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 한 때는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의 중소 제조업 공장들이 자리잡은 이곳은 과거 민주화 항쟁 시절엔 노동운동의 상징같은 곳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공장 대신 패션산업과 IT산업 중심의 디지털단지로 바뀌어 첨단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그 당시 구로공단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일부 있었다. 버서커의 마력 흔적이 발견된 이 곳도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구로역에 인접한 버려진 공장. 인적이 없다시피한 폐공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간간히 지나가는 열차 소리가 들리고, 그 너머로는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철도를 경계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하네요."
"어. 하지만, 마력 흔적은 확실하게 있어."
폐공장의 문은 열려 있고 주변에는 사무실이나 CCTV같은 것도 없어 누군가가 출입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그들이 몰래 이 곳으로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세이버와 버서커의 교전이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총을 꺼내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라이더 공, 이곳을 둘러보자는 의견을 낸 것은 그대이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 상황은 예상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미처 상정 못했네. 사과하지."
"저기,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여어, 기다리고 있었어."
성민의 질문에 답하듯, 목소리와 함께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죽 옷의 사내. 바로...
"버서커...!"
"설마 당신들이 진짜 여기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리도 대단하지, 여기까지 간파할 줄은."
서번트의 충돌이 있었다면, 아무리 소규모의 충돌이라도 벽면이나 바닥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러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즉, 서번트 간의 충돌은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우리를 여기로 유도하려고 일부러 마력을 발산시켰다 이 말인가?"
"그런 얘기지. 그리고 당신네들은 보기 좋~게 걸려든 거고."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소나 시간대 등을 따지고 본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일 일은 적기 때문에 교전을 수행하는 것 자체는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교전 장소를 선정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상대가 어떤 함정을 미리 준비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 때문에 섣불리 싸웠다가 상대가 미리 준비해 둔 함정에 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사실상 세이버의 영역권이나 마찬가지인 구역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세이버까지 참전하여 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어떤 양반부터 덤비실래? 참고로 말해두지만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없어."
그렇겠지, 하고 성민 일행은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폐공장 내 공간이 상당히 넓다는 것과 지금 자신들의 위치와 상대 간의 거리가 제법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양쪽 사이에는 불필요한 장애물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뿐. 그렇게 생각하고 성민은 윤아 쪽을 보았다. 마침 윤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성민의 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전철 소리가 침묵을 깼으나 양쪽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폐공장 안에는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전철 소리가 더 이상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아처!"
"라이더!"
두 사람의 외침과 함께 공기가 달라졌다. 라이더는 두 사람을 앞에 가로막고 뒤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아처는 순식간에 허공에서 조총 한 정을 더 꺼내어 양손에 쥐어 발사했다. 동시에 그의 발 아래 주위에서 황금빛 가루와 함께 여러 정의 조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취한 행동이라 아무리 서번트라도 이 총격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뭣?!"
마치 그 공격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버서커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휘두르며 몸을 움직여 총탄을 튕겨냈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봐, 왜놈 형씨. 설마 내가 저번처럼 예상도 못하고 당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쉽게 당해주진 않는다는 얘기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냉정을 되찾은 아처는 본격적으로 화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쥐고 있던 총을 던지고 자신의 주변에 나타난 총 두 정을 다시 쥐어 사격,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조총 세 정이 나타나 차레로 사격을 퍼부었다. 한 번 사격을 가한 총은 아처가 던져냄과 동시에 황금빛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아처 주위의 총은 빈 자리가 생길 때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새로운 총이 나타났다. 등 뒤의 총도 한 정이 사격을 가하면 뒤로 넘어가면서 사라지고, 새로운 한 정이 나타나 사격를 가했다. 총 한 정당 한 발씩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총들이 쉴새없이 사격한다면 영령이라도 쉽게 접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보구 사용은 아직 최대한 지양해!"
"알고 있소!"
