만요, 저 죽는 거예요? 저 병도 안 걸렸고, 아직 멀쩡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이런 빌어먹을 구덩이에서 죽긴 싫다고요! 제발, 시몬! 저 개새끼들한테-”
“그게 아냐, 자넨 죽지 않아. 대신 자네는...공주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될 거야.”
공주? 그게 무슨 말일까, 내가 묻기도 전에 시몬이 대답했다.
“이곳의 개미들은 크게 여왕, 병정, 일꾼으로 나눠져 있어. 알을 낳을 수 있는 건
여왕뿐이지. 공주는 그 여왕이 될 개미를 말하는 거야. 듣자하니 공주개미는 딱
한 마리뿐이고 이 땅굴에서 가장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어. 어쩌면 여왕보다도 더.
너는 그 공주의...음, 좋게 말하자면 왕자님으로 발탁된 거지.”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왕자라고요? 아니, 제가 대체 왜-”
“저번에 여왕이 불렀던 거, 기억나나? 그건 일종의 ‘면접’이었던 모양이야.
저것들이 우리를 관찰하다가 자네를 고른 거지. 린트, 나는...할 수 있는 게 없어.
조언 하나만 해주자면, 절대 공주를 해치지 마. 그랬다간 자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벌을 받게 될 테니까.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네.”
“잠-”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보초들이 나를 붙잡은 후 억지로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 시몬이 살아남으라고 목청껏 외친 소리가 메아리쳤지만, 내 머리 속엔
오로지 이제 탈출하긴 글렀구나. 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둠이 짙어졌고, 나는 곧 발자국 소리 말곤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들어가라.’
보초가 나를 밀어낸 다음,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다른 방보다 벽이며 바닥에 빛나는 돌멩이가 많이 박혀, 꼭 별로 가득한 우주의 텅 빈
공간으로 들어간 게 아닌지 착각됐다. 흙냄새도 다른 곳보다 약했다.
방은 꽤 넓었고, 습기 없이 건조하고 상쾌했다. 지상과 가까운 걸지도 몰랐다.
‘누구시죠?’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기심,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방의 가장 깊숙한 곳을 보았다.
까마귀의 깃털 같은 긴 머리카락에 타원형에 가까운 둥근 눈이 깜빡거렸다.
햇볕에 그을린 적 없는, 유리 접시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에 군살 없이 말끔한
몸매를 지닌- 솔직히 말해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개미가 그곳에 있었다.
하반신은 다른 개미들처럼 검고, 광택이 나며, 둥글고 통통했다.
그것은 호기심과 불안함의 페로몬을 뿜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아, 당신이 제 신랑이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공주는 내게 다가와 미소를 보여주었다, 다른 개미들에게선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대부분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이것은- 방금 퍼 올린 우물의 물처럼 순수하고, 막 태어난 병아리처럼
무지하며 호기심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는 아이 같았다.
‘저는 이곳의 공주에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것이 머리를 불쑥 내밀고 더듬이로 내 몸과 얼굴을 훑었다.
내 머리에 들리는 목소리는 막 따낸 열매처럼 달콤하고, 촉촉했다.
“린트...”
‘린트? 그게 당신의 이름인가요? 인간은 제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죠? 부럽네요.
저희에겐 이름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저 공주, 일꾼, 여왕으로 불릴 뿐.’
공주가 방긋 웃으며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너는...내가 무섭지 않아?”
내 질문에 다른 페로몬이 느껴졌다.
의아함과 당혹감이었다.
‘왜 제가 당신을 무서워해야 하죠? 당신은 절 해칠 건가요?’
시몬이 내게 말해주었던, 공주를 해치면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룰 거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아니.”
‘그럼 괜찮아요, 당신은 여왕님이 고른 인간이니 틀림없이 좋은 인간일 거예요.’
확신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당신은 오늘부터, 결혼식 날까지 저와 함께 지낼 거예요. 결혼식이 시작되면
저희는 여길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 왕국을 만들어야 해요. 멋지지 않나요?’
이번엔 기대와 흥분, 기쁨이 느껴졌다.
잠깐만, 밖으로 나간다고? 그건 즉- 내가 여길 탈출할 수 있단 뜻 아닌가?
내가 개미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내 계획은 진즉 들켰을 것이다.
“그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데?”
