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서 기총소사 목격”
광주 피해자 증언
“화염방사기 부상자 둘 확인”
국회 광주특위는 23일 민정당이 불참한 가운데 청문회를 속개, 5·19 가톨릭센터 앞 진압상황 목격자와 시민학생수습대책위, 도청항쟁 지도부, 기동타격대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이날 청문회에는 전두환 씨와 장세동(당시 특전사 작전참모), 김재명(당시 육본 작전참모부장) 씨가 증인으로 선정됐으나 출석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3·4면〉
당시 승려로서 광주항쟁에 참가해 적십자 구조활동을 했던 이광영 씨는 광주항쟁 당시 헬기 기총소사 여부와 관련, “5월 21일 오후 2시~2시 30분 사이 적십자 활동차를 타고 월산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광주공원 쪽에서 날아온 헬기가 총을 난사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그 때 헬기의 기총소사로 관통상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을 적십자병원에 실어다 주었다”고 말해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국방부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이 씨는 “유동에서는 집에서 나오던 홍난 씨가 헬기의 기총공격으로 머리에 총을 맞았으나 현재 살아있다”면서 “기총소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또 “화염방사기에 부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된 사람이 2명”이라고 말하고 “그 중 1명인 채강식 씨는 골수염이 재발해 87년 사망했으며 당시 방위병이던 최병옥 씨는 살아 있는 증인”이라고 증언했다.
신경진 씨는 “당시 공수부대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곤봉으로 구타하고 군홧발로 짓밟았다”면서 자신도 5월 19일 공수부대의 곤봉과 대검으로 부상당해 6월 초가지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신 씨는 “통합병원 입원 당시 함께 연행돼 있던 임신 3~4개월 된 임산부가 계엄군에 끌려 나간 직후 구타를 당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조선대 의대 2학년으로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 탈취에 가담했던 박병률 씨는 “금성파출소에서 무기를 접수한 것은 5월 21일 오후 2시 5분경이었다”고 증언, 시민들이 오후 1시 이후의 도청 앞 첫 집단발포 이전에 파출소를 습격, 무장했다는 군 관계자의 증언을 반박했다.
조비오 신부는 “끌려나온 부상 학생들을 차에 실을 때 공수부대는 양 쪽에서 들어 차 안으로 집어던졌다”고 말하고 “공수부대가 연행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개처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비록 내가 성직자지만 총이 있다면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증언했다. 조 신부는 또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서 2시 사이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헬기가 날아가면서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연속 3차례에 걸쳐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고 말하고 “나중에 현장을 목격한 김주호 씨로부터 그 기총사격으로 불로교 양쪽에서 시민들이 각각 10명 이상씩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명노근(당시 전남대 교수평의회 부회장) 씨는 “공수부대는 당시 광주의 젊은이 모두를 적으로 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며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수습위원으로서 당시 통계를 낸 결과는 1천4백58명이었다”고 말했다.
◇조비오 증인(당시 사태수습의원)
당시 상황에서는 성직자도 사람인지라 M-16이 있으면 계엄군을 쏘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21일 12시께 시내 성당 신부 8명이 모여 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계엄해제, 살인·폭행 중단 등을 요구하며 계엄분소장과 통화했으나 “사고 발생 시 책임질 수 없다”는 통고로 무위에 그쳤다. 헬기 기총소사는 눈으로 목도한 것이다. 오후 1시 30분~2시 사이로 기억된다. 3차례에 걸쳐 ‘드드득’ 하는 기관총 소리와 함께 섬광을 동시에 보았다. 당시 헬기는 도청에서 사직공원 방향으로 비행 중이었고 나와 헬기는 18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기총소사로 당시 불로천변 일대에 모여 있던 시민 2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안다.
헬기의 기총소사는 당시의 군 자료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당시 계엄군과 대항하자는 쪽은 소수에 불과했다.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밀어닥친 것이다. 시민군은 생명의 보장을 받으면 언제든지 투항할 자세가 돼 있었다. 이는 소수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광주를 이용, 논공행상을 논하기 위해 꾸민 것이다. 27일 새벽 3시 성당에 난입, 수녀방을 수색하면서 성직자들을 비롯, 교육자 등을 무차별로 끌고 가 인간 이하의 처우와 함께 형벌까지 내린 것은 정치군인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광주항쟁은 단순히 군과 광주시민의 싸움이 아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스러지면서 나타난 이 나라의 비극인 것이다. 군을 비롯 모든 국민이 피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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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24일자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