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그렇게 덥지 않게 시작했다. 그래서 우려와는 다르게 참 선선하구나 하며 차문을 열고 드라이빙을 했었다. 그때 쯤 나는 오픈카톡이라는 것을 시작했고 사실은 거기서도 잘 어울리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 인생에 대부분이 운이 좌우한다고 믿는 나에게 오픈톡방은 마치 어느 악덕 회사가 만든 뽑기 게임같았다. 아무리 뽑고 뽑아보아도 쓸만한 듯하지만 쓰기는 애매한 카드만 나왔다. 그게 그나마 잘 나온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떤 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상당히 활달하고 흥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어느날 "그렇게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고 하라"며 나를 도발했다. 그래, 그런 도발 따위에 넘어가는 일은 원래는 없다. 5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옆에 누군가를 허락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가슴에 묻은 ㅁㅁ들이 하나 둘 석삼 너구리가 되어가면서 나는 상처로 딱지가 져버려서 탄력없는 심장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갈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날 나는 얼큰하게 술에 취해있었다. 그게 모든 비극의 시작일 것이다.
그녀의 도발에 나는 평소답지 않게 너무도 쉽게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 늦은 그녀를 평소답지 않게 또 기다려주었다. 그 고생 끝에 미안하다며 간 패밀리 레스토랑은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보다 연상인 그녀는 연상으로서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결국 그 날 저녁 영화를 끝으로 헤어지기 전 그녀는 내 팔을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솔직히 썩 이쁜 외모는 아니었다. 솔직하게 가식을 버리고 말하자면 나이라는 것이 어느 시점부터는 먹어갈 수록 빛을 잃어가게 만드는 물건이라 그녀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보다 다섯 걸음 더 빛을 잃어가던 그녀가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릴 때 왜 그렇게 어여뻐 보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강력한 추측으로는 5년이라는 긴 기다림과 외로움이 나를 이렇게 바꾼 것이라 생각해야겠지.
그렇게 그녀는 다음날 오픈 톡 방에서 나에게 고백을 했다. 물론 나는 일하는 중이라 또 보지를 못하였고 한 동안 그녀는 실연받은 가련한 여주인공을 연기하며 나를 곤란하게 했었다. 결국 그녀의 고백 내용은 읽은 나는 16년 만에 받은 고백이 고작 카톡 고백인 것에 대해 조금은 실망하면서도 큰 기쁨에 입꼬리를 귓볼에 걸고서는 그녀에게 한달음에 걸어갔다.
그 후로 우리는 아주 행복했다. 충분히 잘 맞는 궁합이라 생각했다. 물론 살아온 세월 만큼 우리는 달랐지만 그렇기에 더 맞는 것 처럼 느껴지고 나이가 있는 만큼 서로 배려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달쯤 되던 날 갑자기 그녀로 부터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어릴 때 부터 만나온 남자가 있다고 한다. 10년을 만났단다. 그 어린 시절에 만난 남자가 아직도 자기를 쫓아 다니며 못살게 군다고 한다. 참 웃긴 이야기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초중고를 함께한 것 처럼 했지만 생각해보니 고작 10년이라면 그녀는 아마 그를 대학생 때 만났으리라. 그 10년남은 그녀를 못살게 굴고 나를 협박했다. 나는 10년남이 불쌍함과 동시에 그런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그녀가 믿기지가 않았다.
부정할 시간도 없이 그저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가 우리가 아닌 이유로 헤어진다는게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던지 정말 그 어떤 것이라도 부여잡고 울분을 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틀을 그렇게 울며 불며 매달렸을 때 그녀는 10년남을 정리했다며 나에게로 돌아왔다. 너무 행복했다. 그녀를 잡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와 함께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우리는 두번째 사랑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사랑은 또 한달을 가지를 못했다. 그녀는 또 다시 예의 그 이유로 이별을 고한다. 그 10년남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왜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이렇게 괴롭힌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 10년남의 겁박에 그때그때마다 이별을 고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쯤은 나도 화가 났었다. 억울하고 분함을 넘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한동안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도 모르고 그저 방황했을 때 그녀는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웃긴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히 황당하고 웃긴 일인데 그때는 너무 기뻐서 그런 간단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마웠다. 그 고난을 이기고 심지어 10년남 때문에 반대한다는 가족들을 이기고 나에게 온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는 더욱 뜨겁게 사랑을 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부산 촌놈이던 내가 서울에 살며 일과 게임만으로 시간을 떼우다가 대학로라는 곳에도 가보고 연극도 보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커플링도 만들어보고 남산타워에도 가보고 거기서 자물쇠도 걸어봤다. 정말 숨가쁘게 사랑하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행복했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었다. 드디어 상처가 난 내 심장에서 새살이 돋는구나. 사람은 연애를 해야 진짜 사는거구나. 삶이 보람차구나. 나는 살아있구나. 그 날 아침 나는 모든 세상에 감사와 축복을 전하며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길 체 한 시간도 지나기 전인 아침 아홉시 삼십분.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해."
