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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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 5》
"....... 드로우!!"
지금 대희 쌤의 필드에 세트된 카드는 4장, 그리고 그 중 이미 공개된 정보인 [페이버릿 콘택트]를 제외한 3장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대량 소생을 통해 역전을 노릴 수 있는 [리볼부트 섹터]가 파괴당해서 2장 째의 [스트라이커 드래곤]으로 다시 가져와야 했는데, 지금 이 상태에서 어설프게 꺼냈다가는 세트 카드에 의해 견제를 당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방금 시현이 드로우한 카드는 [휘광룡 세이퍼트]. 이 카드와 전 턴에 패로 되돌린 [영묘의 수호자] 2장 만으로 어떻게 스트라이커를 보호할 것인가? 레벨 4인 드래곤족을 묘지로 보내고 서치할 수 닜는 몬스터.... 시현은 문득 덱의 카드 1장을 떠올리고는 카드를 재빨리 디스크의 투입구에 꽂아 넣었다.
"[휘광룡 세이퍼트]를 일반 소환하고 효과 발동! 패의 [영묘의 수호자]를 묘지로 보내고...."
세트 카드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던 건지 발동 선언 직후 대희 쌤의 디스크에 불빛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체인 기회를 넘겼다.
"...... 서치할 카드는 [휘백룡 와이버스터]. 이제 묘지의 [체크섬 드래곤]을 제외하고 이 카드를 특수소환합니다. 그 후, 와이버스터 1체로 [스트라이커 드래곤]을 링크 소환! 체인 1로 스트라이커, 체인 2로 와이버스터의 효과를 각각 발동합니다!"
시현이 체인 순서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정한 이유는 패에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하루 우라라] 등의 패트랩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라라처럼 특정 효과가 발동했을 '때' 체인하는 효과는 그 사이에 다른 효과가 끼어들면 방해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무한 포영] 같이 발동 타이밍이 자유로운 방해 수단이 있어도 대상을 지정하는 효과는 트레이서의 효과로 회피 가능했다.
"자, 여기에 체인은....?"
시현은 [무한 포영]이 2장 깔려있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없기를 속으로 기도하고는, 대희 쌤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난 함정 카드 [히어로즈 룰 1 파이브 프리덤스]를 발동! 네 묘지의 [익스플로드바렛 드래곤], [블랙홀 드래곤], [영묘의 수호자], [바렛 리차저], [토폴로직 폭탄 드래곤] 이렇게 5장을 게임에서 제외하겠어!"
대희 쌤은 묘지의 정리 정돈의 존재를 의식해서인지 굳이 자력으로 탈출 가능한 체임을 제외할 카드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일단 묘지의 카드를 제외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기에 별다른 체인을 걸지 않자, 대희 쌤이 기다렸다는듯 외치며 카드 1장을 더 발동했다.
"그럼 계속해서, 난 속공 마법 [금지된 일적]을 발동! 내 필드의 발동 중인 히어로즈 룰 1과 섀도우 미스트를 묘지로 보내고, 네 필드의 몬스터 2장의 효과를 무효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 몬스터와 함정 카드를 묘지로 보냈으니, 이 효과에 대해 몬스터, 함정의 효과는 발동할 수 없어."
"앗.....!"
일적을 바로 발동하지 않은 것은 몬스터 만을 묘지로 보냈을 때 묘지의 정리 정돈을 제외해서 효과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함정을 묘지로 보내고 발동도 가능했지만 아직 쓰지도 않은 함정을 묘지로 보내는 것은 손해이니 발동 중인 카드를 묘지로 보냈겠지.
"이걸로 스트라이커와 트레이서의 효과는 무효화되고 공격력도 절반이 돼. 그리고, 방금 섀도우 미스트가 묘지로 보내졌으니 덱에서 스피릿 오브 네오스도 가져올게."
이로서 필드 마법의 확보에 실패한 것은 물론 아직 효과를 쓰지도 않은 트레이서의 효과도 무효화되었고, [리볼부트 섹터]의 대량 소생을 노리고 일부러 발동하지 않았던 [블랙홀] 역시 이 플랜이 틀어지면서 사실상 패에서 썩는 카드가 되어버렸다. 브레이브 네오스는 묘지의 [네오스 퓨전]으로 파괴를 면할 수 있었으며, 시현이 기껏 불러낸 몬스터들도 파괴에 휩쓸리고 마니까. 더불어 [바렛 리차저]마저도 제외됨에 따라 묘지에 묻힌 몬스터들의 소생도 어려워지는 등, 점점 자원 고갈이 시현을 옥죄이기 시작했다.
"묘지의 [드래곤메이드의 정리 정돈]을 제외하고 효과 발동, 묘지에서 [드래곤메이드 체임]을 특수 소환합니다. 그리고 소환에 성공한 체임의 효과로 [드래곤메이드의 환대]를 패로 가져오고, 스트라이커, 세이퍼트, 체임 3장을 링크 마커에 세트! 나와라, 링크 3! [바렐코드 드래곤]!"
몬스터 3장을 소재로 링크 소환한 바렐코드는 전투를 실행할 때 필드의 몬스터를 전부 파괴할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되었지만, 이번엔 그 효과를 쓸 생각은 없었다. 시현이 이 카드를 꺼낸 것은 오직 수호룡 피스티의 효과를 발동하기 위한 링크 마커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계속해서, 묘지의 세이퍼트를 제외하고 [암흑룡 코라프서펜트]를 특수 소환한 후, 트레이서와 암흑룡을 소재로 [소운 바렐 드래곤]을 링크 소환! 그리고 여기에 [드래곤메이드의 환대]의 효과로 소생한 체임을 소재로 [수호룡 피스티]도 링크 소환합니다!"
피스티와 소운 바렐 2장의 링크 마커가 같은 몬스터 존을 가리키자 피스티의 가슴에 달린 붉은 수정이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수호룡 피스티]의 효과 발동! 2개 이상의 링크 마커가 가리키는 매인 몬스터존에 드래곤족 몬스터를 소생시킵니다!"
이 효과로 제외된 듀얼윌을 소생시켜서 F 드래곤까지 이어서....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익스플로드바렛을 불러내서 (1)번 효과를 격발시키면 배틀 페이즈를 거칠 필요도 없이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이걸로 제외 상태인 익스플로드바렛을....."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피스티 옆의 메인 몬스터 존은 텅 비어있었다. 세트되어 있는 카드를 발동한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어 듀얼 디스크의 화면을 확인한 순간, 대희 쌤의 효과가 체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패'에서 말이다.
