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역사에서 늘 무척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왜 영국에는 왜 유명한 와인이 없냐는 것이다. 영국은 엄청난 와인 소비국이다. 하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마이너다.
영국의 와인 제조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기후다. 포도재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늘 안개가 자욱하고,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춥고 하다 보니 배수도 잘 안 되고, 당도 높은 포도도 잘 생산이 안 되는 것.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다른 배경도 있다.
바로 사자왕이라고 불리는 영국 왕 리처드 1세의 영향이다. 십자군전쟁 때 워낙 많은 활약을 하다 보니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이라고 불렸다. 통치에서는 무능했으나 용감과 관용이라는 차원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영국 왕인데 영국에 오래 살지 않았다. 8살 때 프랑스로 가버린다. 즉, 프랑스어를 쓰는 왕이라는 것.
리처드 1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아키텐 영주인 ‘엘레노어르’라는 인물이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을 한 대단한 인물이다. ‘엘레노어르’ 영국 왕실로 시집가면서 혼수품으로 보르도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서남부 지역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갑자기 영국 왕실은 지배 면적이 넓어진다. 역사에서는 프랑스 서부와 영국이 하나가 되어 있었던 때를 앙주 제국이라고 부른다.
리처드 1세는 즉위 후 영국 왕실의 와인을 정하게 된다. 당시에도 영국 본토에 와인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 왕실의 와인을 프랑스 보르도 주변 와인으로 정해버린다. 엄마의 땅에서 나온 와인이었다. 리처드 1세의 정체성은 영국인보다 프랑스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실의 와인이었던 보르도는 백년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빼앗기게 되고, 이제는 국가 대 국가로 수입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영국의 보르도 와인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 이어진다.
어떻게 일국의 왕이 자국의 말을 못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백년전쟁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왕실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영국을 점령한 노르망디공국 자체가 프랑스 신하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에는 프랑스어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고급 음식, 문화, 예술, 법률 등 고급 단어는 대부분 프랑스어에서 왔다.
음식 품목으로 대표적인 단어가 소고기(beef), 돼지고기(pork)다. 각각 프랑스어인 ‘boeuf’와 ‘Porc’에서 온 말이다. 특히 ‘-ion’으로 끝나는 단어의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온 것이다. Action, Attention, Communication, informaiton 등이다.
가끔 보수적인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안 쓰려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은근히 영국을 무시한다고도 한다. 이것은 두 나라가 단순히 라이벌적인 관계가 아닌 영국의 문화와 문명 형성에 프랑스가 어마어마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와인까지도 말이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랜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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