"지금 당장"
짧은 두개의 메세지. 장난 꾸러기인 그녀가 또 다른 장난을 치는것인가?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우스꽝스러운 억양으로 "여보세요~~~"라고 전화기 넘어로 말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폰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히 그녀의 전화기다.
"네?? 네??"
"너 뭐하는 사람이냐고!!!"
"그쪽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정말 사랑과 전쟁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다. 지금 생각하니 실소가 머금어지지만 그 때는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그지같은 상황이었다.
"나 '그녀' 남편입니다."
직장 동료들과 모닝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내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방금전까지 이 세상을 너머 온 우주를 찬양하던 나에게는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남편? 너무도 생소한 단어다. 내가 왜 이런 단어를 듣게 되는거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디선가 금이가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아닐 것이다.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나는 일이 바쁘다며 직장 동료들을 뒤로 하고 혼자 건물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몇 사람들이 피는 담배 연기가 깊게 내 패에 들어왔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 그저 매캐한 그 냄새가 내 정신을 더 또렷히 할 뿐이다. 남편? 나는 다시 아직까지는 나의 그녀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그 남자가 받는다.
'가정 파탄'
'번호 두개'
'가정을 지키려'
'조카'
'아들'
'4년'
'이혼'
믿기지 않는 단어들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넘어온다.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말인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편부모가정에서 자랐다. 내 엄마는 바람이 나서 나를 버리고 우리 집 돈을 가지고 남의 집 살림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 딱지를 만든 많은 ㅁㅁ들도 하나 같이 바람을 피고 전 남친을 찾아가고 클럽을 돌아다녔었다. 그런데 이제는 유부녀라고? 허탈하기 짝이 없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10년남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그게 뭔데?"
모른단다. 그때부터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 일이 바쁘니 저녁에 통화하자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뒷 목이 땡겨온다. 드라마에서 뒷 목을 잡고 쓰러지는 어르신들을 보며 왜 갑자기 뒷 목이 땡기냐며 의아해했었는데 그날 그 의아함이 모두 풀렸다. 진짜 뒷 목이 뻐근하며 내 몸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한동안 부정했던것 같다. 하지만 다시 걸려온 그녀는 작별을 고하며 그 모든 이야기가 진실임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 가족이야기도 직장동료 이야기도 친구이야기도 다 거짓말인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말인걸까?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왜 나는 이래야 할까?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럴까?
마지막까지 날 사랑한 마음은 진실이라고한다. 허탈하다. 5년을 기다려온 내 순정이 고작 이거였나? 결국 이거였나? 이딴거? 울분이 차오른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 아이에게 그 남자에게......씁쓸하다. 조카라고 유난히 이뻐하던 그 남자아이가 실은 아들이라니. 나랑 데이트할 때 남편이 아들을 보고 있었다더라. 그게 어미가 할 짓인가? 내 인생에 여자라는 존재는 어미부터가 그런 존재였다. 많은 이들이 위로해주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억울하다. 이 마음을 풀 곳이 없다.
하루가 정말 어떻게 간지 몰랐다. 그때 나에게 이상한 번호로 문자가 온다. 진짜 끝이라고. 처음 사귄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헤어지자고 자신의 새언니 전화번호로 문자했다는 그 번호다. 그게 진짜 번호인가? 되물으니 전화해보시던가 라고 대답이 돌아온다. 이제 더 이상 숨길게 없다는 듯 그 메세지들은 당돌하고 전투적이었고 유달리 나를 비아냥거렸다. 헤어지자. 피해자인 나를 조롱하는 그 말투에 화가난 나는 결국 그렇게 내 마지막 울분을 다하고 끝내려했다.
"결국 이것밖에 안되네. 더이상 연락 안 해도 됨."
굳이 한 마디 더 하는 그 번호. 됨? 이상하다. 그녀는 한 번도 유아스러운 말투를 쓴 적이 없다. 물론 그건 나도 그랬다. 그런데 됨? 됨이라고? 나는 그 수상한 번호를 메신저에 추가했다. 그러다 상태 메세지에 나에게 10년남이라고 말했던 자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박혀있었다. 그리고 메인 사진은 그녀가 그 10년남으로 보이는 남자의 볼에 뽀뽀를 하는 사진이었다. '이쁘니와 함께 10년남 ♥ 그녀' 정성스럽게 이름까지 밝혀 적은 그 상태메세지. 남편은? 10년남이 그 남편이었나? 아들 사진은? 왜 여기서 그 10년남 이름이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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