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려쳐.'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함장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모두가 잠든 날 밤 조용히 사라진 것이 아닌, 그저 레노아가 보는 앞에서 홀연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모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과학적으로 떠나 현실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행방불명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였지만 그것에 대한 해명보다, 함장 사라졌다는 것에 만족스러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퍼스트란 존재난 대체 가능한 존재. 레노아도 스스로 말했고, 인정했고, 알고 있었다. 다만, 함장의 행방불명건을 어떻게 상부에 올릴지가 걱정이었다. 사망이나 행방불명 모두 증거가 필요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보고를 위한 증빙자료를 만들면서 레노아는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해가지만, 여전히 함장에 대한 거침 욕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쓸모없는 녀석... 사라질 거면 그냥 퇴직한다고나 할 것이지..."
지금쯤이면 오웬은 다른 여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함장의 행방불명은 그저 부함장인 레노아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었을 뿐이다. 보고서를 쓰면서 어떤 내용을 작성해야하나 고민하면서도, 함장에 대한 짜증, 그러면서도 일이 끝난 뒤의 오웬과의 시간을 떠올리며 멋대로 기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땅히 작성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을 무렵. 개인적인 업무 공간에서 레노아를 만나기 위해서인지 문 너머로 벨이 울렸다. 청명한 소리였음에도 이런저런 문제로 짜증이 난 상태임에도 방문자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감정적으로 대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업무 중입니다. 조금 있다가 찾아오세요."
차분하게 말했지만 말끝에는 불안한 흐트러짐이 있었다. 방문자를 향한 거부 의사에 방문자도 돌아간 것이라 생각될 정도의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별 일이 아닌 듯, 다시 금 보고서 작성에 집중하려는 순간, 강철을 깨부술 듯, 시끄럽고 강력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음의 발생지는 다름 아님 업무실 바깥의 문쪽이었다. 대체 무엇으로 문을 두드리기에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나는 것인지, 보고서를 보며 머리를 짜내던 레노아가 당황해 문을 바라보았다.
당장 튀어나오라는 듯이 위협적으로 두들기는 소리가 레노아를 주춤거리게 만들었지만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은 용납못할 태도였다. 풀리지 않은 짜증과 함께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문을 열어 방문자를 마주했다.
"대체 뭡니까?! 중요한 업무라서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니까요!"
방문자의 모습은 처음보는 인물이었다. 금발과 금안의 적절한 조화와 하얀 코트를 차려입은 여성이 무슨 연유인지 레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원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아니면 나이트메어 호에서 거주하는 레노아 조차 모르는 인물인가 싶었다. 혹은, 오웬의 또다른 여자인가 싶었지만 눈앞의 여인 원수를 보는 듯한 살벌한 눈으로 업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인가? '지휘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지휘관'. 처음 듣는 호칭에 느낀 것은 황당함이었다. 나이트메어 호에서 지휘관이라 불리는 호칭이라 불리는 이들은 없었다. 그나마 지휘권자가 있었지만 그 지휘권을 가진 자도 행방불명되서 없어진 마당이다.
"지금 지휘권자가 행방불명 됐습니다. 이미 방송으로도 다 보낸 사항인데 이제와서...
철썩.
갑작스럽게 뺨을 강타하는 강한 충격. 그것을 넘어서 레노아는 책상까지 날아가 부딪히며 순식간에 업무실은 어지럽혀진다. 보고서로 작성하려 했던 서류가 펄럭이고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시려고 했던 커피는 바닥을 흥건히 적시며 기껏 쓴 보고서가 더럽혀진다.
"...?"
보통 통증이 아니었다. 뺨이 마비 될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쿨럭이며 기침을 하니 바닥에 피가 튐과 동시에 붉은 액체와 타액이 섞여 더러운 치아 두 개가 나뒹굴고, 코에도 선혈이 흘렀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가져가니 흥건한 피가 손을 적시고, 그것을 쫒는 동공은 자신을 향해 손찌검을 한 정체불명의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단수히 요원을 뛰어넘어서는 괴력. 맞는 잠깐의 순간, 손에서 느껴진 '단단함'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지휘관이 힘 없이 주눅든 모습만 하고 있더군. 우리 '지휘관'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너도 참 대단한 여자네. 나한테 맞았는데도 정신조차 잃지 않는 것도 그렇고."