폐공장 안은 언제 그렇게 조용했냐는 듯 총성음이 공장 전체를 울렸다. 누군가가 본다면 상대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을 압도적인 연사와 울리는 총성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면, 사격하는 쪽도 당황하게 만드는 상대의 몸놀림이었다.
조준은 정확했다. 접근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빗겨쏘는 것은 있었어도 정상적으로 총탄이 날아간다면 분명 상대를 꿰뚫어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서커는 놀랍게도 그 총탄들을 전부 회피하거나 칼로 튕겨내고 있었다. 왼손에 쥔 장검과 오른손에 쥔 단검을 번갈아 휘두르며 몸을 향해 직접 날아오는 총탄은 튕겨내고 몸과는 떨어진 방향으로 날아오는 총탄은 피하면서 서서히 아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영령이라고 해도 저게 가능해?!"
윤아는 경악했다. 버서커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양손에 쥔 검을 정수와 역수로 번갈아가면서 쥐고, 단순히 검을 휘둘러 총탄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총탄의 궤도와 검신의 각도를 절묘하게 계산하며 튕겨내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의 누구이길래 저 정도의 무용을 보이는 것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디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예사 솜씨는 아닌 것 같은데."
라이더는 가만히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서번트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진 순간,
"장이요~"
버서커는 순식간에 아처 쪽으로 파고들었다. 아처의 오른손을 가격하여 총을 떨어트리고, 곧장 그의 어깨와 목 사이 빈틈을 손날로 가격한 다음 발차기로 밀어낸다. 흡사 현대의 절권도를 연상케 하는 빠른 연속공격으로 순식간에 아처를 무력화했다.
"아처!"
"...괜찮습니다, 주군!"
성민의 외침에 아처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그 포화를 여유롭게 돌파하고 접근할 줄이야."
"내가 왕년에 당신처럼 총 다루는 녀석한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었다 이거야."
거리가 좁혀진 이상 총격으로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아처는 허리에 찬 검을 꺼내들고 버서커에게 달려들었다. 일본식 갑옷과는 대조적으로 그가 뽑아든 검은 일본도가 아닌 조선식 환도였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생각했던 건데 말이야. 댁, 아처 아니었수? 아처가 칼질을 하는 건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나?"
"그쪽이 거기에 신경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오만."
"아니, 다른 이유는 없고 말이지..."
버서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처는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방금 전 버서커의 발차기로 제법 거리가 벌려졌음에도 서번트답게 도약 한 번에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 노리는 찌르기는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대처하기 힘든 속도였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가볍게 비웃기라도 하듯 버서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몸을 옆으로 틀어 찌르기를 피하면서 주먹으로 아처의 팔 아래 몸통을 가격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중심을 잃어 고꾸라지는 아처를 버서커는 다시 한 번 손날로 목을 가격하여 확인사살을 가했다.
"거 아처면 아처답게 멀리서 승부를 볼 생각을 해야지. 멋대로 이렇게 앞으로 나섰다간 죽도 밥도 안 되고 뒈지는 거요 왜놈 형씨."
"크윽..."
버서커의 태도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저 버서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서번트로 소환되어 스펙이 강화되었다고는 해도 총탄포화를 저렇게 여유롭게 뚫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애초에 저 정도 무예를 가진 인물이라면 역사에서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왜 누군지도 짐작이 안 가는 걸까요..."
성민과 윤아는 당황스러웠다. 나름 역사학과인만큼 동서양의 역사에 이름을 알린 웬만한 인물이라면 알고 있을 그들조차 상대의 정체를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뭐, 이걸로 끝났으면 말이우. 그래, 그쪽 말로 표현하자면, '사요나라'지."
버서커는 장검을 들어 쓰러져 있는 아처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날카로운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버서커의 장검이 막힌 것은 그 때였다.
"물러서 있으시오, 아처 공."
두 서번트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라이더였다. 어느새 환도를 꺼내들어 버서커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일어설 수 있겠소?"
"...문제없소. 면목 없소이다, 라이더 공."
