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중앙 트레센 학원에는 기자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도 그럴 게 트윙클 시리즈 자체가 스포츠에 아이돌 문화를 결합한 무언가다. 이름 좀 날린 우마무스메는 하나하나가 사실상 아이돌 취급을 받으니, 허가를 받지 않고도 아득바득 일상을 찍어서 기사로 내려는 쓰레기들이 천지라는 거지.
근데 이건 일반적인 우마무스메들에 한정한 이야기고, 사회적 계급 자체가 아예 왕족인 우마무스메라면 어떤 부류가 들러붙을까.
그래, 파파라치다.
그것도 고오급 파파라치.
SNS 시대라지만, 뉴스의 파급력은 여전히 크다. 특히 온라인 뉴스는 확산 속도가 더 빠르니까 상당히 유효한 수단으로 아직 남아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런 온라인 언론에는 여전히 황색 언론, 속칭 찌라시라 부르는 놈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이는 국가를 불문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 흩뿌렸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일국의 왕녀다?
좋다 못해 완벽한 먹잇감 아닌가.
“난 그 왕세자비 꼴 나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그리고 그런 기자들의 위엄찬 노력 덕분에 목숨을 잃은 걸로 유명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트레이너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아일랜드어 교본을 덮었다.
파파라치가 붙을 건 뭐, 예상은 했다.
한국에서 SNS로 그렇게 터진 시점에서 예고된 일이었지. 그런데 유럽의 상류층 대상으로 추적하는 놈들이 올 줄이야.
-뭐, 말만 그렇지 신경이 딱히 쓰이진 않지만, 짜증은 나네.
이놈들은 진짜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황천길 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들이라고. 이런 놈들을 중앙 트레센의 경비 따위가 막는다고?
아서라, 꿈 깨라.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아예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걸 위해선 준비가 약간 필요한데, 시기적절하게 날짜도 딱 9월이었다. 하늘이 돕는군. 감사합니다, 지쟈스. 하늘에서 ‘허허, 필요할 때만 찾지 말거라 고오얀 놈’하고 벼락 떨어트릴 거 같은 느낌을 받는 가운데 그는 휴대전화 통화목록 가장 최상단의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나야, 이제 작년에 내줬던 숙제를 제출받을 때가 된 거 같아서 말이야.”
화면에는 그의 담당, 파인 모션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
통화를 끝낸 파인 모션의 앞에는 두 가지 서류가 있었다.
계약 해지 서류.
그리고 또 하나는-.
“….”
그 두 개의 서류는 처음 ‘숙제’를 받았을 때부터 준비되었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1년 가까운-사실 1년 전부 채우진 못했다.-기간 동안 눈으로 볼 수 있는 천칭의 역할을 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다가오자, 클로버 왕녀는 놀랍게도 선뜻 둘 중 어느 것을 잡아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못 하겠어, 이건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이는 머리가 다소 냉정해진 결과, 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걸 깨달아서였다. 트레이너는 무엇을 원할 것인가. 단순히 지나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이 관계를 끝맺음하고 싶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도 타오르는 바와 같이, 한발 더 나아간 관계로 가고 싶을 것인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녀가, 파인 모션이 강요할 것이 아니었다.
강요하는 순간, 작금의 관계는 모조리 파탄이 나리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두 서류를 각자의 봉투에 담았다.
계약 해지를 요청하는 서류는 URA의 날인이 찍힌 서류봉투에, 또 하나의 서류는 아일랜드 왕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에.
결국 숙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이를 어떻게 그에게 말해야 할지 파인 모션은 그녀답지 않게 벌써 풀이 죽어있었다.
-⏲-
“그게 그렇게 풀죽을 일이니, 파인.”
“어?”
트레이너는 그렇게 귀가 쳐진 채 ‘숙제를 끝낼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 파인 모션에게 그게 뭔 대수라는 듯이 말했다.
“내게 이걸 가져왔다는 건 너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그런 거잖아, 그렇지?”
“응, 그건 그런데….”
다소 우물쭈물하는 아일랜드의 왕녀에게 그는 그녀가 한 결정의 의미를 설명해줬다.
