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장만은 눈 한 쪽이 안질로 인하여 멀은 것으로 유명하다.
1607년 음력 3월 17~18일 혹은 19~20일 사이에 건주와 울라 사이에 벌어진 오갈암 전투는 울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주었다. 최고 지휘관이었던 봌도와 그 아들이 전사하였으며 창주와 후리부등의 고급 지휘관 겸 울라군주 부잔타이의 친족들까지 건주에게 포로로 잡혔다. 병력적인 손실 역시도 심대했다. 기록을 살펴보자면 전투 현장에서만 약 3천여명의 울라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울라는 지휘관과 병사만 잃은 것이 아니라 막대한 전시물자 역시도 잃었다. 후금과 청의 기술에 따르면 이 때 건주는 3천여벌의 갑옷과 5천여필의 말을 노획했다고 한다. 이는 건주로서는 큰 이득이었으며 울라로서는 막심한 손해였다.
전투 현장에서의 피해도 컸지만, 울라군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건주군에 의해 퇴각과정중 살해당한 이들도 존재했으나 가장 극심한 추가 인명손실 요인은 추위였다. 음력 3월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불어닥친 한파로 인해 도주하던 울라군이 많이 얼어 죽은 것이다. 도주과정중 울라군의 신체에서 발생한 땀이 한파와 만나 얼어붙은 탓이었는데, 도주과정중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갑옷이나 외투등까지 벗어버리며 도주한 덕분에 더욱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의 변경에서 오갈암 전투가 촉발되었기 때문에 조선 역시도 이 전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조선의 관심대상중 하나는 이 전투에서 울라가 입은 피해였다. 오갈암 전투 이후 약 2년 뒤 시점에, 비변사에서는 오갈암 전투 당시 전사한 울라군의 수효가 대략 7~8천여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견해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조선이 직접적으로 파악한 전장 방기 울라군 시신에 더하여 변경인들의 구언 정보를 추합한 숫자였다.1 그러나 이러한 추정수효는 울라의 향후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지나치게 많은 감이 있다.
한편 이로부터 1년 반쯤 뒤인 1610년 음력 11월에는 전임 함경감사 장만(張晩)이 보다 현실성이 있는 추론을 내놓았다. 그는 '문암의 패전', 즉슨 오갈암 전투 이후 울라군의 총병력이 6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논지의 말을 했다.2 당시 장만이 추정한 울라군의 오갈암 전투 이전의 총수효는 약 1만여명이었으므로 약 4천여명을 손실병력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는 상술한 7~8천 추정보다는 확실히 현실성이 있다.
그런데 1610년 시점에 울라군의 병력이 6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과연 장만이 자신의 울라군 손실 병력 추정에 과연 오갈암 전투로 인한 피해만을 반영한 것인지가 의문이다. 오갈암 전투 이후~ 장만의 추정 언급이 있던 1610년 사이에 울라군이 추가적인 대규모 병력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1608년 음력 3월에 있었던 건주와 울라간의 이한산성 전투로 인하여 울라군은 추가로 1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손실을 입었다. 천 단위가 넘어가는 병력손실이었으므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장만이 이 전투를 계산에 고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오갈암 전투와 이한산성 전투에서 손실된 울라군을 도합하여 4천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만이 문암의 패전 이후 울라군이 현재 6천여명만이 남았다고 하였으므로, 이한산성 전투의 존재를 파악치 못하고서 오갈암 전투로 인한 피해만을 울라군의 손실요인으로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 조선은 이한산성 전투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1609년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제천사 웅화에게 노정을 보고하기 위해 마련한 별단에서 조선은 이한산성 전투에 관하여 언급하였다.3 1608~1609년은 장만이 함경감사로서 일하고 있던 시기이므로 그 역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이한산성 전투에 대해 조정에 보고를 올린 것이 그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1610년 장만이 언급한 '울라군 4천여명 손실'이란 비단 오갈암 전투에서 전사한 울라군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이한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울라군의 추정수효까지 더한 수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파악한 '오갈암 전투서 전사한 것이 확실시되는 울라군 수효'는 2천 6백명으로서 약 3천에 근접하며, 이한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울라군은 후금의 기록을 살펴보건대 약 1천여명이었다.4 이를 볼 때 장만이 오갈암 전투 당시 퇴각하다가 전사 혹은 동사한 울라군의 수효는 그 정확성을 문제삼아 배제하고서, 확실히 전사한 것으로 파악된 수효만을 당시 전투에서 울라군이 상실한 병력으로 잡고 거기에 이한산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파악되는 울라군의 수효를 더한 것이라는 추정은 그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장만이 확실히 '문암의 패전' 이후 6천여명만이 남았다고 언급한 점, 오갈암 전투 이후 발생한 울라군의 비전투 손실의 경우 그 규모가 상당했기에 고려에서 배제하기 힘들었다는 점, 이한산성 전투의 존재는 몰라도 이한산성 전투에서 발생한 울라군의 전사자 숫자에 대해서는 조선이 그것을 파악했다는 확실한 물질적 증거는 없다는 점, 장만이 1609년 올린 차자에서도 역시 이한산성 전투가 뚜렷히 언급되지 않으며5 다만 오갈암 전투에서 발생한 수천의 피해만을 언급한 점등을 고려해 보건대 오히려 이한산성 전투에서 발생한 울라군의 피해를 배제하고, 기존의 통설대로 오갈암 전투에서 발생한 울라군의 피해만을 4천으로 추정했을 가능성 역시 여전히 상존한다.
무엇이 되었던, 당시의 장만이 울라의 전력이 오갈암 전투 이후 상당히 쇠퇴했다고 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1.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음력 3월 10일
2.조선왕조실록 광해군 2년 음력 11월 18일
3.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음력 4월 21일
4.만문노당 무신년 음력 3월
5.간접적으로 의심되는 기술은 있으나 이한산성 전투에 대한 기술이라고 확단할 수가 없으며 은유적으로 압박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크다. 장만, 낙서집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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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 장군이 제갈공명처럼 백우선 든 것도 잘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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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싶어도 이거빼고 후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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