적의가 담긴 비꼼.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레노아는 무언가 억울하다는 듯, 부어오른 뺨을 잡고 항변을 한다.
"다, 당신 대체 누군데 이런..."
그 말에 여인은 인상을 팍 쓰며 레노아 앞으로 다가가며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는다. 잡아당기면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레노아마저 짧게 비명을 지르지만, 얼굴이 가까이 붙어오며 자신을 향한 살의가 담겨진 눈빛과 마주해 비명과 항변은 목구멍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누군지 알 필요 없어. 나의 소중한 사람이 누구 때문에 고통 받았는지 궁금해서 왔을 뿐이야. 여기 오기 전에 요원이라는 나부랭이들도 참 대단하더군. '함장'이라는 자를 끊임없이 욕하던데... 부함장이라는 자가 얼마나 관리를 못한 걸까?"
붙잡힌 머리채의 고통 속에서 마침내 레노아의 입이 열렸다.
"다, 당신... 함장이 보내서..!"
둔탁한 소리가 다시 들린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면서 여인은 레노아의 머리를 바닥에 찍으며 압박해간다. 살벌한 괴력에 머리가 찌그러질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지휘관에게 있어서 그 명칭은 멸칭이나 다름 없으니까... 이 와중에도 지휘관이 부탁하더군. 죽이지 말아달라고. 너가 없으면 나이트메어인지 뭔지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야. 하여간..."
머리를 짓누르는 압박이 줄어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는 레노아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눈빛 속에서 경멸스러움이 뿜어졌다. 혀를 차면서 업무실을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겨우 레노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당장 함선의 요원들에게 저 여인을 붙잡으라는, 부함장의 권한으로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겨우 참으며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다. 괘씸했다. 대체 가능한 인력 주제에 감히 복수를 하려고 들다니. 그 여인 뿐만 아니라 함장도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악에 받친 모습으로 마이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으헤~'
그러한 감정을 순식간에 식혀주는 여유로운 목소리와 말투. 그것도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처음 듣는 목소리에 레노아는 고개를 돌렸다.
옅은 핑크색의 머리카락은 원체 길게 길러서 안 그래도 짧은 키인데 유난히 더 길어보이고, 가장 큰 특징으로느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떠 있었다. 하물며 느긋하다 못해 졸려보이는 인상까지 하고 있는 어린아이가 없무실에 있었다.
반면 한 손에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은 위협적인 산탄총이 들려있었지만 통증과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레노아는 소녀를 그저 어린 아이로만 보고 있었다.
아이를 내보내기 위해서 애써 통증을 참으며 내보내려고 하지만 그 소녀는 하품을 하다 눈을 뜬다. 금색 눈동자화 푸른 눈동자로 이루어져서는 레노아를 올려다보는데 신비로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벌써 누가 왔다갔나보네~ 으헤~ 이 아저씨도 좀 일찍 올 걸 그랬나... 뭐 됐어. 어차피 할 일은 똑같으니까."
"...꼬마야...?"
레노아는 소녀를 꼬마라 부르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투의 질문을 하지만, 소녀는 산탄총을 고쳐잡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선생님 못살 게 굴었던 나쁜 여자라 이거지?"
소녀는 빨랐다. 산탄총의 개머리판 부분이 레노아의 명치를 가격하며 머리의 통증과 함께 새롭게 찾아오는 통증과 숨막힘에 타격을 받은 레노아가 명치를 감쌓고 쓰러진다.
그대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소녀는 연달아 개머리판으로 레노아를, 흠씬 두들겨패고 있었다. 등, 팔, 다리 할 것 없이 말 없이 묵묵하게 그저 두들겨 패고만 있었다.
"그, 그만! 그만!"
고통에 못이겨서 애원을 해가기 시작하는 레노아. 부함장의 권위 이전에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본능 앞에서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었다.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하던 움직임이 멈추고, 소녀는 거친 호흡을 하지만, 힘들어서보다는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심호흡이었다.
"하아... 아저씨 옛날 성격 나오네?"
자신을 아저씨라 칭하는 이질적인 모습은 상황을 더욱 두렵게한다. 소녀의 작은 손이 레노아의 멱살을 붙잡으니 키는 레노아보다 클텐데도 한참 작은 소녀가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선생님이 너 따위에게 고통 받았다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선생님은 세계를 구한 분이시고, '우리'를 구한 분이시야. 너 따위에게 그딴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그대로 레노아를 밀쳐내는 소녀. 바닥에 넘어진 레노에가 상체를 일으키니 소녀는 산탄총을 자신에게 겨누고 있었다. '발사'의 징조를 눈치챈 레노아가 두려움에 손을 뻗었다.