"상대 필드의 몬스터 효과가 발동했을 때, 패의 [유령 토끼]를 버리고 효과 발동! 그 상대 몬스터를 파괴한다! 피스티가 필드에서 벗어났으니, 소생 효과도 불발이야."
시현도 모르는 사이에 피스티의 가슴에 붙은 노란 부적이 폭발하면서 피스티가 있던 자리엔 붉은 수정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겨졌고, 그것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모습이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그, 그럼.... 소운 바렐의 효과를 발동, 패 1장을 버리고 바렐코드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이 효과로 링크 몬스터를 파괴했으니, 묘지의 바렛 3장을 소생!"
시현이 불러낸 3장의 몬스터 중에는 아직 효과를 쓰지 않은 트레이서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패를 다 쓰고 필드에 몬스터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선 효과를 써봤자 개체 수를 늘릴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소운 바렐의 효과를 쓴 후에는 링크 2 이하의 몬스터를 엑스트라 덱에서 특수소환할 수 없어 지금 이 상황에서 뽑을 수 있는 링크 몬스터는 바렐로드 뿐. 그러나 바렐로드로 탄환을 격발하든, (3)번 효과로 컨트롤을 탈취하든 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희 쌤의 턴이 돌아오면 패가 1장도 없고 다른 후속도 준비되지 않은 시현의 패배가 확정된다.
".....전 소운 바렐, 트레이서, 아네스바렛을 링크 마커에 세트!"
그래도 일단 듀얼을 시작한 이상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턴을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패배가 확정되어 있더라도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는게 이 듀얼에서 나온 에너지를 먹게 될 라이고우에게도, 그리고 지금 대련 중인 선생님에게도 예의일 테니까. 그렇게 바렐로드라고 생각한 카드를 엑스트라 덱에서 꺼낸 그때였다.
"나와라, 링크 4! 바렐로드..... 어?!"
시현이 엑스트라 덱에서 뽑은 링크 4 몬스터는 바렐로드가 아닌, 분명 엑스트라 덱에 넣지 않았을 바렐스워드였다. 시현은 설마 싶어서 엑스트라 덱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여, 바렐로드는 엑스트라 덱에 들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이 카드를 언제 넣었지? 오늘 학원에 오는 길에 잠깐 카드를 꺼내서 확인하는 중 비슷하게 생긴 두 카드를 헷갈려 잘못 넣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시현은 분명 바렐스워드를 덱 케이스 내부에 따로 넣어놓은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절대 그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걸 지금 되짚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렐스워드 말고는 더이상 꺼낼 링크 몬스터가 없는 시현은 이대로 허무하게 턴을 마쳐야 했다.
"저는 이제.... 턴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뒤로 한 채, 꺼낸 카드를 다시 집어넣었다...... 아니, 집어 넣어야 하는데..... 누군가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억지로 팔에 힘을 주고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는 것은 시현의 팔에서 튀어나온 힘줄 뿐. 게다가 이상현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젠 카드에서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이전에도 듀얼에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종종 이렇게 환각 혹은 환청을 보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예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어서 카드를 다시 집어넣으려 했지만, 바렐스워드가 그려진 카드를 한 번 보고 나니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면 볼 수록 점점 정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어지러움에 시현은 고개를 떨군 채 눈이 감겼다.
"시현아, 너 먼저 도망쳐. 너라도 살아남아야 해....."
꼭 꿈 속에서 들은 것처럼 소리가 중간에 몇 번씩 끊키기는 했지만, 이건 시현의 꿈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누나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눈을 뜨자 과연 예상대로 시현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의 팔은 떨리며 점점 카드가 듀얼디스크에 가까워졌다.
"저기 꼬맹이가 도망간다!"
"기껏 덱까지 들고서는 듀얼도 못하는 이 겁쟁이 녀석! 저 녀석부터 쫓아갈까?"
"일단 뭣도 모르고 우리에게 도전한 저 계집애부터 듀얼로 순살시켜주마!"
이번엔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의 비웃는 목소리와 함께, 회색빛 몸에 각자마다 다른 색의 갑옷을 입은 악마 형태의 정령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전에 자신에게 도망가라고 했던 누나를 에워싸고 하나 같이 듀얼디스크를 팔에 차고 있었다.
"미안해, 끝까지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분명 눈 앞에 보이는 이 광경은 진짜가 아니다. 그냥 마음 속 불안이 만들어낸 상상일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시현의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아무리 몸을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어도 누나의 모습은 저 괴물들의 그림자와 뒤섞여가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넌 어서 가서....."
잠깐, 잠깐만 기다려 누나. 나야말로 정말 미안해. 난 엄마 아빠가 죽고 누나가 이런 처지에 놓이는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짐 덩어리였는데, 이제 누나마저 내 곁을 떠나면 온세상이 나를 탓하는 것 같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제발, 날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줘.
왜 대답이 없는 거야? ...... 그래, 사실 우리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겪은 게 다 현실이 아니라 지독한 악몽인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그렇지 않고선 내가 제일 사랑하는 가족이 이렇게 떠나갈 리가 없잖아. 누나, 그렇게 입 꽉 다물고 있지 말고 뭐라도 말해 봐!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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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까지 매정하게 나오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 설령 내 눈 앞에 보이는 누나의 모습이 가짜일지라도, 난 다시 누나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눈 앞의 상대를 쳐부셔야만 할 지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시현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꼭 이겨야 한다고 너무 부담가질 필요 없어. 그냥 턴 넘겨도 괜찮으니까...."
제한 시간이 1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현이 턴 엔드를 선언하다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쓰러질듯 말듯한 몸으로 서있자 대희 쌤이 걱정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희 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턴을 종료하지 않고 그대로 메인 페이즈 1, 몬스터 3장을 소재로.... 나와라 링크 4! 닫힌 세계를 베어가르는 열풍, [바렐스워드 드래곤]!!"
링크 마커 4개가 붉게 물든 서킷이 산산조각나면서, 그 안에서 튀어나온 바렐스워드는 시현의 간절한 투지에 부응하듯 격렬히 포효하며 입에서 총열을 전개했다.
