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주택가의 허름한 골목 몇 군데를 지나, 하얀 색의 비슷한 건물들이 격자처럼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그 곳이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원룸촌이었다. 주인의 말로는 이 가격에 이런 물건 구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그가 생각하기엔 양계장의 닭장과도 같은 그 곳은 그저 마지못해 지내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이런 방조차 구하지 못해 길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조차 있다고 하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 뿐.
낡은 계단을 따라 걸어올라가다 보니 눈 앞으로 하얀 가루가 조금씩 떨어지는 게 보였다. 다 벗겨진 페인트 칠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는 걸 깨닫고는,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음이 잘 안 되기에 몸에 밴 습관을 따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갑고 볼품없지만 약간이나마 안식을 주는 청년의 방이 그를 반겨주었다.
청년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놓고, 화장실에 들어섰다. 사람 한 명 간신히 서있을 정도로 좁은 화장실의 세안대 앞에 선 청년의 얼굴은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여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누렇게 바랜 눈동자. 친구와 주거니받거니 하여 술까지 마셨으니 평소보다도 더 안 좋으리라. 청년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다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 같아, 급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는 청년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급구' 라던가, '파트타임' 쪽에 눈길이 갔다. 그는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놀리던 손을 멈추고 자신이 왜 이런 신세가 되었나 생각해보았다.
대학 시절 컴퓨터와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시대의 발전은 인류에게는 너무나도 빨랐다. 이제는 기계가 기계를,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시대였다. 그가 20대 무렵이던 때에는 전자제품이나 로봇, 인공지능등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만들어지는지 충분히 이해 가능하였으나,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선 지금에 와서는 대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동작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들이 쌓아온 10여년 간의 업적은, 인간들이 그간 쌓아올린 100년 동안의 눈부신 업적들을 곧 바닷물에 쓸려갈 모래성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청년은 이미 인간의 모습과 외형적으로는 거의 다를 바 없는 로봇들, 즉 안드로이드들이 개발되어, 여기저기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도 뉴스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과 혼동을 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몸 여기저기에 바코드를 새기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접합부위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컴퓨터와도 같은 지능과 기억력으로 사무직에서 활약하는가 하면, 사람이 도저히 들 수 없는 커다란 쇳덩이나 건축 자재를 가느다란 팔 하나로 번쩍번쩍 들기도 하였다. 인간을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인류와 꼭 닮은 무언가가, 인류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낫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기도 하였기에 몇몇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계처럼 개조하기도 하였다. 전자두뇌를 장착하고, 쓸데없는 장기를 갈아치우고, 팔 다리를 엄청난 힘을 낼 수 있는 기계로 바꾸고..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이런 괴물들의 각축장 사이에서, 청년은 항상 일자리를 위협당하는 셈이었다. 그가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하지 못하고 단기 직종을 전전하는 데에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의 지식과 함께 이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들과 우리, 즉 기계와 인류의 경계가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조만간 사라지거나 희미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의 감정과 모습을 갖고 싶어하고, 인간은 기계의 효율과 능력을 갖고 싶어하기에. 서로를 닮고 싶어하는 그 둘은 언젠가는 섞여버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청년은 그 미래는 정해져 있고, 곧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마음 한 편으로 절대로 그런 미래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 모순된 생각은, 그가 순수한 인간으로서 남고 싶어하기에 가진 당연한 의지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내일은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그 다음날은 더욱, 그리고 그 다음날은 더더욱.. 줄어드는 일자리는 매일같이 발전하는 기계들과 비례하였다. 인간과 닮았고, 인간보다 유능한 기계들이 더욱 발전하여 종래에는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떨치며, 청년은 몇 군데 일자리의 번호를 휴대전화에 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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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나야 여전하지. 그런데 자네는.."
의외였다. 평소에는 항상 청년이 그의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먼저 청년을 불러낸 것이다. 게다가 저번의 그 죽을 상은 어디로 가고, 이리도 뺀질해진 얼굴에 웃음기마저 띄고 있단 말인가. 청년은 친구의 변화에 기꺼워하면서도,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주 신수가 훤하네. 자네 저번에 그 일자리.."