“그건 네가 철이 들어간다는 증거다. 혼자 일을 저지르지 않고, 남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렇게 말한 후, 트레이너는 꽤 흐뭇한 눈으로 파인 모션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른이 되어가는 걸 축하한다, 파인 모션. 그것만으로도 숙제는 훌륭히 끝낸 거야.”
어른이 되어간다.
그 의미는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을 마침내 그의 말을 통해 자각한 클로버 왕녀는 연두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로도 숙제는 끝난 거라고…?”
“뭐, 아직 미숙한 부분은 많다만, 이건 차차 더 배워나가면 되겠지.”
아직 얼떨떨한 그녀의 앞에서 트레이너는 두 개의 서류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별로 고민하지 않고, 하나의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어? 잠시만, 트레이너?”
그의 손에 들린 봉투는 아일랜드 왕실의 인장이 찍힌 하얀 봉투.
그걸 보고 눈이 크게 뜨인 파인 모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녀가 현실감을 제대로 못 느끼고 있는 사이, 트레이너는 봉투를 연 후 안에 있는 서류를 살펴봤다. 그리고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지난 몇 개월 동안 상당히 유려해진 필기체로 비어 있는 항목을 써나갔다.
특히 이름에는, 지금껏 몰랐던 그의 영문 이름, 세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그의 영문 이름이 또렷이 적혀 들어갔다.
“아일랜드 왕국이 커먼웰스라 영어 써도 별로 문제없다는 걸 한 달 전에야 알았다. 이러면 결정이 더 빨랐을 텐데.”
아, 그리고 상당히 어이없는 말도 나왔다.
어렵게 아일랜드어 배우고 있는데 찾아보니 아일랜드가 영연방이란다. 아마 현 왕실 성립 이후 북아일랜드 때문에 이래저래 얽히다가 커먼웰스에까지 들어간 거 같은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영어가 통하면 세상 편한데 말이다.
“몰랐던 거야? 상당히 오래전부터 우린 커먼웰스의 일원이었는데?”
“씁, 내가 역사에 너무 무지했던 거지. 여튼 여기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 오히려 더 놀라운 듯, 파인 모션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가운데 그가 작성을 빠르게 끝낸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어 돌려줬다.
“쭉 생각해 봤는데 난 저 파파라치 까마귀 떼한테 너 혼자 보낼 순 없겠더라고. 그러니 이미 시작된 거, 끝까지 같이 가는 거다, 파인.”
“트레이너….”
그리고 진짜 속내를 드러내자, 서류봉투를 든 파인 모션은 무심코 그걸 꼭 껴안았다.
트레이너 자신은 이 언론의 포화를 견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갓 성인이 된 파인 모션은 견디는 게 버거울 것이다. 특히 한국까지 찾아가서 같이 돌아온 이성하고 관계가 깨진다면, 온갖 추문이 평생 뒤따라갈 테지.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제 한 몸 편해지자고 제자의 미래를 오리무중으로 밀어 넣는 건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이다.
그래서 그는, 파파라치가 선을 넘기 시작한 4월을 기점으로 사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다만 우려되는 건 파인 모션의 준비 여부였을 뿐.
그리고 오늘, 그 우려는 훌륭히 불식되었다.
왕녀는, 이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주는 거야?”
“그래, 앞으로도 계속.”
“정말로 아일랜드로 같이 가주는 거야?”
“물론, 그러니 오늘 부른 거지.”
이 현실이 아직 믿기지 않는 듯, 파인 모션이 몇 번이고 묻는 말에 더욱 확실한 답이 돌아왔다. 결국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은 그녀는, 시간을 들였음에도 그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고요하고 강렬하게 불타올라감을 느낀 그를 향해 와락 뛰어 올라가 껴안았다.
“트레이너…!”
“파인, 잠시만 이러다 뒤로 넘어간…!”
‘우지끈-.’
그리고 기념비적인 트레이너와의 완전히 새로워진 관계의 첫 순간은 의자 하나를 해 먹는 거로 시작했다.
아, 그거 트레센 비품인데.
…
아일랜드로의 출국까지 앞으로 반년.
뭐, 파파라치?
까짓거 정면돌파하면서 직접 파인을 보호한다.
창문 너머의 가을 하늘처럼, 앞으로도 별일 없으리라고 이때까진 생각했다.
날아라, 더 높이 날아라
그럴수록 더 고통스레 추락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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