"저 몬스터는...."
대희 쌤도 여유롭던 이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물론 '저게 뭐지?' 같은 당황한 반응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서, 바렐스워드가 처음 보는 몬스터라서 경계하는 건지 아니면 이마저도 예상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렐스워드의 효과로 오토바렛을 대상으로 지정하고, 오토바렛의 효과를 발동! 이 카드를 파괴하고, 상대 필드의 마법/함정 1장을 묘지로!"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기서 바렐스워드의 효과로 상대 몬스터의 공격력을 흡수하고 전투 데미지를 주면 그대로 게임을 닫을 수 있었다. 아직 남은 세트 카드가 걸리긴 했지만 일단 2장 중 하나는 [페이버릿 콘택트]임이 확실하고, 나머지 하나는 불명이지만 있으면 진작에 썼을 무효화 계열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여기에 체인해서 [페이버릿 콘택트]를 발동해도 오토바렛의 효과는 대상을 지정하지 않으니 나머지 카드 1장을 묘지로 보내면 그만.
"...... 체인은 따로 없어."
그 말을 듣자 바렐스워드의 가슴에 달린 실린더에 오토바렛이 장전되었고, 묵직한 포격음과 함께 발사된 탄환이 세트 카드 1장을 꿰뚫었다. 묘지로 보내진 카드는.... [페이버릿 콘택트]. 나머지 1장은 결국 끝까지 드러나지 않아 조금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패도, 엑스트라 덱도 다 써버린 시현에겐 이 턴 게임을 닫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여기서 공격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배틀!"
배틀 페이즈에 돌입하자 바렐스워드의 머리에 달린 두 쌍의 칼날이 하나로 합쳐졌다. 공격선언도 하기 전부터 바렐스워드는 브레이브 네오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바렐스워드로 브레이브 네오스를 공격! 이 순간, 바렐스워드의 효과에 의해 상대 몬스터의 공격력 절반을 흡수!"
{바렐스워드 ATK: 3000-> 4700 브레이브 네오스 ATK: 3400-> 1700}
공격선언과 함께 바렐스워드는 브레이브 네오스를 노린 총탄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돌진했다. 도중에 공격 선언에 반응한 '스피릿 오브 네오스'가 공격을 온몸으로 가로막았지만, 바렐스워드의 칼날은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여 대희 쌤이 서 있던 바닥에 깊숙히 꽂혔다.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다가갔으면 대희 쌤이 그대로 베일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바닥에 박힌 칼날을 뽑기 위해 몸을 뒤흔들며 발악하는 바렐스워드와 일체가 되기라도 한 듯, 시현은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을 목청이 터져나갈 듯한 목소리로 공격을 다시 선언했다. 칼날을 빼낸 바렐스워드의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은, 브레이브 네오스 뒤에 서있는 대희 쌤에 꽂혀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로 몬스터를 공격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플레이어까지 같이 휘말리게 할 작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현은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지금 시현은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이긴다, 쓰러뜨린다는 충동에 빠져 있었다.
"가라, 바렐스워드 드래곤....! 브레이브 네오스를 계속해서 공격!!"
그러나 시현은 여기서 또 한 번의 실수를 한 셈이 되었다. 리버스 카드가 열리기 직전에서야 대희 쌤의 표정을 본 것이었다. 시현이 그 표정을 봤을 때, 시현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금빛으로 변하며 이전까지는 본 적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의 심정은 마치 시현 본인이 만화 주인공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악역의 입장이 된 것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마지막 리버스 카드를 발동하겠다!
함정 카드 [영혼의 결속-소울 유니온]! 브레이브 네오스의 공격력을 묘지의 엘리멘틀 히어로 1체의 공격력만큼 올리지. 난 브레이브 네오스에게, 묘지의 [엘리멘틀 히어로 네오스]의 힘을 더하겠어!"
{브레이브 네오스 ATK: 1700-> 4200}
아직 브레이브 네오스의 공격력은 바렐스워드에 비해 낮았지만,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오면서 대희 쌤의 라이프를 전부 깎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갑작스럽게 묘지의 에어맨과 섀도우 미스트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 묘지에 일반 몬스터인 네오스가 존재하니, 추가로 묘지의 몬스터를 소재로서 제외해서 엘리멘틀 히어로를 융합 소환할 수 있어. 에어맨과 섀도우 미스트를 제외하고, 나와라! [엘리멘틀 히어로 Great TORNADO]!
이 카드가 융합 소환에 성공한 것으로, 상대 필드의 몬스터 공격력은 절반이 된다! 다운 버스트!!"
Great TORNADO가 바렐스워드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강풍이 시현의 필드를 덮쳤다. 돌진하던 바렐스워드 역시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해 반대로 밀려났고, 앞쪽을 향해 꼿꼿이 세워져 있던 칼날은 양 갈래로 휘어져버렸다.
{바렐스워드 ATK: 4700-> 2350}
"그래도.... 몬스터가 새로 소환되었으니 리플레이가...."
"아니, 이 효과는 데미지 스텝 도중에 발동했으니 리플레이는 일어나지 않아. 따라서 넌 브레이브 네오스를 향한 공격을 번복할 수 없어. 자, 반격해라 네오스!!"
그 말과 동시에 공격을 받은 브레이브 네오스가 역으로 바렐스워드를 향해 달려와 그를 붙잡고는, 투포환 선수처럼 그 상태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르게 돌던지 둘의 모습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아 회전하는 모습이 흰색과 붉은 색이 서로 뒤섞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던 중 예고도 없이 브레이브 네오스가 바렐스워드를 손에서 놓은 후 바렐스워드가 시현 쪽으로 날아오자, 시현은 양쪽 귀를 막고 몸을 엎드려 피하려 했다.
{유시현 LP 4600-> 2950}
잠깐, 왜 엎드리면서 갑자기 귀를 막은 거지? 시현 본인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문득 전에 해본 적이 있는 자세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 교실 내에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화재 경보인가? 아니, 갑자기 여기 불이 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화재 경보 사이렌과는 소리가 달랐다. 아주 천천히 음이 높아졌다가 다시 아주 천천히 낮아지는 소리였는데, 그때 머릿 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공습경보 재난 방송'. 그렇다는 말은....
"악.....!"