‘당신은 저와 함께,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살 거예요. 진짜 개미들과 달리
저희는 한 번에 한 명만 낳을 수 있어서, 신랑이 없으면 번식할 수 없어요.
물론 당신에게 정치적인 권력은 없겠지만...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돌봐드릴게요.’
공주는 들뜬 얼굴로 나를 꼬옥 껴안으며 머리를 비볐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를 이용해야만 여길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결혼식까지 공주를 보살피며 살아남는다.
그것이 내 다음 목표였다.
‘린트, 인간은 어떤 생물인가요?’
공주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질문을 했다.
대개는 바깥이 어떤 곳인지, 인간은 뭘 좋아하는지, 인간이나 개미 말고 또 다른
생물은 뭐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공주의 호감을 사야 했으므로(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당할 테니까.)
최대한 그녀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대답했다.
“어떤 생물이냐고? 개미랑 비슷하지. 일하고, 먹고, 자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차이점이라면
인간은 모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거랑, 땅 위에서 사는 정도?”
‘모두 아이를 낳는다고요! 그럼 모두가 여왕인 건가요?’
공주가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더듬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건 아니야, 그렇지만 인간 여자는 모두 아이를 낳을 수 있어. 너무 어리거나, 늙거나,
병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우리는 알에서 태어나지 않아.”
‘모두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공주나 여왕은 없겠네요?’
“그건 아냐. 공주도 여왕도 있어, 개미랑은 조금 다르지만.”
‘그럼 인간 여자들은 모두 신랑이 있겠네요? 그들도 결혼을 하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떠나나요? 그들도 땅을 파고 집을 짓나요?’
이런 식으로, 공주는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질문했다.
받아주는 건 꽤 고된 일이지만 버섯 농장이나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솔직히,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 식사 시간이네요. 린트는 뭘 드시고 싶나요?’
“뭐든 괜찮아?”
‘고기랑 물고기, 감자랑 버섯...이끼나 채집한 벌레를 먹을 수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을 쓰지 못하니 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물고기(강에서 잡은 신선한 연어였다.)와 이끼, 감자를 부탁했다.
‘공주님, 식사 대령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녀가 바깥에 페로몬을 뿌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한 병정개미가 나타나
주문한 음식들을 들고 나타났다. 이전에 먹었던 그 허접한 식사가 아닌 의외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다.
‘맛있게 드세요, 린트. 잘 먹어둬야 결혼식 때 멀리 갈 수 있어요.’
“멀리 간다고? 왜?”
‘그야 멀리 가야 동족의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거든요.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개미가 살면 자원이 금방 고갈 되어, 결국 같은 동족끼리 싸우게 돼요.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일은 의외로 흔하답니다. 전 여왕님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불안함과 공포의 페로몬을 슬슬 뿌리며 말했다.
‘바로 근처에 사는 동족들은 호시탐탐 저희의 자원을 노리고 있어요.’
“동족인데도 싸우는 거야?”
‘인간도 그러지 않나요? 인간을 서로 싸우지 않는 종족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이야말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종족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치면 공주는 늘어지게 자거나, 다시 질문을 했다.
때로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린트, 당신은 일꾼이었나요? 아니면 병정이었나요?’
“나는 상인이었어.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
‘물건을 사고판다...? 그건 뭐죠? 사고판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공주가 더듬이를 움찔거리며 말했다.
“서로 가지고 있는 물건을 주고받는 거야. 내가 너한테 이끼를 주면, 너는
나한테 버섯을 주는 거지. 물론 그런 것 말고도 다른 걸 거래할 수도 있어.”
‘왜 거래라는 행위를 하는 거죠? 서로 나눠가지면 안 되나요?’
“그게 말이지,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어 하거든.”
‘가진다...린트도 더 많이 가지고 싶나요? 뭘 가지고 싶으신가요?’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건 자유뿐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노예다.
“잘 모르겠어.”
‘으음...그렇군요. 저는 더 많은 가족을 가지고 싶어요. 아주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요. 늙은 개미, 젊은 개미, 어린 개미, 일하는 개미, 싸우는 개미 모두...저는
그들을 낳고 기르면서 살고 싶어요. 린트도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이토록 순진하고 단순한 생명체가 또 어디 있을까?
“그래, 그거 괜찮네. 더 많은 가족들 말이야.”
‘린트에겐 다른 가족이 있나요?’
