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겨울은 유난히 춥구만.'
김첨지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수전노로 유명한 마을 곽대감이 종놈들 방에 불을 떼준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것을 보아서는 실제로 추운 것이 맞다고 보아야했다.
박진사와의 약속도 틀어진 마당에 헛걸음을 했던 김첨지는 우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침에 솜옷을 받쳐입고 가라던 아내의 말에 '햇볕이 이리 좋은데 솜옷은 무슨 솜옷' 이라며 허세를 부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삼년 안 씻은거지마냥 더럽게 추운 날씨였다.
순식간에 물밀듯 밀려온 먹구름들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 온 하늘을 캄캄하게 매웠다. 구멍도 없이 꿰맴 한번 촘촘하다고 시 한수 지을 여력따윈 없었다. 따땃한 구들방에서 몸을 지지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귤 사시오, 귤!"
때마침 장시를 지나던 김첨지의 귓가에 귤장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뜨끈한 구들방에서 몸을 지지며 솜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는다라? 추운 와중에도 그것은 무척이나 솔깃하게만 다가왔다.
김첨지는 몸을 돌리며 귤장사를 불렀다. "여보, 귤장ㅅ..." 김첨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허망하게 든 손만 갈 곳 없이 헤매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귤장사 옆에는 M1A2 에이브람스 전차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 예 어르신. 부르셨습니까요?"
난모를 쓴 귤장사가 하얀 입김을 뿜고는 손을 비비며 다가왔다. 그러나 귤장사가 코앞에 올때까지도 김첨지의 시선은 에이브람스 전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귤장사는 재차 김첨지를 불렀다.
"저, 어르신?" 간신히 김첨지는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M1A2 에이브람스 전차라니, 귤장사가 끌고다닐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도, 도대체 저 물건은 뭔가?" 김첨지는 에이브람스 전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귤장사는 어째선지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 저 전차말입니까요? 귤장사를 하며 돌아다니려니 맨몸으로는 아무래도 힘들기에 하나 장만하였습니다. 왠만한 나귀보다도 힘이 좋은 녀석입지요." 귤장사는 에이브람스 전차의 포신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귀?' 김첨지는 속으로 경악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1500마력씩이나 되는 물건을 고작 나귀에 비빈다는 말인가?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다. 사실 웃기보다는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아무튼, 동네 귤장사가 나귀를 몰던 에이브람스 전차를 몰던 그것은 김첨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추운 날씨는 김첨지를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기를 독촉하고 있었다.
"귤 좀 담아주겠나? 좋은 놈들로 말이네."
"귤 말입지요. 저, 혹시 어르신. 댁이 어디십니까?"
"댁?"
김첨지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고작 귤 파는데 자신의 집을 물어볼 연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혹시 자신에게 귤을 산 자들의 집을 모조리 전차로 밀어버리는 미치광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것은 김첨지의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입밖으로 나오진 못하였다. 김첨지는 흉흉한 기세의 에이브람스 전차를 의식하며 순순히 자신의 집을 일러주었다.
"저기, 저 뒤쪽 세 번째 집이네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귤장사는 그렇게 말하곤 전차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윽고 기관이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포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방향은 분명히 귤장수에게 말해준 자신의 집쪽을 향하고 있었다.
김첨지는 초조해졌다.
"여보게, 자네 뭐하는 것인가. 여보!"
그 때, 포성이 울렸다. 김첨지가 막바지에 외친 여보가 과연 귤장사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집에 있을 자신의 집사람을 부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굉장히 다급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콰앙! 폭발음과 파열음이 들려왔다. 김첨지는 멍하니 자신의 집쪽으로 날아가는 물체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아...아이고."
망연자실한 김첨지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전차에서 머리를 내민 귤장사는 김첨지를 보며 난색을 띄웠다.
"아니 어르신, 왜그러십니까?" 김첨지는 천연덕스럽게 묻는 귤장사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언제든지 자신을 향할 것만 같은 M2HB 중기관총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어깨를 늘어뜨린 김첨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귤값까지 지불하게 된 김첨지는 처참한 모습이 되어있을 집 생각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왠걸? 집은 의외로 멀쩡한 것이 아닌가? 김첨지는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의문을 품고 대문을 들어섰다. 아내가 나와 어디서 귤을 샀냐며 참 맛있다며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귤은 무척이나 달았다. 따뜻한 구들방에 누운 김첨지는 귤장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첨지의 머릿속에서 귤장사는 눈을 찡긋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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