시현은 찰나의 순간에 들린 미세한 폭발음 이후 갑작스럽게 느껴진, 귓속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귀를 부여잡고 몸을 엎드렸다. 잠깐 귓속에 울려퍼진 삐- 소리 후, 주변의 소리 뿐만 아니라 시현 자신이 낸 목소리도 목에 공기가 울리는 감각만 느껴질 뿐 직접 들리지 않았다.
"저는.... 턴.... 엔드....."
시현은 (비록 썼더라도 승패를 뒤집지는 못하겠지만) 묘지의 오토바렛의 유언 효과를 쓰지도 않은 채 턴을 넘겼다. 지금은 도저히 듀얼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였다. 그저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시현 LP 2950, 패 0장 준대희 LP 1875, 패 2장 }
《TURN 6》
드로우 페이즈, 대희 쌤이 드로우를 외치며 카드를 뽑았을 테지만 바렐스워드가 벽에 충돌한 후 귀에 뭐라도 들어간 건지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후엔 스피릿 오브 네오스가 덱으로 되돌아간 후 [엘리멘틀 히어로 네오스]가 소환되었고, 묘지의 [히어로즈 룰1 파이브 프리덤스]를 제외되면서 제외 상태인 에어맨도 복귀했다.
소환에 성공한 에어맨의 효과로 가지고 온 몬스터는 히어로의 공격력을 2500이나 올리는 [엘리멘틀 히어로 어니스티 네오스].
시현의 필드에 선 바렐스워드의 눈빛은 여전히 레이저 포인터처럼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Great TORNADO의 효과로 인해 공격력이 영구적으로 감소된 상태라는 것을 반영하듯, 눈빛과 대조적으로 몸 여기저기가 찌그러진 고물 깡통처럼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어느덧 듀얼디스크의 화면이 배틀 페이즈로 넘어가고, 바렐스워드의 효과로 몬스터를 수비 표시로 바꿀 수 있는데도 쓰지 않자, 그를 향해 달려오던 네오스는 등에서 흰 깃털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 이후에는.... 결과는 뻔했다. 바렐스워드가 네오스의 주먹에 의해 짓눌려 생긴 금이 간 부분들이 눈부시게 빛나며 섬광이 순식간에 온 필드를 덮쳤다.
결국, 처음에 기대되었던 이 듀얼은 시현에게나 바렐스워드에게나 악몽처럼 끝이 나고 말았다.
{유시현 LP 2950-> 0 듀얼 종료}
듀얼이 끝나고 교실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잔해들이 솔리드 비전의 작동 종료와 함께 사라지고 난 뒤, 시현의 머릿속에는 약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환상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듀얼에 소모한 체력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인해 바닥에 쓰러진 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선생님은 '좋은 듀얼이었어!'와 같은 말은 커녕 일으켜세워주는 일도 없이 쓰러진 시현을 지켜보기만 하다, 묵묵히 교실 문을 나서서 쌩 가버릴 뿐이였다. 나가기 전에 입 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을 보긴 했지만 아직 듀얼 중에 받은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왜 대희 쌤은 평소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자신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뭘까. 시현이 가진 몬스터 중 최고의 전투 능력을 가진 바렐스워드를 가지고도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완패해서? 아니면.... 바렐스워드를 사용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듀얼에서 졌다는 좌절감보다도 앞으로 대희 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불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시현은 듀얼디스크의 꺼진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바닥에서 여러번 굴러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몸을 계속 찔러대는 카드 1장의 모습이 비친 것을 보고 옆을 내려다보았다. 라이고우가 대희 쌤이 나간 틈을 타 덱 케이스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라이고우....?"
-"시현! 조금 전부터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고 있었는데, 넌 안 들렸어? 대체 듀얼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이고우의 말에 의하면, 시현이 갑자기 바렐스워드를 꺼내자 어떻게 된 일이냐고 계속 물어봤지만 대답하기는 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무슨 헛것이라도 봤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숙인 채 벌벌 떨기까지 했다고....? 환상을 봤을 때 했던 행동은 머릿 속 망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말해 봐, 대체 뭘 봤길래 평소 너답지 않게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긴장해서...."
시현은 자신이 듀얼 중 본 광경을 말히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전쟁'이나 '누나' 같은 단어만 떠올려도,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와 폭격음이 귀를 메워서 겨우 괜찮아지나 싶었던 두통이 다시 심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듀얼에서 궁지에 몰리거나 류와의 첫 듀얼에서 질 때도 이 정도로 공포에 질린 표정은 본 적 없어! 네가 뭐가 힘든지 얘기를 해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니깐! 날 좀 내버려 둬!!"
시현은 가뜩이나 듀얼 후에 남은 후유증때문에 정신이 피로한데 머릿속이 지끈거리게 만드는 텔레파시까지 할 여유가 없어, 순간 욱하는 마음에 호통을 쳤다. 아,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은 왜 항상 일을 저지른 후에나 드는 것일까.
-"미안..... 난 지금 너무 예민해져서.... 조금만 쉬어야 겠어...."
-"...... 그래, 알았다."
라이고우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텔레파시를 더 보내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왜 자신을 걱정하는 라이고우에게 호통을 쳤는지 후회감이 들었다.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본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일 텐데, 성질을 내며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으니....
지금이라도 라이고우에게 사과할까 생각해봤지만 몸도 마음도 모두 상한 이 상태에선 이성적인 대화가 힘들 것 같아서, 일단 한동안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는 법이니까. 차라리 소리도 안 들리겠다 한숨 자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정신 상태에선 꿈을 꿔도 악몽을 꿀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선생님이 오거나 몸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최대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물론 쏟아지는 졸음도 견뎌야 하기에 '안정'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조금 웃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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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것도 하지는 않은 채 잠은 들지 않으려고 그저 조용히 눈만 뜨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순간, 갑자기 귀가 뻥 뚫리더니 하나도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멀쩡히 들리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돌아온게 아니라 스위치를 누르는 것처럼 한 번에.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들린 것은 옆교실에서 아이들이 웃고 울고 떠드는 소리였는데, 아마도 시현처럼 선생님한테 듀얼로 제대로 박살나서 분위기가 아수라장이 된 모양이다.