그 순간, 내 목을 타고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가족들, 고향에 두고 온 내 부모님과 형제들...나는 그들을 버리고 행상인의 삶을 택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었고 더 많은 걸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 결과 나는 여기에 갇혀버렸다. 내 선택이 초래한 결과다.
“있어.”
‘보고 싶나요?’
“응.”
‘...미안해요, 당신을 여기 가둬서. 하지만 제겐 당신이 필요해요.’
공주가 나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그녀에게서 미안함과 죄책감의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버릴 생각이니까.
어느 날, 공주가 오랜만에 방에서 나와 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그 도중에 보초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졸졸 따라왔지만 공주는 매몰차게 그들을 밀어냈다.
‘비키세요, 전 린트와 함께 갈 곳이 있어요.’
공주가 강렬한 적의와 분노의 페로몬을 뿜어내자, 보초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님...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당신은 이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나도 아는 사실을 상기시켜줘서 고마워요. 이제 지나가도 될까요?’
내가 아닌 다른 개미들을 상대할 때의 공주는, 진짜 공주 같았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한참을 가다가, 쓰레기 처리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 땅굴에서 나오는 모든 폐기물- 주로 죽은 개미의 시체나 부서진 도구, 먹다 남은
찌꺼기 ?따위를 버리는 장소였다. 시큼한 악취가 코를 마비시켰고, 나는 곧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다른 곳보다도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장소였다.
‘린트, 눈을 가리세요. 당신을 데려갈 곳이 있어요.’
“데려갈 곳?”
나는 그녀의 말대로 눈을 손으로 가렸다, 공주가 나를 붙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공주가 눈을 천천히 뜨라고 말했다.
태양이, 실로 오랜만에 보는 동그란 불덩어리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어...?”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낼 순 없어요, 하지만 태양을 보여줄 순 있어요. 인간은
태양빛을 오랫동안 쬐지 못하면 몸이 약해진다죠? 자, 여기 누워요. 저와 함께.’
나는 오랜만에 흙냄새 대신 향긋하고 상큼한 풀내음을 맡았고, 더 오랜만에 신선한
바람이 내 옷을 파고들어 간지럽히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면 온통 나무뿐이었고
그 너머로 태양이 보였다. 지상. 내가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장소가 바로 여기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공주의 옆에 누웠다, 차갑고 따끔따끔한 풀이 살갗을 찔러댔다.
‘여긴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만든 비밀 통로에요. 저나 여왕님, 쓰레기를 밖에 버리는
일개미 몇 명 빼곤 모르는 장소죠. 린트,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잘 모르겠어.”
나는 공주를 보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저도 알아요, 당신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거.’
그녀에게서 이해와 관용...배려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래도 전 당신이 제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니어도...”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공주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까만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보았다.
‘린트가 절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전 당신을 평범한 노예나 그저 그런 씨받이로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제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거운 족쇄가 내 심장을 휘감고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땅굴로 내려가는 길에 그녀에게 붙여줄 이름이 떠올랐다.
“앨리스.”
‘네?’
“이제부터 너를 앨리스라고 부를게.”
‘앨리스...?’
“땅굴로 들어가는 소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앨리스.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머지않아 두 번 다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몇 달이 지났다, 줄곧 땅굴에서 지냈지만 날이 추워지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곧 겨울이 와요, 겨울에는 모든 게 잠들어요. 곰도, 개미도, 숲도,’
“인간은 잠들지 않아.”
‘그럼 뭘 하나요? 겨울엔 먹을 게 없고, 꼼짝 못 할 정도로 추운데요.’
“추위에 떨면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겠지.”
나는 말린 버섯과 이끼, 온갖 식량과 자원을 부지런히 나르는 개미들을 보며 말했다.
‘저들은 매일 바쁘지만,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제일 바빠져요.’
“왜?”
‘겨울엔 식량을 구할 수 없고, 밖에 나갈 수도 없어요. 땅굴에 식량이 부족하다면 우린
그나마 덜 필요한 개미들과 노예들을 죽여요. 늙거나 병든 개미부터, 약해진 노예,
아니면 애벌레나 알까지요. 살아남으려면 희생이 필요해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죠.’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양털 같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어쨌거나 여왕이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것도 아니라면...더 큰 희생을
준비해야겠죠. 그 누구도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말이에요.’
“그게 뭔데?”
‘...전쟁이죠.’
