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머리는 일본에 묻혀 있다
88주기 맞아 도쿄 신조지(真浄寺) 묘역 정화
위패 새로 만들고 비석도 바로잡아
일본인 비서의 애인이 성곽 넘어가 효수된 머리 훔쳐
한강물에 피 씻은 뒤 짐꾸러미로 가장 일본에 보내
한말 개혁정치인 고균(古筠) 김옥균의 사상적 바탕이 됐다고 알려진 불교 기록의 일부가 그의 묘소가 있는 일본 도쿄 혼고(本郷)의 신조지(真浄寺)에서 발견됐다. 이 절의 관리인 데라다 고준(寺田康順)이 가지고 있던 ‘진종대의’(眞宗大義)란 이 책에는 고균의 발문이 있는데 여기서 고균은 이 책의 저자 이시가메 법사(石亀法師)와의 교류관계와 한일 양국의 불교사상을 쓰고 있다. 여기서 고균은 갑신정변 이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 일본 개화파의 선봉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교류를 갖게 됐으며 이로 인하여 사후 효수된 머리가 일본으로 옮겨졌을 때 이를 신조지에 안치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경내에 있는 묘역에는 그의 일본인 비서였던 ‘가이군지’(甲斐軍治)가 세운 높이 약 3m 너비 1m의 비석에 ‘조선국김옥군지묘’(朝鮮國金玉均之墓)라는 묘비명이 그의 필치를 본떠 새겨져 있다. 주지 데라다 씨는 지난달 28일의 고균 88주기를 맞아 2차 대전 때 공습으로 불탄 위패도 새로 만들고 전후 묘역을 조금 뒤로 옮기며 방향이 잘못되었던 비석도 바로잡았다고 한다.
고균 김옥균의 묘소가 한국에 1개소 일본에 2개소 등 3개소가 있다는 사실은 국내에서도 알고 있지만 이 중 유일하게 고균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은 이곳 신조지 묘소라는 사실과 특히 김옥균의 유해가 어떻게 해서 일본까지 옮겨져 묻히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고균이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상하이 객사에서 피살된 직후 평소부터 그를 지휘하던 2대 그룹인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파와 도야마 미쓰루(頭山満)파는 합동으로 ‘김 씨 장례위원회’를 구성, 상하이로 김옥균의 유해를 수습할 대표를 보냈다. 그러나 김옥균의 유해는 이미 이홍장이 군함편에 한국으로 보낸 뒤여서 이들은 그대로 돌아왔으며 이 위원회에서는 도쿄에서 김옥균의 위폐장례식을 치르고 도쿄 ‘아오야마’(青山) 묘지에 허묘(虛墓)를 지어주었다. 이것이 첫 번째 묘.
한편 한국으로 보내진 김옥균의 유해는 시신이 다시 능지처참되고 한강변 양화진에 효수되었다.
그 머리를 몰래 훔쳐 온 것이 김옥균의 일본인 비서격이던 ‘가이군지’의 내연의 처 ‘오야부 마사코’(大藪雅子)라는 여자.
여장부 기질의 ‘오야부’는 한밤중 몰래 남대문 성곽을 넘어가 장대에 매달려 있는 김옥균의 목을 끌어내렸다. 한강물에 피묻은 고균의 얼굴을 깨끗이 씻은 뒤 보통 짐꾸러미처럼 욕탕깔개에 싸 가지고 왜성대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오야부’는 김옥균의 머리를 ‘가이군지’에게 보인 뒤 다시 도쿄로 가서 신조지에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같은 사실은 1927년 조선거류민단에서 발간된 ‘청물어’(清物語)에 기록돼 있다.
신조지의 현 지주 데라다 씨는 “2차대전 공습 때 김옥균의 묘가 일부 파손돼 10여 m 옆으로 옮겼는데 당시 머리가 담겨진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를 옮겨 묻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한국에 있는 하나의 묘소는 김옥균의 부인 유 씨가 죽자 가족들이 충남 아산에 유 씨의 묘를 쓰면서 그 옆에 김옥균의 가묘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
일본의 ‘아오야마’ 묘는 현재 도쿄도 소속 묘지관리당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쿄=정구종(鄭求宗)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