그동안 얼마나 멍 때리고 있었는지 확인하러 시계를 보니, 시계바늘의 시침이 부지런히 움직여 가리키는 숫자가 5에서 7로 껑충 뛴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선생님은 그 시간동안 여태껏 시현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단 소리인가?
혹시 선생님이 자신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어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교실의 문틈을 였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선생님이 없었다. 시현은 조심스레 또다른 교실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혹시 여기 계시려나.... 일단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한 것을 보니 심사는 이미 끝이 난 모양인 것 같아,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밀려고 했는데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문 뒤쪽에서 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현아! 잠깐 문에서 손 좀 놓아줄래?"
"아.....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실은 시현이에게 또 부탁해야하는게 있어서 말이지. 그게, 콘마이가 나한테 그러는 것처럼 자꾸 여기저기 불러내서 미안하지만 나와 또 가야하는 곳이 있어. 혹시 오늘 저녁에 따로 나가야 할 곳이 있니? 아니면 부모님이 일찍 오라고 하셔?"
"아뇨, 딱히....."
"그럼 선생님 차 타고 같이 갔다 오자. 생각보다 금방 안 걸려."
"어디를요.....?"
그러자 대희 쌤은 시현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며 말했다.
"실은 며칠 전이랑 어제였나? 회사에서 제작된 적 없는 카드가 등록된 일 때문에 좀 사내에서 말이 있었는데 그게 전부 시현이 계정을 쓰는 듀얼디스크에서 사용된 거라서 콘마이에서 널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
그 말을 들은 시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결국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인가.... 선생님이 손을 잡고 데려가자 시현은 꼭 연행되어 가는 죄수라도 된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대희씨,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그리고 시현이는 왜..."
"아, 시현이가 저랑 듀얼하고 나니 너무 출출하다길래,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요. 장기 씨가 시현이의 실력을 눈여겨 보시길래 저도 실력이 궁금했었는데, 역시 괜히 주목한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시현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는 대희 쌤의 모습은, 마치 자식들한테 포경수술을 시키기 위해 돈까스 먹으러 가자고 꼬드겼던 부모님만 같았다. 말하는 억양을 봤을 땐 일단 듀얼 후반부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서 다시 평소처럼 돌아오긴 했는데, 이게 화가 풀린 건지 아니면 장기 쌤 앞이라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공인되지 않은 카드를 써서 화가 난 거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한 마디하지.... 시현은 그의 속내를 도저히 알 수 없어 속이 터졌다.
학원에서 콘마이 본사까지의 거리는 차로 약 30분. 하지만 시간대가 딱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이라 평소보다 차가 많이 밀렸다. 차창을 보며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시현은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지만, 여기서 또 잠을 자면 듀얼에서처럼 이상한 기억을 보게 될 까봐 함부로 그럴 수 없었다.
"자, 이제 다 도착했다! 내리자, 시현아!"
시현이 왜 시작한지 본인도 모를 자신과의 싸움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선생님의 차가 드디어 완전히 멈춰섰다. 그리고 차 문을 열자 시현의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고층 빌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 같은 곳에서도 보긴 했는데 실물로 보니 압도당할 정도로 거대하구나....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풍경 속에서도 빌딩 윗쪽에서 'KONMAI'라는 글자가 홀로그램으로 화려하게 빛나며 존재감을 뽐내는 모습을 보니, 꼭 딴세상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문제는 없는 거지?"
-"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일단 난 밖에서 따로 기다리고 있을게. 회사 내부엔 보안 검색대가 있어서 나 같은 미등록 정령은 거기 못 들어가. 나중에 회사 밖으로 다시 나오면 내게 알려줘."
시현은 입구 앞에서 조용히 카드 형태로 빠져나간 라이고우를 뒤로 한 채 회사 안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양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가득 채웠다. 시간대를 고려하면 아마 대부분 퇴근하는 사람들일 것 같았다. 그리고 중앙 로비 뿐만 아니라 그 주위를 둘러싼 윗층의 통로에도 회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깊은 개미굴을 거대화시켜 놓은 듯한 장관이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경험에 좀더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계속 위쪽에 시선이 끌리는 바람에 목에 담이 올 정도로 건물 내부는 밖에서 볼 때보다 상상이상으로 높아서, 시현은 더이상 고개를 들지 못한채 조용히 바닥의 대리석 무늬만 보면서 걸어야만 했다.
"또 오셨군요, 준대희 씨. 이젠 슬슬 지치시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회사에서 자주 불러오는 것 같네요."
"아, 네. 이번엔 대회 건은 아니고 다른 일 때문에 와서 금방 끝날 거긴 한데, 저도 이제 대회가 무사히 끝나서 다시 평범한 선생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익숙하다는듯 보안 검색대의 요원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면 아마 선생님은 여기에 자주 들른 모양이다. 금속 탐지기처럼 생긴 막대가 시현과 선생님의 몸을 휘저은 후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자, OK 사인을 받은 후 계속 앞으로 전진하니 투명한 엘레베이터가 두 사람을 반겼다. 과연 이 건물의 몇 층이나 올라가게 될까 궁금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엘레베이터가 밑으로 꺼지며 시현의 심장도 같이 철렁했다. 그들이 간 곳은 사람 대부분이 들르는 지상이 아닌, 정령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실험실이 자리잡은 지하였던 것이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준대희 씨. 옆에 있는 아이가 유시현 맞죠?"
"네, 그렇습니다."
연구소 내부는 실험실하면 아이들이 보통 상상할, 시험관에 담긴 정체불명의 액체 따위로 어지럽힌 그런 풍경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곳의 사람들 역시 매드사이언티스트나 폭탄 머리같은 괴짜스러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차분한 분위기를 주는 흰색 벽들과,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따뜻한 공기 덕에 꼭 새 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일단 여기 앉아주세요."
연구원은 시현을 의자에 앉힌 후 책상에 있던 모니터를 시현이 바라볼 수 있게 돌렸다. 그 화면엔 계정을 생성할 때 사용한, 시현의 이름과 각종 인적 사항이 적혀있었다.
"설마 아닐 리는 없겠지만, 확인 차원에서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유시현'이라는 아이디로 등록된 계정이 본인 계정이 맞으신가요?"
"네....."
"그리고 이 두 카드들도 본인이 사용해서 등록하신게 맞고요?"
