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0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비핵 지위 결의안을 채택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핵무기의 손실을 시작했습니다.
내용물
1. 비핵 상태를 향한 첫 걸음과 그 이전 단계
2.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이유
3. 소련의 핵 유산: 우크라이나에 남은 것
4. 부다페스트 각서 서명: 효과가 없었던 보증
5. 핵무기에 일어난 일
1991년 10월 24일의 결정은 우크라이나가 핵 지위를 포기하기 위한 첫 공식적인 조치였으며, 자체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젊은 국가의 초기 움직임 중 하나였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위치한 핵무기와 그 기지의 구성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입니다.
법적, 기술적, 재정적, 조직적 및 기타 역량을 고려하고 적절한 환경 안전을 보장하면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이를 수행할 계획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강력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키이우는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는 대신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세계 주요 강대국들의 안보 및 영토 보전 보장을 기대하며 자발적인 무장 해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이유
1990년대 초, 대중의 여론은 평화와 서방과의 협력을 지향했습니다. 체르노빌 참사 이후, 핵 문제는 권력보다는 위험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미 핵무기 없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1990년 7월 16일 국가 주권 선언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의 베르호브나 라다(Verkhovna Rada)는 국가가 중립과 비동맹을 지향하며 핵무기를 생산, 획득 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91년 8월의 획기적인 사건 이후, 우크라이나는 국제적 인정과 유엔, OSCE, IMF, 그리고 세계은행 가입을 추구했습니다.
이 모든 기구들은 우크라이나의 지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여론과 서방 국가들의 지원에 대한 믿음에 따라 해당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의 핵 군축을 향한 길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소련의 핵 유산: 우크라이나에 남은 것
소련이 붕괴된 후, 우크라이나 영토에는 거대한 핵 유산과 함께 이 무기고를 유지하기 위한 대규모 인프라가 남아있었습니다.
- 제43미사일군의 대륙간탄도미사일:176기와 사일로 발사대에 액체연료 SS-19(각각 탄두 6개):130기 및 고체연료 SS-24(각각 탄두 10개):46기
- Tu-95MS 및 Tu-160 전략 폭격기(30~43대)
- 전략 핵탄두:1,514~2,156개
- 전술 핵탄두:2,800~4,200개
오랜 협상 끝에 1994년 12월 5일,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안보 보장에 관한 각서에 서명했습니다.
이 문서는 우크라이나, 미국, 영국, 러시아 간에 체결되었으며, 이후 중국과 프랑스의 공식 성명서 형식으로 지원되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문서에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쿠흐마,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 그리고 영국 총리 존 메이저가 서명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비핵 국가로서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에 가입하는 대가로, 당사국들은 키이우에 일련의 안전 보장을 제공했습니다.
서명된 합의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1.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및 기존 국경을 존중합니다.
- 2.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 사용을 자제합니다.
- 3.다른 국가의 정치적 의지를 굴복시키기 위해 경제적 압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4.우크라이나가 핵무기 사용과 관련된 침략 행위의 피해자가 될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호소합니다.
- 5.이러한 약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상담하십시오.
그러나 서명된 문서에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명확한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차이는 나중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따라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후 돈바스에서 전쟁을 시작했을 때 부다페스트 각서의 조항은 비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은 크림반도 침략을 비난했지만 우크라이나에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마침내 국제 보증의 효과에 대한 환상이 묻혔습니다.
핵무기에 일어난 일
1992년부터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대표단이 우크라이나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미국은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주장했고, 러시아는 탄두를 자신들에게 옮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든 전술 핵무기는 1992년 상반기에 신속하게 러시아 공장으로 보내져 폐기되었고, 마지막 열차는 5월 초에 러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전략 무기 감축 조약(START)에 따른 협정의 일환으로 전략 탄두를 러시아로 이전할 계획이었습니다.
1996년까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모든 핵탄두가 제거되었습니다.
동시에 핵무기 운반 시스템과 관련 인프라가 해체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는 몇 년 동안 원자력 발전소에 연료를 공급하고 미국의 핵 위협 감소 프로그램에 따라 약 5억 달러를 지원하는 등 경제적 보상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