"하하, 그래. 해고당했었지."
"그런데 뭐가 그리 좋아서 히죽거리냐 이걸세."
"괜찮은 새 직장을 구했다네. 게다가..."
친구는 잠시 말을 끊더니,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자세히 보니 노트북이었다. 그것도 최신의 초고가 모델. 청년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들고 있는 소주잔의 소주가 웃음에 맞춰 찰랑거렸다.
"이거 자랑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 사람하고는.."
"아니지, 아니야. 잘 보라구."
그러더니 노트북을 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가방에 손을 넣어 청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란 색의 두툼한 케이블을 꺼내들었다. 아니, 본 적은 있지만 눈 앞에서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청년의 기억으로는 틀림없이 그 케이블은 전자두뇌와 단말기를 연결하는 전용 케이블이었다. 이윽고 친구는 케이블의 한쪽 끝을 컴퓨터에 꽂고, 남은 반대쪽 단자를 자기 뒷통수 근처로 가져가더니, 거기에 구멍이라도 있는 것인지 자그마한 덜컥 소리와 함께 꽂았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왠지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아, 어느새 소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두 손 놓은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가...
곧이어 노트북의 전원이 들어오고, 그의 맨 눈으로는 도저히 쫒을 수 없는 속도로 이런저런 창과 사진들이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홱홱 지나갔다. 잘은 모르겠으나, 친구는 단지 그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있는 파일이나 자료를 마음대로 저장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굉장하지 않나? 자네나 내가 10년.. 아니, 20년 들여서 배울 지식들을 이 전자두뇌만 있으면 고작 몇 시간만에 배울 수 있어. 가히 혁명이지."
"...얼마나 들었어?"
이것저것 할 말을 찾다가 간신히 떠올린 대답이었다. 맥빠진 듯한 청년의 물음에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으며 말해주었다.
"천만원 조금 넘게 들었네. 사실 이것도 싸게 한 거야. 구형 모델이거든. 처음 수술받고 나서는 머리가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영 어색해서 불편했는데.. 지금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머릿속도 항상 맑은 기분이고, 업무 효율은 말할 것도 없지. 새 직장에도 안드로이드들이 있는데, 이제는 별로 신경도 안 쓰인다네. 하하.."
"...."
아마도 그의 친구는 나름대로 활로를 찾은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머리 쓰는 게 주특기였는데, 그 주특기로 졌으니 얼마나 분했을까. 그래서 저런 극단적인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겠지. 청년은 애써 그런식으로 생각하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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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네, 하나도 아.. 안 취했구만. 끄윽"
"진짜 두뇌가 아니잖나. 이런 알코올 몇 잔 따위로 취할 리가 없지. 항상 자네가 취한 나를 데려다줬었는데, 오늘은 내가 이겼군. 하하.."
만취하여 비틀거리는 청년을 가볍게 택시에 태우고, 친구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땅이 울렁거리고 눈 앞이 가물거리는데, 이상하게도 택시 안 백미러에 비친 친구의 모습이 청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윽고 택시가 출발하였고, 친구의 모습도 점이 되어 점점 멀어졌다.
술에 취해 끊어지려는 의식 속에서 청년은 기억을 더듬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어렸을 적부터 항상 같이 놀았던 친구. 머리가 좋아 학교에서 내내 수석을 차지했던 친구.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마치 진짜 가족처럼 뜨겁게 울어주던 친구. 대번에 거절하긴 했지만, 연줄이라도 대 줄 테니까 자기 회사로 들어오라고 권유하던 친구.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를 얻고... 손바닥을 보듯이, 거울을 보듯이 그 친구에 대해서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자부했던 청년의 생각은 이내 새까만 어둠속으로 떨어졌다.
청년에게, 오늘 그의 친구는 너무나도 낯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