모니터엔 시현이 새로 등록된 몬스터 2장, 바렐스워드와 투리스바에나의 등록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 그게.... 저도 어떻게 한 건지는 잘 몰라요. 엑스트라 덱에 있지도 않았던 카드가 듀얼 중에 갑자기 나와서 순간 저도 모르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혼내려고 듀얼리스트 분을 여기까지 부른게 아니니까요. 그저 편안히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대답하는 시현의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안절부절 못한 것을 보기라도 한 건지, 조금 전까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쏘아붙이던 연구원의 말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꼭 세 살 배기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알려주겠다는 말투였다. 아무리 소심하고 겁먹은 모습을 보여줬다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보였단 말인가.... 혼내지 않는단 말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민망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왜 저희 회사가 유시현 님을 불렀는지부터 설명드려야 겠군요.
저희들이 새로운 몬스터들을 만드는 방식은 '정령의 진화'라는 현상입니다."
"정령의 진화라고요....?"
"네, 이건 일단 저희가 임시로 붙인 명칭이고, 원리를 아직 정확하게는 알아내진 못했지만, 일정량 이상의 듀얼 에너지와 실제 듀얼을 통해 축적된 기억이 이 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 정도까지는 알아냈습니다."
'정령의 진화'. 전에 라이고우가 말했던 용어이기도 하다. 일단 그의 말로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어서 얻은 정보라곤 하는데, 모종의 이유로 자주 자리를 비우는 그의 행동으로 봐선 혹시 라이고우가 콘마이에서 보낸 정령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떠돌이라고 말한 건 거짓말이고 시현처럼 에너지를 많이 내뿜는 듀얼리스트를 찾기 위해서 보냈다든지.... 물론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했다.
"이 현상을 이곳 연구소에선 실험에 자원한 정령들을 대상으로 반복적인 듀얼을 해 이 현상을 인위적으로 일으키려고 했죠. 하지만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듀얼에서 생성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듀얼 에너지를 주입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한 기술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아 '정령의 진화'를 이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한 해동안 출시되는 신규 카드의 수도 상당히 한정되어 있고요."
연구원은 말을 잇던 중 모니터의 화면을 전환하고는 들고 있던 펜으로 그것을 탁탁 치며 강조했다. 그 화면엔 일반적인 듀얼리스트와 시현의, 듀얼 도중 발생한 듀얼 에너지의 양을 비교한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시현의 막대 그래프가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길게 그려진 것을 봐선 무슨 말을 할 지는 짐작이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시현 님의 손을 거치고 나니 불과 며칠 만에 [바렐스워드 드래곤]과 [토폴로직 투리스바에나]라는 카드가 탄생했죠. 처음에는 단순 오류이거나 부정 툴 사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일단 지켜보기로 결정했지만, 2번부터는 우연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정밀한 조사를 다시 해본 결과 데이터 내에 어떤 악의적인 조작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바로 유시현 씨가 인간의 듀얼에너지 수준을 뛰어넘는 특이체질이라는 것이죠."
"특이체질이요....?"
"듀얼리스트들마다 기질의 편차가 존재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듀얼에너지를 더 많이 내뿜는 사람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준대희 씨도 선천적인 건지 아니면 대회에서 활동한 경험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너지 수준이 일반인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고요. 그런데.... 유시현 님은 그 정도가 웬만한 인간들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라, 사실상 인간의 몸을 가진 정령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이런 경우는 저희들도 처음이라, 어쩌면 시현 님이 듀얼을 가속시킬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원은 말을 하다 말고 쓰고 있던 안경을 잠깐 벗은 후 눈을 비볐다. 시선을 모니터에 두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저 연구원의 눈가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있는 것을 봐선 이 연구에 얼마나 매달려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간단한 신체검사에 협조해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이건 유시현 님의 체질이 정령의 진화와 어떤 부분에서,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알기 위함이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신체를 해부하거나 전기충격 따위를 가하는 미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검사는 간단하고 신속하게 끝낼 테니, 일단 우선은 몸에 있는 혈액을 약간만 채취하겠습니다. 살짝 따끔할 텐데, 그냥 병원에서 예방접종 맞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연구원이 시현의 엄지손가락에 볼펜처럼 생긴 기다란 장치를 갖다댄 뒤 버튼을 누르자 딸깍, 소리와 함께 뾰족한 축이 튀어나와 손가락을 찔렀다. 피를 뽑는다는 말에 순간 섬뜩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고 연구원 말처럼 주사 맞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가벼운 고통이었다.
그 뒤로는 신체 내부에 어떤 물질 같은 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같이 생긴 장치로 촬영하고, 평상 시와 듀얼할 때의 혈압을 각각 측정하고 (실제로 듀얼을 시키지는 않았고 모니터를 통해 가상 듀얼을 시켰다), 기타 특수한 지병 같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는 등의.... 말이 검사지 그냥 건강검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익숙한 과정들이 이어졌다. 연구원이 검사에 쓰인 여러 병원용 장비들은 실험에 참여한 정령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이곳이 연구실이 아니라 병원이라고 착각할 뻔할 정도였다.
"자, 이걸로 신체검사는 모두 끝났고,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앞으로 시현 씨가 듀얼을 자주 하면서 가능하면 많은 수의 카드들을 만들어주었으면 합니다."
이 말이 끝난 후 몇 초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일단 따로 혼을 내지는 않는다곤 했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카드가 아니니 카드를 회수하는 등의 조치 정도는 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앞으로 사현이 만든 카드들을 실제로 쓸 수 있게 해주겠다며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시현 씨가 저희 연구실에서 듀얼을 반복해서 얻은 에너지와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정령의 진화를 시도해보는 것이지만, 학생이라는 신분 특성 상 매번 실험을 위해 일일이 이곳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 번거롭죠. 그래서 시현 씨가 듀얼을 통해 새로 생긴 카드를 저희들에게 빨리 보고해주시면, 그 카드들을 곧바로 생산 가능한 상태가 되도록 빠르게 분석해서, 나중에 실제로 발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미 만들어진 카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도 계속 써도 되는 건가요?"
"어.... 새 카드를 쓰고 싶은 마음은 저도 알지만, 일단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선 새로 만들어진 카드는 실제로 발매되기 전까지는 사용하지 않고 따로 보관해두는 것이 안전해 보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오늘처럼 실수나 호기심 등으로 인해 실제 듀얼에서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이 카드들을 발견해서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최근에 새로 출시된 카드라고 알려주세요. 그래도 믿지 않으면 저희 회사 측에 직접 문의해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 경우엔 회사에서 알아서 해결할테니......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입니다."