우리는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바닥에 늑대며 사슴 가죽을 깔거나
벽마다 천을 덧대 붙였다. 이러면 한기가 덜 스며들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소식에 대해 앨리스에게 묻자, 곧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순 없을 거예요, 추위는 공평하니까요. 아마 겨울이 끝날 무렵엔
당신 동족들 중 몇 명이 죽을 거예요. 그러면 또 어디선가 인간들을 끌고 오겠죠.
저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요. 살아남으려면 노예가 필요해요.’
“나는 동의할 수 없어.”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의견을 묻지 않아요. 그냥 일어나죠.’
방한 대책이 끝나면 우리는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서로를 껴안은 채 이야기를 나눴다.
나중엔 할 이야기가 없어, 내 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나 옛날 동화들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기사는 탑으로 향했어, 높고 커다란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가는 길에는 가시덤불로 가득한 정원과, 불타오르는 강과, 무시무시한 마녀가 있었지.’
‘기사? 기사는 어떤 존재이죠? 혹시 개미인가요?’
“아니, 기사는...그래, 공주를 구하고 지키는 사람이야.”
‘공주를 구하고 지키는 사람.’
앨리스가 더듬이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도 기사군요, 린트.’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너의 기사가 될 수 없어.
“그래, 나는 너의 기사야.”
‘그리고 전 당신의 공주고요.’
땅굴에 갇힌 기사와 그 땅굴에 사는, 인간이 아닌 공주.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상! 적이 침입했다! 모든 개미들은 무장한 뒤 입구로 집결하라!’
머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강렬한 페로몬 때문에 잠에서 깼다.
함께 자고 있던 앨리스도 벌떡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어서 가요.’
“갑자기 뭐야? 무슨 일이야? 침입이라니, 누가?”
‘제가 말했죠, 겨울에 살아남으려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요. 저들은 전쟁을
택했어요. 그리고 이런 말하기 싫지만, 저희가 질 거예요.’
앨리스는 나를 붙들고 방을 떠났다, 저 멀리서 무장한 개미 떼가 우르르 몰려와
지상으로 향했다. 그들 모두 적개심과 분노, 공포의 페로몬을 뿜어댔다.
“왜 갑자기 공격한-”
‘저들은 저희보다 5배 정도 많아요, 그런데 식량이나 필수품은 필요한만큼 얻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여긴 이미 두 개의 왕국이 있고, 자원은 한정적이니까요. 저들은 모두를 죽일
거예요. 노예, 애벌레, 알, 공주, 여왕...그리고 당신까지. 저들이 원하는 건 노예가
아니에요. 식량과 자원이죠. 린트,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앨리스가 이제껏 없을 정도로 강렬한 슬픔과 공포의 페로몬을 뿜었다.
우리는 계속 내려가다가, 마침내 여왕의 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여기로 돌아온 건 거의 반년만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이전처럼 일개미며 보초를 서던 병정개미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무심한 듯 위엄을 지키는 여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간, 그리고 공주. 이쪽으로 와라.’
이전처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우리는 여왕의 앞에 섰다.
‘여왕이시여, 적이 공격했고 저희의 수는 한참 부족합니다. 저희는 질 겁니다.’
‘나도 안다, 공주여. 네가 내게 뭘 제안할 건지도 이미 안다. 내 대답은, 거절이다.’
그러자 앨리스가 구슬픈 비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드렸다.
‘저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여왕이 죽으면 왕국도 끝입니다.’
‘안다. 그러나 이 겨울에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 끝났다. 버텨봤자 몇 분이다.
곧 저들이 이곳까지 와서 내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지. 나는 안다.’
여왕이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인간, 마지막 명령이다. 공주를 지켜라, 이 왕국의 미래를 구해라.’
“나는-”
‘알고 있다, 너에게 의무는 없다. 너는 공주를 버릴 수도 있다, 다만 공주가 너를
위해 마음을 썼듯 나 또한 그대에게 그런 마음을 바랄뿐이다. 이제 가라.’
“앨리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
‘가라.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앨리스!”
‘저는-’
‘너의 목숨은 너의 것이 아니다, 공주- 아니, 나의 딸아.’
여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화는 끝났다.
나는 가지 않으려고 하는 앨리스를 붙들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달려갔다.
‘놓으세요! 여왕을 버릴 수는-’
“이미 끝났어! 지금 돌아가 봤자 다 죽을 뿐이야!”
‘당신의 친구들, 동족들도 거기 있어요.’
