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국립진주박물관 단편영화 사르후
1608년 음력 3월, 건주의 군주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과 슈르가치의 차남 아민이 이끄는 약 5천여명의 건주군은 울라의 본토에 위치한 이한산성에 대한 대규모 포위전을 단행하였다. 이는 1607년 음력 3월에 있었던 오갈암 전투 이후 약 1년여만에 진행된 건주와 울라간의 대규모 교전이자, 건주로서는 최초로 단행되는 울라 본토에 대한 공격전이라고 할 만 했다.
추영과 아민이 이한산성을 포위할 당시 이한산성에 주둔하던 울라군의 정확한 수효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사자가 기록상 1천여명인 점, 추영과 아민이 5천여명이라는 비교적 많지 않다고 평가될 수 있는 병력으로 지리적 입지가 좋은 산성을 공략하는데에 성공했음을 생각해 보고, 또 노획한 전체 갑옷의 숫자가 3백여벌에 불과했다는 점등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확실한 최소 수효로 파악되는 1천여명과 비교하여 크게 많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렇게 포위된 이한산성은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에 의해 함락되었다. 앞서 상술했다시피 이한산성 전투로 말미암아 울라군은 최소 1천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울라의 한 부잔타이와 그의 동맹자인 코르친 우익의 수장 웅가다이의 군대는 전투의 결과에 달리 결과를 미치지 못했다. 추영과 아민, 그리고 부잔타이와 웅가다이간의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잔타이 쪽이 먼저 철군하였다. 이미 이한산성이 함락된 이상 추영과 아민을 공격해 보아야 손실만 커질 가능성이 높고, 더불어 외부변수인 누르하치를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추영과 아민은 이틀여간 이한산성에 주둔하면서 부잔타이를 경계하는 동시에 노획물을 정리한 뒤 허투 알라로 귀환하였다.1
이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정보는, 건주와 울라간의 대립을 포함한 상호관계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던 조선에게도 전해졌다. 1609년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제천사 웅화에게 보고하기 위해 비변사에서 작성한 별단을 보면 '이한산성이 건주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확실한 문구가 서술되진 않았으나 이한산성 전투로 확신할 수 있는 전투의 존재가 거론되고 있다.
조선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1608년 무신년 음력 4월 누르하치가 휘하 장수로 하여금 5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홀호(忽胡)를 공격케 하여 그 성채를 함락했다고 한다.2여기서 홀호란 홀온 오랑캐 혹은 홀라온 오랑캐라는 뜻인데 울라 세력, 혹은 그 울라의 군주인 부잔타이를 지칭한다. 해당 정보의 기술 뒤에는 홀호가 누르하치와 화의를 맺었으며, 누르하치는 홀호에게 친딸을 보내어 서로간의 원한을 풀었다고 하는 정보 역시 기술되어 있다.
누르하치가 휘하 장수로 하여금 홀호를 공격케 하였다는 기술은 건주의 추영과 아민에 의한 이한산성 공략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성을 공격하여 함락했다는 점, 이한산성 전투 이후 나타난 건주와 울라간의 서로에 대한 외교적 행보가 정확히 맞물리는 점, 전투에 투입된 건주군의 수효까지 후금/청의 이한산성 공격에 대한 기록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정보가 건주의 이한산성 공격에 대한 정보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후금, 청의 기록에서는 이한산성에 대한 건주의 공격이 1608년 무신년 음력 3월 중에 단행된 것에 비하여 조선의 기록에 보이는 이한산성에 대한 건주의 공격은 무신년 음력 4월에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두 기록중 보다 사실에 가까운 기록은 아무래도 사건의 당사 세력 건주의 후신인 후금/청의 기록으로 생각된다. 즉, 이한산성에 대한 공격은 이전에 필자가 서술한 대로 1608년 음력 3월 무렵에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건주의 호이파 공격전처럼 조선의 기록이 보다 신빙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호이파 공격전의 경우 조선의 기록에 신뢰성이 있음을 교차적 검증을 통해 확증할 수 있는 반면3 이한산성 공격의 경우 조선의 기록이 보다 신빙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당사세력인 후금/청의 기록을 보다 신뢰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째서 건주의 이한산성에 대한 공격과 함락이 4월 중에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것일까. 해당 정보를 조선측에 전달한 정보책의 혼동 때문일 가능성이 아무래도 가장 먼저 고려될 수 있는 가능성이지만, 가장 먼저 고려될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능성과 더불어 정보를 전달한 쪽에서 따로 이한산성 전투가 발생한 시기를 언급치 않고 그 촉발만을 전달했음에도 조선측의 자가적인 착오로 음력 4월을 전투 일시로 판단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 가능성의 경우 조선에 해당 전투에 대한 정보가 전달된 시기가 1608년 음력 4월이었고 그 때문에 조선측이 당월에 그 전투가 일어났으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착오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착오와 실제가 뒤엉켰을 가능성 역시 들 수 있다. 이한산성 전투 자체는 음력 3월 중에 시작되었으나, 그 전투가 음력 4월까지 이어진 탓에 조선측이 이한산성에 대한 공격과 함락이 모두 음력 4월중에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실, 후금/청의 기록상에서 음력 3월 중에 이한산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공성일자와 기간, 종결일자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이한산성이 산성이었던 만큼 아주 짧은 시간안에 함락되진 않았을 것이며, 더불어 전투 지역과 전황을 보건대 아주 길지도 않은 시간 안에 함락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음력 3월 중에 출병한 추영과 아민이 이한산성을 공격, 함락하고 이후 이틀여간 산성에 주둔하다가 철군한 시기가 음력 4월이라면 조선측에서는 이를 정보전달자의 착오이던 본인들 스스로의 오해이던 음력 4월 중에 전투가 시작된 동시에 동월에 종결되었다고 판단할 소지가 충분하다.
필자로서는 개인적으로 본 의견이 신빙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즉슨 건주가 이한산성을 공격한 시기는 무신년 음력 3월이고, 함락한 시점은 음력 4월이나, 조선에서는 정보 수용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음력 4월중에 건주의 이한산성에 대한 공격과 함락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는 의견이 다른 의견들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 견해가 역사적 사실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이유로 인해 조선이 이한산성의 공격과 함락이 무신년 음력 4월에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는지는 여전히 확단할 수 없다. 그저 추정을 하고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한산성 전투와 그 결과는 조선으로서는 그리 환영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만문노당 무신년 음력 3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2.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음력 4월 21일
3.자세한 것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5967252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