연구원은 카드 1장을 꺼내 시현에게 건냈다. [바렛 코더]라는 카드였는데, 이것은 특이하게도 바렛 몬스터지만 종족이 드래곤이 아닌 사이버스였다. 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어느 듀얼 애니에 나온 주연들이 쓴 두 종족의 몬스터를 융합시켜 만들어낸 카드라고 한다.
"이 카드는 몇 개월 전에 실험을 통해 생성되어서 최근에 발매된 카드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가 썩 좋지 못한 탓에 바렛이나 바렐 관련 카드 중 최근에 만든게 이것 1장 뿐이었는데, 이제 유시현 님의 몸에서 나온 듀얼 에너지를 활용해서 더 많은 카드들을 만들 수 있게 될 겁니다. 저희는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어서 좋고, 듀얼리스트 분은 새 카드를 통해 자신 덱을 강화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셈이죠.
......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음.....? 이게 진짜 끝이라고? 무슨 심문이라도 당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듀얼을 마음껏 해주라는 말에 시현은 의자에서 일어나고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서있다가, 다른 곳에서 회사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대희 쌤이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고나서야 겨우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참 기분이 묘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선생님의 말대로 회사에서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까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더 의외인 것은 공인되지 않은 카드를 썼는데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오히려 시현에게 자기 능력을 이용해서, 대회 개최 전까지 최대한 새 카드를 더 많이 만들어주라는 말까지 했다. 만약 평소대로라면 사용하지 못해 아쉬웠던 새 카드들을 쓸 수 있어 좋아했겠지만, 오늘 한 듀얼의 모습을 생각하면 잘못을 했는데 칭찬을 들은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어 오히려 맘 놓고 편히 사용하기가 껄끄러웠다.
지하에 주차되어 있던 선생님의 다시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려는 순간, 회사로 가는 도중엔 말 한 마디 없던 대희 쌤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시현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니?
"네?"
"학원에서 나올 때 장기 씨에게 너 밥 사주러 나간다고 말했잖아. 실은 콘마이에서 오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라고 하길래 어떻게든 둘러대려고 한 말이긴 하지만, 그냥 학원으로 돌아와버리면 시현이가 섭섭해할까봐."
"아.... 전 그렇게 배 안 고파요, 그래서 괜찮-"
-꼬르륵-. 시현의 뱃속에 든 자명종이 울려퍼졌다.
"에이, 네 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아? 안 그래도 듀얼한 후라 힘을 많이 썼을 텐데, 한창 성장기일 때라 많이 먹어줘야 돼. "
여태껏 듀얼한 후엔 배고프기는 커녕 하루에 다섯 끼라도 먹은 것처럼 배불렀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렇지 않았다. 듀얼에서 져서 그런가? 아니면 듀얼 후에 남은 후유증 때문에?
"그럼 저는....."
그렇게 선생님이 시현과 향한 곳은 '헝그리 버거'라는 이름의 패스트 푸드점. 햄버거를 좋아하냐는 선생님의 말엔 '네'하는 짧은 말로 대답했다. 사실 시현 자신보다도 누나가 좋아했던 음식이라, 누나의 생일 혹은 듀얼 대회 4강 진출 같은 특별한 날마다 가족들이 살아있을 적에 자주 온 프랜차이즈라서 고른 곳이었다. 하지만 뒷사연을 털어놓게 된다면 음료로 콜라 대신 눈물을 마실 것 같아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 그런지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을 받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점원에게 직접 말을 걸지도 못할 정도로 소심해서 주문은 늘 부모님이 다 하주셨는데.... 그래서 메뉴 고르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지만, 일단 버거와 중간 사이즈 콜라로 이루어진 간단한 1인 메뉴를 고르는 데에 성공했다.
이어서 선생님이 메뉴를 고를 차례가 오자, 추천 메뉴 중에 2인 세트 메뉴가 있길래 차라리 그걸 시키는 건 어떤지 물어보려던 찰나.... 선생님은 딸랑 아이스 커피 1잔만 고른 채 바로 결제 화면으로 넘어갔다.
"선생님은 더 안 드세요?"
"아, 나는 별로 배가 안 고파서. 시현이가 맛있게 먹는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거든."
시현과 선생님의 주문 번호인 573이 벽 구석에 달린 모니터에 뜨자 선생님이 음식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 직접 테이블까지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시현은 포장지 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따끈따끈하고 구수한 냄새를 맡고도 선뜻 햄버거를 입에 물고 싶지 않았다. 정말 여기서 편안하게 식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선생님을 해칠 뻔한 주제에 밥까지 얻어 먹는 건 염치없는 짓이.....
아니다, 일단 지금은 먹는 것만 생각해야 겠다. 어차피 전쟁 이후 시현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일상이고,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커녕 더 심해질 운명이라 차라리 배라도 든든하게 채우는게 비교적 덜 힘든 편에 속하니까.
시현은 정말로 먹는 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단 한순간도 공상 속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치 기계가 매뉴얼에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시기를 번갈아 가며 빠르게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도중에 속이 부글거리고 목이 메여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만은 슬픔이 끼어들 자리 따위는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햄버거의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어 한 입에 쏙 들어갈 크기까지 줄어들자 조용히 빨대를 입에 물고 아이스 커피를 홀짝이던 대희 쌤이 말을 꺼냈다.
"시현아, 혹시 요즘에 무슨 힘든 일 없니?"
"힘든 일이요....?"
"음, 그러니까 가족이든, 학교나 학원 안이든 시현이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나 싶어서."
저 질문은 틀림없이 오늘 듀얼 중 있었던 일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장기 쌤과는 달리 시현이 가이아 출신의 전쟁 고아란 사실은 모르는 것 같기도 한데.... 나중에면 모를까 적어도 이 자리에선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듀얼 중에 보여준 민망한 행동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순간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지긋지긋한 '피해자 프레임'을 쓰게 되고, 듀얼하는 상대를 감정의 쓰레기통 정도로 쓴다는 인식이 꽂혀버리게 될 테니까. 이미 학교에서 당해본 현상이라 잘 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괜찮다고 대답하고 스스로를 속여야만 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폭주하는 무서운 놈 취급보다는, 그냥 듀얼에 심취해서 성질 부린 우스운 놈 취급이 차라리 나으니까.