나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나도 알아, 앨리스. 나도 안다고.”
‘그럼 구하러 가야죠!’
“너도 알잖아, 우린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녀가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저 그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갔다. 그 다음 쓰레기와 시체를 헤집고 밖으로 나가는
땅굴을 찾아냈다. 밖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순수와 잔혹의 땅이 보였다, 순진무구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우리만치 잔혹한
눈과 앨리스가 겹쳐보였다. 숲과 땅과 바위에 눈이 쌓여있었다.
나는 덜덜 떠는 그녀에게 나만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눈 위를 걸어갔다, 걷고 또 걸었다.
‘저, 저희...돌아가요, 제발...여긴 너무, 차가워요...’
앨리스가 덜덜 떨며 두려움과 고통의 향기로 내 코를 간질였다.
“돌아갈 곳은 없어, 앨리스. 이제 집도, 왕국도 없어.”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우리는 얕은 능선 위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이다, 일단 저기서 몸을 좀 녹이자.”
‘네...’
혹시 곰이나 짐승이 살고 있지 않을까, 주의해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무언가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쪽에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지만 적어도
바깥처럼 살가죽을 꿰매는 듯 고통스런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나는 앨리스에게 마른 나뭇가지를 최대한 많이 모으라고 지시한 다음 동굴 바닥을
잘 살펴보다 적당히 쓸 만한 부싯돌을 찾았다.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불을 피울 거야.”
‘불!’
앨리스가 푸르뎅뎅하게 변해버린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불을 피우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얼어죽을 거야.”
‘불은 안 돼요, 불은 너무 위험해요...모든 걸 태우고, 질식시켜요...’
땅굴에서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여긴 땅굴이 아니다.
나는 부싯돌을 몇 번 부딪혀 불똥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불똥이 튀면서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바람을 살살 불어주자 불길이 점점 커지다, 나뭇가지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앨리스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그걸 지켜보다, 이내 온기에 빠져 가까이 다가왔다.
‘불은 처음 봐요, 따뜻하고...왠지 모르게 무서워요.’
“응.”
우리는 불가에 앉아 차디찬 몸을 녹였다, 나는 앨리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앨리스.”
‘네.’
“이제 여기까지야. 나는 갈 거야.”
두려움, 당혹감...강렬한 배신감이 요동쳤다.
‘네? 어디로요? 갑자기 무슨-’
“나는 개미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네 곁에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 땅굴에서
달아나기 위해서였어. 너나 너의 왕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나는 거기서 빠져나왔고,
널 돌봐줄 여력은 없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어. 지금 당장.”
‘린트, 농담이죠? 저를 놀리시는 거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앨리스의 더듬이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널 싫어하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 남은 인생 전부를 너에게 바칠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고. 넌 그 빌어먹을 개미들 중에선 가장 나은 부류였으니까.”
‘린트, 당신이 없으면 전 혼자에요. 왕국을 만들 수도 없고, 살아남을 수도-“
“그렇겠지. 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니까.
난 이제 갈 거야. 네가 부디...살아남기를 기도할게.”
‘린트!’
그녀가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당신은 제 기사잖아요, 저를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제발...’
“난 기사가 아니야, 흔해 빠진 행상인이지. 나는 널 지켜줄 수 없어. 너도 알잖아.”
‘제겐 아무도 없어요, 당신 말고 다 죽었어요. 여왕님, 일꾼들, 병정들 모두...’
“알아.”
‘이제 당신은 당신의 동족을 버렸던 것처럼, 저마저 버릴 생각이로군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어쩔 수 없었어! 젠장,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난 평범한 인간이야!
그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처럼, 널 구해줄 수 없어! 난 아무도 구할 수 없어.
아무도! 왜냐하면 나는 개미한테 붙잡힌 노예일 뿐이니까. 너에게 왕국과 여왕이
있듯, 내게도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어. 난 돌아갈 거야. 붙잡지 마.”
‘그냥 제 곁에 남아줄 순 없나요...?’
그녀가 애처롭게 울었다, 나는 등을 돌려 동굴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거기 남아 있어봤자 함께 죽을 뿐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돌아갈 고향이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내겐 아무 힘도 없다. 내 동료들도 날 이해해 줄 거다.
나는 그냥 상인이고, 평범한 인간이다. 기사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그 누구의 기사도 아니다.