"자, 잠깐!"
두려움에 찬 외침과 동시에 방아쇠가 당겨지며 발포음이 방을 울렸다. 발사 직전 꺾인 총구가 천장을 향하고 있었고, 다발의 탄환에 구멍이 뚫리며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소녀는 선생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래도 죽이면 안 된다고 했던, 고통스러웠던 얼굴 속에서 소녀를 향한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장에서 시선과 총구가 내려오고, 총포음에 몸을 움츠러든 한심한 모습의 레노아를 바라보았다.
레노아의 심장이 요동치며 호흡이 가빨라졌다. 전투에 참여할 때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상황은 몇 번이고 있었지만, '무력한 죽음'이라는 앞에서의 공포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함장' 존재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산탄총의 총구가 거두어지면서, 레노아를 경멸스럽고, 한심하게 바라보았던... 한 떄 레노아가 함장을 바라보던 시선과 똑같은 표정으로 소녀는 몸을 돌렸다.
문은 어느새 망가졌는지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망가져가는 업무실 속에서 헐떡이는 부함장 레노아만이 남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에, 방금 전 자신을 구타했던 여인과 소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몸이 너무나도 아팠다. 보고서 작성이고 뭐고, 일단 의무실을 향하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또 다시 들어왔다.
귀와 기다린 꼬리가 달려진 '수인' 이었다. 이마쪽에 난 하얀 브릿지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신체적인 특징으로 보아하니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레노아는 겨우 도와줄 사람이 온 건가 싶어 손을 뻗었다. 도움을 청하려던 레노아의 손 끝에는 부서진 문쪽으로 선글라스를 낀 정장 차림의 소녀와 같은 '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어와 레노아를 둘러쌓다.
"다, 당신들...?"
누구야. 라고 물어보고 싶으나 말할 힘이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레노아를 쓰레기 보는 듯한 눈으로 내려보며, 혀를 찼다.
"흐응. 벌서 다른 사람들도 왔다갔나보네."
레노아는 이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장 입은 수인이 다가왔다.
"키타산 아가씨, 어찌 처리할까요."
정중하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로 '처리'한다는 말에 레노아는 흠칫했다. 허나 소녀는 마치 오늘 점심 뭐먹을까? 하는 표정과 함께, 자기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트레이너씨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저거'는 제정신 유지시킨 상태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다음 사람'들도 많은 것 같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엉망이 된 업무실은 벌서 '수많은 이들'이 왔다 다녀갔다.
가구들은 부서지고, 서류로 보이던 것들은 엉망이 되고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사이 움찔거리며 겨우 살아만 있는 수준의 레노아가 허공의 천장을 바라보며 빛을 잃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쿨럭이니 피가 흘러나오고, 뼈가 뒤틀렸는지 사지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복부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구멍까지 나 있었지만, 구멍을 내고 사라진 대상은 출혈로 죽을 수 있다. 라는 이유로 치료와 붕대까지 감아주고 사라지는 악랄함은 보였다.
중간부터 누가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수인들'이 떠난 이후, 사람의 가슴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머리보다 흉부가 큰 여인이 찾아와 '사령관'이라는 호칭을 언급하며 폭력을 행사했고, 분홍색 단발의 방패를 든 소녀가 찾아와 '마스터'는 충분히 고생하신 분인데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냐며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복부에 구멍을 낸 것은 기다란 귀를 가진 소녀였다. '박사'를 언급하며 손을 뻗는 순간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함께 쓰러졌던 레노아였지만, 기다란 귀를 가진 소녀는 함께온 다른 여인에게 치료를 부탁했고, 어느 덧 사라졌다.
그리고 또 다른 방문자에게 고통받으려는 순간, 이 소란을 듣고 나타난, 마침내 나이트메어 호의 요원이 있었다. 그제야 레노아는 살 수 있을거라 믿었지만, 레노아를 둘러싼 정체불명의 존재를 본 요원은 되려 달아나버렸다. 누가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그 요원이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무참하고 기다란 폭력만이 레노아를 맞이할 뿐이었다.
천장만 바라보니 조용한 것이 마침내 끝난 듯 했다.