"전..... 괜찮아요."
"정말이니? 누가 괴롭히거나 하는 일도 없고? 뭐라도 괜찮으니깐 선생님 앞에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전 멀쩡해요, 그냥.... 제가 평소에 승부욕이 강해서 오버한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혹여나 나중에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선생님에게 꼭 말해줘."
그러나 다행이라는 말과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선생님의 연민의 감정이 담긴 슬픈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시현의 망상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대희 쌤은 시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면전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지도 모른다.
식사를 끝낸 후 시현이 차에 다시 차에 올라타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라이고우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화가 조금 풀렸으려나.....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회사에서 다시 나올 때 수많른 인파에 워낙 정신이 없었단 탓에 그를 부르는 것을 깜빡했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말을 걸지 않은 것이었다.
-"라이고우, 오늘 한 말 있잖아.... 내가 정말 미안했는데...."
시현의 텔레파시에도 라이고우의 대답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덱 케이스를 흔들어봐도 아무 대답이 없는 걸 봐서는 또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디론가 떠난 모양이다. 아니면 시현 자신처럼 좀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왜 자신의 삶은 늘 우울하고 외로운 것일까. 시현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무서우니까 라이고우나 대희 쌤에게 그랬던 것처럼 먼저 주위 사람들에게 벽을 친, 시현 자신이 그 원인이었다. 시현도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알더라도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시현에게 있어선 사치였다. 그냥 혼자만 슬프고 힘든 거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이젠 언제 튀어나올 지 모르는,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분노가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그나마 대희 쌤은 이런 내면의 고충을 눈치라도 챈 건지 시현을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자신의 이런 폭력적인 모습을 장기 쌤이나 병훈이, 류 선배가 보게 됐을 때 그들 역시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한편, 운전 중인 대희 쌤의 바지 주머니가 격하게 진동했다. 일단 다른 사람, 그것도 자기 학생을 태우고 있는 만큼 안전운전을 해야 했지만,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는지 그런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한쪽 볼과 어깨 사이로 휴대폰을 간신히 고정시키고는 전화를 받았다.
-"준대희, 오늘 듀얼은 어땠나? 시현이가 졌나?"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큰 무리는 없이 내가 이겼다."
-"그렇군. 시현이가 너까지 이기기를 바란건 과한 욕심이었나.... 일단 얼마나 잘 싸웠는지도 확인해야 하니 오늘 안에 이번 듀얼 찍은 영상도 나한테 보내도록. 그 외에 따로 말할 건.... 더 없겠지. 그럼 이만-"
-"잠깐, 한 가지 물어볼게 있-"
그러나 녀석은 질문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에휴, 항상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고 둘러대느라 통화 시간이 평균 30초도 안 되는데, 이런 녀석에게 제대로 된 대화를 바라는게 잘못이지....
아, 아무것도 아냐 시현아. 그냥 선생님이 통화하느라 한 소리야. 신경 쓸 필요없어."
대희 쌤은 누가 자기를 쳐다본다고 느꼈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차창으로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시현에게 따로 요구하지도 않은 말대꾸를 했다. 평소에 쾌활했던 선생님이 저렇게 조심스레 남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아, 결국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내면을 감추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인가? 나만 힘든게 아니라는 사실을 위로로 삼아야 할 지, 아니면 그저 '세상 사는게 다 그런 거지'라며 삶을 비관해야하는 건지 도저히 알 겨를이 없아 혼란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학원도 더이상 예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더 많은 상대와 듀얼할 생각에 설렜을 텐데, 어째 지금은 회의감이 시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있는 거지? 정말 내가 듀얼을 즐기고 있었던 걸까? 일단 다른 건 다 몰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만 확실해 시현은 또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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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이번에도 무사히 투고했군요. 여러분은 잘 보셨나요?
이번 듀얼은 시현이가 패배한 두번째 듀얼입니다. 하지만 첫 패배와는 결이 좀 다르죠. 그땐 나름 막상막하의 승부였고, 결국엔 졌어도 류가 시현을 인정해주고 나중에 덱 개량도 시켜준 덕분에 나름 훈훈하게 끝났지만.... 이번엔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압살당했습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이판사판으로 바렐스워드까지 꺼냈는데도요. 그리고 듀얼 도중에 전쟁 도중의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폭주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불안했던 정신이 더더욱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마디로, 시현에게 주어진 첫번째 큰 시련인 셈이죠.
제가 이렇게 주인공에게 이런 암울한 과거나 불안정한 멘탈 같은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듀얼 실력 같은 능력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의 성장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일단 스토리 배경부터가 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무거운 주제인만큼 단순히 '듀얼이 좋아'하는 캐릭터로는 메세지를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전에 5화를 재업로드했을 때 시현이가 초반부터 너무 강한 카드를 쓴다는 의견이 댓글로 달렸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이런 결심이 더 확고해진 것 같습니다.
여태껏 시현은 듀얼을 통해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은 삶에서 약간이나마 위안을 얻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고 표현하는게 더 맞겠죠. 왜냐하면 듀얼은 시현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게임이기도 하지만 가족들의 목숨을 앗아간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시현도 겉으론 듀얼은 즐거운 것이고 이번 대희 쌤과의 듀얼에선 져도 그렇게 놀라울 것 같지는 않다고 했지만.... 속으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박이 겉으로 드러난게 바렐스워드를 꺼냈을 때의 시현의 모습이었죠.
그리고 단순히 듀얼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시현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야 첫 패배를 빼면 연전연승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계속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있었으니 잘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대희 쌤과의 듀얼 이후 시현은 자신의 듀얼이 가진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내면의 슬픔을 '듀얼에서의 승리'로 덮으려고 하다 보면, 결국 언젠간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서 애써 쌓아왔던 자존심마저 처절하게 무너져내리게 되는 것을요. 즉, 듀얼할 때만 잠깐 행복해질 뿐 평소엔 여전히 소심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태도를 먼저 바꾸지는 못하는 시현의 삶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시현이 자신이 듀얼을 하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고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지가, 이번 첫번째 시련의 관건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현의 성장 과정은 다음 화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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