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청나라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팔기(jakūn gūsa, 八旗)는 이미 누르하치 시절부터 그 기반이 형성되었다. 누르하치는 1607년까지 최소 4기의 구사(gvsa, 旗)를 만들었으며, 1615년 무렵에는 팔기를 완전히 구축했다.
누르하치의 형제와 아들들은 이러한 구사들의 소유권을 분배받아 그들을 통제했다. 팔기가 형성되지 않고 오직 사기(황기, 홍기, 백기, 람기)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이들 구사의 소유권은 누르하치, 추영, 다이샨, 슈르가치가 가지고 있었다. 이 때 누르하치가 황기를,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이 백기를,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 홍기를,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가치가 람기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는 후금시기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이 람기의 적통인 양람기를 분배받고 다이샨이 두 개의 홍기를 관할하였으며 추영의 아들 두두가 양백기를 관리하였던 것으로도 증명된다.
슈르가치는 1609년 누르하치에 의해 숙청되었으며, 1611년에 죽었다. 추영은 1613년에 숙청되었고 1615년에 죽었다. 이들의 숙청과 사후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구사들은 다른 이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구사의 분배는 기존의 사기(四旗)가 팔기로 재편되는 시작점으로 작용했다.
4개에 불과했던 구사가 어떻게 8개로 재편되었을까? 통설적으로 4개의 구사, 즉슨 황기, 홍기, 백기, 람기가 쪼개어져 황기는 정황기와 양황기로, 홍기는 정홍기와 양홍기로, 백기는 정백기와 양백기로, 람기는 정람기와 양람기로 분할되었다는 해석이 유명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마쓰이 칸야는 여기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보였다.
칸야는 황기가 양(兩)황기로, 홍기가 양(兩)홍기로 개편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정람, 양람, 정백, 양백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들 구사의 초기 보유 니루의 수에 따른 이견이었다. 칸야는 1621년 팔기의 각 구사들에 편제된 니루수 일람에 있어서 각 구사의 니루 보유수가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 때 두 황기의 니루 수는 도합 64.5개 였으며 두 홍기의 니루수는 51.5개였다. 두 황기와 홍기가 본래 하나의 구사였다고 판단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개편 이전 각 구사 보유 니루수가 50~60개로서 적절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양람기는 혼자서 무려 61개의 니루를 보유하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두 백기는 도합하여 33개의 니루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정람기의 경우에도 역시 고작해야 21개의 니루를 보유하고 있었다.1
이러한 각 구사의 보유 니루 개수 불균형 문제, 특히 그 균형이 심각하게 깨진 양(兩)람기와 양(兩)백기의 문제에 주목한 칸야는 이에 대해서 기존의 슈르가치 소유의 람기가 쪼개지거나 하지 않고 온전히 그 아들 아민에게 맡겨졌다고 판단했으며, 팔기체제의 개편 과정에서도 따로 분할되거나 하진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추영의 백기의 경우 추영의 실각과 처형, 그리고 이어지는 팔기개편 과정에서 황기와 홍기의 경우(양분)과는 다르게 삼분(三分)되었다고 보았다.2
즉, 칸야의 논지에 따르면 양람기의 계승자이자 슈르가치의 차남인 아민은 슈르가치가 본래 소유하고 있던 구사인 람기를 그대로 계승받았고 후에 팔기체제가 완성된 뒤 기존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람기가 양람기로 개칭됨으로서 양람기의 소유자가 되었다. 반면 추영의 백기는 정람기, 정백기, 양백기로 삼분되어 정람기는 망굴타이, 정백기는 홍타이지, 양백기는 추영의 장남인 두두에게 맡겨졌다. 이 중에서 정람기의 소유자 망굴타이와 정백기의 소유자 홍타이지의 경우 누르하치의 적자(嫡子)로서 분배받은 구사를 기반으로 후금 건국 이후 두인 암바 버일러(duin amba beile, 사대패륵四大貝勒)의 일획이 되었고 두두의 경우 추영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이러한 견해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팔기개편 당시 누르하치가 이러한 형태로 구사의 개편을 진행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구(舊) 람기(양람기)의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람기는 슈르가치의 통치권 아래에 위치했던 온전한 구사로서, 누르하치의 영향력이 크게 침투하지 못한 구사였다. 그러한 구사는 분할하여 자신의 아들을 소유주중 한 명으로 임명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소유주와 구사의 암반들간 갈등이 야기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슈르가치의 또 다른 자식, 예컨대 자이상구와 같은 이를 분할된 람기의 버일러로 임명한다면 슈르가치계가 2개의 구사를, 누르하치계가 6개의 구사를 소유함으로서 슈르가치계의 영향력이 좀 더 커지게 된다.
물론 당시 누르하치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소유한 '아마 한'으로서 팔기 전체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상황이긴 했으나,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굳이 그러한 정치구도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이기에 굳이 람기를 분할하기 보다는, 차라리 람기를 분할치 않고 누르하치계 7 : 슈르가치계 1 의 팔기체제 구도를 만들어 슈르가치계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줄이고자 한 것 같다.
람기가 분할되지 않고 그대로 양람기로 이어지게 된 탓으로, 누르하치는 다른 구사 하나를 3분하여 총 여덟 개의 구사를 형성,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황기는 본인이 소유자였기에 안되었으며, 홍기의 관장자 다이샨의 경우 충직한 인물이었기에 굳이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백기를 삼분해야만 했다. 마침 백기의 추영은 정치적 숙청을 당하였고, 그에 따라 재편할 당위성이 충분했다.
이에 따라 누르하치는 백기를 삼분하고, 그 중 하나는 추영의 장남이자 자신의 손자인 두두에게 맡기고, 나머지 두 개는 홍타이지와 망굴타이에게 맡겨 팔기를 완전히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각 구사간 니루 보유 편차가 발생했고, 그것이 1621년의 기록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사기(duin gūsa)가 팔기(jakūn gūsa)로 개편될 당시 람기는 분할되지 않고 그대로 양람기가 되었으며, 백기의 경우 삼분되어 정백, 양백, 정람으로 개편되었고, 황기와 홍기는 이분되어 각각 정황, 양황. 정홍, 양홍으로 개편되었다고 할 수 있다.
1.만문노당 태조조 제 18권 천명 6년 음력 3월
2.미쓰이 칸야, マンジュ国〈四旗制〉初建年代考, 立命館東洋史學 第32 號, 2009, pp.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