"그쪽이 부족한 탓이 아니오. 보구 사용이 제한된 지금은 아처 공에게는 너무 불리한 상대니."
라이더는 팔에 힘을 줘서 버서커를 밀어냈다. 곧이어 푸른 빛의 바람이 라이더를 감싸더니 라이더의 복장이 바뀌었다. 사극에서 많이 봤을 법한 익숙한 두정갑. 방금 전까지 반팔티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던 동네 아저씨같은 분위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풍기는 모습이었다.
"호오, 설마하니 그 쪽은 높으신 무관 나리셨나?"
"버서커는 내가 상대하겠소. 아처 공은 두 사람과 함께 바깥을 경계해주시오. 세이버가 접근할지도 모르니."
"알겠소. 무운을 비오."
아처는 성민과 윤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주군."
"괜찮아. 라이더 말대로, 상성이 나쁜 거였을 뿐이니까."
성민은 자책하는 아처를 위로하며 폐공장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 맞다. 마스터, 한 가지 미리 물어볼게."
"뭔데?"
"보구 사용은 지양하라고 했지만 말이야. 전술적인 판단 하에 일부만 보여주는 건 괜찮나?"
"......선만 넘지 마."
"라져."
윤아는 그 말을 뒤로하고 성민과 아처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시야 밖에서 벗어나자, 라이더는 검을 치켜들었다.
"방금 전 그 실력은 나도 놀랐소. 저잣거리나 여러 왈패들과 엮이면서 쌓은 실력이 그 정도까지 갈 줄이야."
"...댁은 상당히 날 놀래키는구만. 그 짧은 시간에 그걸 간파하셨나?"
"우리같은 서번트한테 부여되는 스킬 중엔 '무궁의 무련'이라는 게 있지. 극에 이른 무예의 단련 말이오. 그대의 움직임에서 그 스킬의 영향이 느껴지면서, 조금 더 야생에 가까운 무언가를 함께 보았을 뿐이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댁도 그 스킬 보유자라는 얘기인가?"
"글쎄. 과연 어떨런지. 직접 검을 맞대면 알 수 있지 않겠소?"
"핫, 높으신 양반이 쓸데없이 속이 시꺼멓구만 그래!"
버서커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라이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라이더가 승산이 있을까요?"
폐공장 밖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성민은 윤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래뵈도 라이더는 한국에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대영웅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보다 선배는 라이더의 진명을 알고 계셨군요."
"뭐야, 너 아직 네 서번트의 진명도 모르는 거야?"
"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물어볼 여유가 없어서..."
"하기야, 성유물을 미리 준비해서 특정 서번트의 소환을 노리는 경우가 아니면 서번트의 진명은 마스터라 해도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니까."
윤아의 말대로 성민의 서번트 소환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딱히 소환진을 그리거나 준비를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왔다는, 정상적인 성배전쟁이라면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소환되었기에 아처가 어떻게 소환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짐작가는 정체는 있었지만 단언하기에도 어려웠다.
"아처. 아직 네 진명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그랬군요. 저도 경황이 없어 주군께 제 정체를 밝힌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 정식으로 물어볼게. 아처, 당신의 진명을 말해줘."
"주군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신 아처, 진명은..."
아처가 진명을 말하려는 그 순간, 무언가를 느낀 아처는 한 곳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도 그 쪽으로 옮겨졌다.
"이거,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 설마,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 진짜 일어났을 줄은."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고 주변에 불빛은 없었지만 달빛이 제법 밝아서 상대의 모습이 어떤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오지 말라는 의미로 일부러 기척을 강하게 발산하고 있었건만, 굳이 본인의 구역에 들어온 것은 전투를 상정하고 들어온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라이더가 입고 있는 두정갑과는 다른 검은색의 갑옷을 입은 무사. 지금까지 그 근처에서 계속 느껴졌던 기척을 강하게 발산하고 있는 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세이버 서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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