혹독한 눈보라 속을 기어가듯 걷던 중, 문득 낯익은 무언가를 느꼈다.
두려움.
외로움.
...그리고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슬픔.
나는 앨리스의 페로몬을 떨쳐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그 순간, 나는 또 다른 페로몬을 느꼈다.
적개심...죽음을 앞에 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포...
‘린트!’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몇 마리의 낯선 개미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동굴 쪽으로 올라가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이 우리 뒤를 쫓아온 것이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분명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저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있는 동굴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앨리스! 빌어먹을! 앨리스!!”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지? 내겐 무기도 없고, 힘도 없다.
달아나야 한다. 도망쳐...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는 머리를 가득 채우는 비겁한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앨리스를 구할 방법 따윈 없다, 나는 이미 그녀를 버렸다.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이름을 외친 순간- 나는 돌아와 버렸다.
어째서? 대체 왜?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앨리스는 그냥 내 탈출 수단일 뿐인데.
하지만 깨달았다.
앨리스를 버릴 수 없다는 걸.
그랬다간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 거라는 사실을...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인지 곱씹으며 한심한 인생을 살아갈 거라는 걸...
그리고 사실, 나는 그녀를-
“앨리스!!”
내가 소리치자, 무기를 들고 있던 개미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하나, 둘, 셋...5마리나 되는 병정개미들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쪽이다, 이 돌대가리들아! 덤벼!!”
내가 돌멩이를 집어던지자, 놈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가, 앨리스! 도망쳐! 제기랄, 도망치라고!!”
나는 뒹굴뒹굴 구르듯 능선을 내려갔다, 곧 개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길 수 없다, 뿌리칠 수 없다, 달아날 수 없다.
하지만 이로서 나는, 앨리스의 기사가 되었다.
목숨을 던져 공주를 구하는- 그런 기사가.
나는 개미들에게서 달아나 한참을 달리다, 마침내 체력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미끌미끌하고 투명한, 눈이 쌓인 바닥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개미들이 위협적인 쇳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젠장.”
개미 하나가 덤벼들어, 나를 창으로 때렸다.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를 맞아
바닥에 엎어졌다. 나를 끝장내기 위해 창을 내리꽂았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옆에 맞아 빗나갔다. 빙판 위로 일그러진 균열이 생겼다.
“여긴...호수인가!”
다른 개미 하나가 창을 던졌다, 이번엔 간신히 피했다. 나는 바닥에 꽂힌 창을 뽑아
놈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자 개미들이 뒤로 물러서며 방패를 들었다.
어차피 바닥이 미끄러워서 제대로 찌를 수조차 없었다.
가장 덩치 큰 개미가 방패를 앞세우고 내게 달려들어, 나를 넘어뜨린 다음 거칠게
내팽개쳤다. 내 위에 올라탄 다음 두꺼운 주먹으로 내 얼굴을 마구 때렸다.
피가 튀며, 정신이 멍해졌다. 시야가 붉게 변하고 무언가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주먹이 날아올 때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 순간, 아까 균열이 생겼던 자리에
주먹이 꽂히며 균열이 더 커졌다. 개미가 그걸 보더니 공포의 페로몬을 뿜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나는 있는 힘껏 바닥에 창을 꽂았다, 개미들이 달아나려 했지만 균열은 이미 그들의
발밑까지 치고 들어왔다. 창을 뽑는 순간, 쩍-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끝이다, 놈들은 더 이상 앨리스를 쫓을 수 없다.
얼음이 깨지며, 놈들이 물에 빠졌다. 겨울철의 호수는 심장을 순식간에 죽여버릴 정도로
차갑고 잔혹했다. 내 발밑에 있던 균열이 점점 커졌다.
아아.
앨리스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곧 몸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본 물결치는 회색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몸이 굳으며 고통이 점점 무뎌졌다. 숨을 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난 편안했다.
일그러진 거품들이 나를 집어삼켰다...
‘...트! 린트! 정신 차려요, 린트!’
눈이 번쩍 뜨였다, 앨리스가 내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그녀는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나를 호수 밖으로 질질 끌어내 옷을 벗기고 맨손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빨갛게 부르트며 피가 배어나오는 게 보였다.
“애, 앨리스...?”
‘린트! 다행이에요, 죽은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녀가 울먹거리며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 날, 지하의 공주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했다.
겨울은 끝나지 않고 계속 됐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기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