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의 일 안 하는 국회.’
제20대 국회에 대해 국민은 이 같은 진단을 내렸다. 20대 국회는 정기국회 종료를 이틀 앞둔 8일까지도 민생과 경제, 국가신뢰도가 달린 법안 수백건을 묶어 놓았다. ‘정치의 실종’은 비쟁점 법안 위주로 구성된 199개 법안까지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거는 극단의 대결로 나타났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조짐이다. 당장 내년 1월부터 소득 하위 40%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 인상도 어려워질 수 있다. 남수단,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 등 해외에 나간 4개 국군부대는 파병연장 동의안이 올해 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주둔 근거가 사라져 철수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 파병 자체의 대립이 아닌 ‘정쟁의 인질’로 위기에 놓인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필리버스터에 발목 잡힌 199개 법안
지난달 29일 본회의에 오를 예정이었던 199개 법안은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 사립학교법, 학교급식법)을 제외하면 비쟁점 법안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는 많은 사람이 애타게 국회 통과를 기다려온 민생·국민안전과 직결된 법안들이 있다. 수천명이 2년 이상 임시주택과 체육관에서 생활하는 포항 이재민을 위해 각 당은 지원법을 발의했고 지난달 22일 이들의 의견이 합쳐진 ‘포항지진 진상조사 및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이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의결됐다. ‘민식이법’처럼 사망한 아이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재윤이법’ 즉 ‘환자안전법 개정안’도 국민안전과 직결된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 등 각종 성폭력 관련 법안도 여럿 포함돼 있다.
경제 살리기와 국가 신뢰도가 달린 법안도 여야 정쟁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놓였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국내 기업을 키우기 위한 ‘소재·부품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과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인 소상공인을 별도의 경제영역으로 보고 특별 지원하기 위한 ‘소상공인 기본법’도 막혔다. 한빛부대(남수단)·청해부대(소말리아)·동명부대(레바논)·아크부대(아랍에미리트) 등 4개 국군 부대도 파병연장 동의안이 연내 처리되지 않으면 현지 주둔 근거를 잃게 된다.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스위스 등과 체결한 이중과세 방지를 위한 협정 비준동의안도 국익이 달린 사안임에도 정쟁에 발목 잡혔다.
◆기초연금 인상·ASF 지원도 불확실해져
필리버스터에 걸리지 않았어도 꽉 막힌 국회 자체가 잡고 있는 시급한 법안도 수두룩하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처리를 주문한 민식이법이 대표적이다. 기초연금·장애인연금은 예정대로 내년 1월부터 인상 대상을 확대하려면 이달 내 관련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 피해를 본 양돈농가 지원을 위한 가축전염병 예방법도 방역 강화, 폐업지원, 생계안정 비용지원 확대 등 농가의 생계와 직결돼 있다. 아직 백신이 없는 데다 접경지역 야생 멧돼지에게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국가적 대처가 시급한 상황이다. 지방재정분권을 위해 지방소비세를 10%포인트 인상하고 3조6000억원 규모의 국고보조사업을 지방 일반사업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지방세법, 지방세기본법 등도 미처리 시 혼선이 불가피해진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교양학부)는 “한국당이 건 필리버스터는 국회법에 있는 규정이긴 해도 취지와 맞지 않는다. 이를 철회하고, 민주당도 한국당 의견을 더욱 수용해 정치를 복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한국당 원내대표가 바뀌는 9일을 변곡점으로 양당이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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