허무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니. 미카나 레이... 하물며 사랑을 말했던 오웬조차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고통보다, 고독했다. 끔찍할 정도로 고독했다.
"....함...장..."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함장'이라는 호칭. 어째서 그의 호칭이 나오는 것일까. 깨달은 것일까. 함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맨 처음 함장을 향했단 분노와 짜증은 없었다. 그것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함장을 핮망이라 부를 이유도 부정당해야 했다.
함장은 행방불명 되었고, 찾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왔던 인물들은 지휘관을 찾았고, 선생을 찾았고, 트레이너를 찾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호칭들로 불려졌다. 아마 '함장'이 다른 곳에서 불러지는 명칭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부탁해서 함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나 다름 없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들어줄 이유도, 하물며 다시 찾아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쨰서 함장을 찾고 싶은 것일까. 이제야 고통을 깨달았으니 사과가 하고 싶은 것일까. 이 얼마나 얌체같은 짓인가.
희망조차 없는 곳에서, 레노아는 그저 후회의 눈물만을 흘려갔다.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진동이 느껴진다. 복도를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 그 소리가 가까워져가고, 업무실 앞에서 멈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회색이었다. 머리카락도. 얼굴도, 심지어 옷도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아니면 잿빛일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중충한 정장과 특징이라면 일자형 패턴 디자인의 재킷 정도. 그리고, 회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보이는 '붉은 시선'. 고통도 마비됐는지 느껴지지 않을 판이지만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압도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을 정도로군."
시크한 목소리와 말투에서, 그는 볼 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허나 레노아는 그를 놓칠 수 없었다. 뒤틀린 사지로 어떻게든 일어나고 싶었으나 일어날 수조차 없어서 고통을 억누르며 기어갔다.
그를 잡아야 함장을 만날 수 있다. 본능이 그리 외쳤다.
"잠...깐...만요...!"
신음이나 다름 없는 붙잡음. 구둣발 소리가 멈추며 남자는 우뚝 섰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기괴한 자취에 겨우 머리에 달려 있는 검은 꽃장식이 툭 떨어진다.
"함장에....게... 데려가주세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겨우... 알았어요... 제가... 제가... 역겨운 년이었어요..."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치 계속 이야기 해보라는 듯한 무관심한 대답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사과하고... 싶어요...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제발... 제발 저를... 함장에게..."
얼척없는 소리라는 것은 레노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 더 이상의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레노아는 팔만 멀쩡했다면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았을 것이다.
마침내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붉은눈동자에서 나오는 살벌한 시선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레노아를 압도한다.
"귀찮은 일 하러왔는데 바닥이나 기는 걸레조각이랑 이야기까지 나눠야 하다니, 하아..."
남자는 몸을 완전히 돌려 레노아를 내려본다.
"잘 들어. '관리자'님은 한심한 사람이지만 해야할 일이 확실한 사람이다. 또 다른 지옥속에서도 자기 일은 알아서 할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포기할 정도라면 여기는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공간이란 거지."
남자의 말에 레노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녀석에게 관리자님을 만나게 해드릴 이유는 없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허락한다고 해도 그 녀석들이 널 받아들일지 장담도 못하고."
레노아의 마지막 희망이 사그라드는 듯 했다. 함장 쪽의 사람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함장이 만나고 싶어서 다른 곳에서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 뻔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그게 맞는 일이었다. 함장의 적은 곧 자신의 적이나 다름 없을텐데 무슨 염치로 자신이 함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꺾여진 희망 속에 레노아의 시야가 조금씩 흐릿해져간다.
"네 녀석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일하는 곳은 연애질의 공간이나 하극상을 설파하는 장소가 아니다. 위계질서를 위반하면서도 돌발행동을 하겠다면, 자신이 치를 대가를 한 번쯤 더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몸을 완전히 돌렸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남자가 이상한 공간으로 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부함장 레노아의 눈은 어둠 속에 완전히 잠식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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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레노아 두들겨 맞는 게 보고 싶어서 써본 건데 막상 써보니 이게 카제나 팬픽인지 다른 팬픽인지 모르겠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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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5 (21: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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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음. 루니샤 집어넣을까 하다가 내가 루니샤를 잘 몰라서. | 25.10.25 21:4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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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만. 대충 읽어보긴 했는데 뭐랄까 안티물을 위해서라지만 다소 캐붕스러운 게 있긴 허다야. | 25.10.25 21:4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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