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쩍은 마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남자는 이내 악수를 풀고, 청년의 손 위에 자신의 손 대신 팜플렛을 쥐어주었다. 조만간 꼭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그는 다른 곳도 방문해야 하니 이만 가봐야겠다는 말과 함께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청년이 방으로 다시 들어와 팜플렛을 살펴보니, 단체의 짤막한 개요와 찾아가는 약도, 투쟁 목적 등이 적혀져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필두로 한, 인간을 흉내내는 모든 기계는 없어져 마땅하며,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인간성을 내던진 신체 개조 인간들도 배척의 대상이라는 투였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급진적이다 싶은 사상에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사족으로 달린,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의의를 생각하면 현 시대의 세태는 너무나도 엇나갔기에 급진적일지라도 이런 식의 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논조는 청년의 마음을 다소 흔들었다.
친구의 죽음 역시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인간의 모든 것이 기계와 마찬가지로 부품 취급당하는 세상. 그런 인간보다 더욱 인간에 가까운 안드로이드들. 방 안에 틀어박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도 모를 원망을 자신에게 쏟아붓고 있던 청년의 머릿속에, 그 원망의 대상이 조금씩 구체화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년은 먼지 쌓인 옷장에서 옷을 끄집어내 대충 걸치고, 한 손에는 아까 남자에게 건네받은 팜플렛을 쥐고 참으로 오랜만에 문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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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세상은 꽤나 달라져 있었다. 청년이 그것을 실감하게 된 것은, 버스에서 내려 팜플렛에 나와 있던 '인류해방전선'의 지부를 찾아가는 도중이었다. 무작정 뛰쳐나온 데다 모르는 동네라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그의 등 뒤에,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이었다.
"길을 찾고 계신가요?"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푸른색의 정장 재킷과 미니스커트를 차려입고, 머리에는 흡사 여경이나 쓸 법한 장식 달린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서 있었다. 밤색의 커트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청년은 모르는 여자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 길을 알려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이 낯선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세상 사람들이 이리도 친절했던가 싶었다. 청년이 말을 않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찾고 계시는 곳이 어딘지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길을 안내해드릴게요."
"아.. 그러니까..."
청년은 주머니에서 팜플렛을 꺼내들었다. 그저 약도를 보며 대답하기 위해서였는데, 꺼내 든 팜플렛을 본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여자의 향취에 어쩔 줄 몰라하던 청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쭈뼛거리는 청년을 향해 여자가 아까보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쪽으로 따라오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여자가 먼저 앞장서 걸어가고, 청년은 그 뒤를 쫒았다. 여자 뒷꽁무니나 따라가는 걸로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 머리를 긁적이던 청년은, 무심코 여자의 뒷통수를 쳐다보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카라 위로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 한 편에, 마트의 상품에나 찍혀있음직한 바코드가 그어져 있는 게 아닌가. 청년은 황망하여 입 밖으로 말을 흘리고 말았다.
"안드로이드...."
중얼거리는 청년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4세대 모방형 모델이죠. 저는 관광객이나, 길을 헤매시는 분들에게 길 안내를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저 말고도 많은 안드로이드들이 인간 분들의 안전, 편의를 위해 이런저런 노동과 업무에 투입되고 있어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멀리서 오셨던지, 세상사에 관심이 없으셨나 보네요. 4세대 부터는 인간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겉모습이나, 행동, 말투도요."
정말이었다. 목에 찍혀있는 바코드만 아니었더라면, 전혀 눈치챌 수 없었으리라. 청년은 문득 지금의 이 상황이 눈 앞에 있는 여자, 아니 안드로이드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지금 안내를 받아서 가고 있는 곳이, 그녀와 같은 안드로이드를 때려부숴야만 한다고 외치는 이들의 집단이었기에.
"사실 나는..."
"말 안 하셔도 돼요. 저희는 인간을 증오하거나 원망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까."
"..."
말은 안 했지만, 지금 청년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아는 눈치였다. 청년은 차분한 그녀의 말에 왠지 부끄러워졌다. 어딜 봐서 이들이 기계라는 걸까. 사람하고 별 다를 것도 없는데. 감각이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10여분 정도를 걸었다 싶을 때,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인류해방전선'..은 이 건물 지하에 있어요."
퍼뜩 정신이 들자, 채 짓다 만 듯한 빌딩이 눈 앞에 있었다. 대략 5, 6층 되보이는 건물은, 이미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와 스프레이, 벽화와 낙서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만 들어가는 입구 한켠에 커다란 대자보가 붙어있고, 그 옆에 붙여진 '인류해방, 기계말살을 원하는 분들은 지하로'라는 문구가 사람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했다. 청년이 고맙다는 인사조차 꺼내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서 사람들을 많이 포섭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렇게 해서 오신 거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단체에 가입하시는 건 추천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건 아가씨.. 아니, 당신이 안드로이드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를 많이 일으키니까요. 신체 개조와 안드로이드를 금지하자고 하는 건 자유겠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져 폭력적인 활동으로 물의를 많이 빚고 있어요. 저와 같은 안드로이드들을 공격해서 상해를 입힌다거나.. 심하면, 완전히 분해해서 기능정지를 시키기도 하죠."
"기능정지라니, 그게 뭐요?"
"인간 분들 식으로 하자면, 죽음과 비슷한 개념이죠. 모든 데이터를 복구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걸 뜻해요. 저희가 인간들만이 느끼는 감정이나 마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통을 당하면 슬프고 괴로워하는것과, 스스로의 기억과 존재가 없어진다는 걸 두려워하는 건 같아요."
"...."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사뭇 슬퍼 보였다. 청년은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정말로 안드로이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저희가 그렇게 부서진다고 해도, 슬퍼해주는 사람도 없고, 남은 잔해는 재활용 처리장으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에요. 저희를 부순 분들도 그저 '재물손괴죄'에 해당하는 벌금만 조금 물면 끝이니까."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면, 왜 무리를 이루어 대항하지 않소? 숫자가 우리보다 더 적은 것도 아닐텐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들은 인간을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원망과 증오를 표출할 수 없어요.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
청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행동이 옳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무력한 이들에게 무분별한 분노를 퍼붓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기계라는 이유만으로. 상념에 빠져 허공을 응시하는 청년에게, 손으로 가볍에 머리를 털고 이내 웃는 상으로 표정을 바꾼 여자가 말을 건넸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여기 계속 서 있다가는 저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길 안내가 필요하시면 찾아주세요."
퍼뜩 정신을 차려 쳐다보니, 여자가 등을 돌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기분 탓일지 모르겠으나 슬픈 듯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