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니즘>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풍의 사조를 지칭하는 말로써 필립 뷰르트 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일본취미 ”에 그치지 않는 일본 취미를 예술 안에서 살려내고자 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을 지칭한다.
19세기 중반 만국박람회 열풍에 휩싸인 세계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속도로 엄청난 물량의 교역이 이뤄졌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 재빠르게 유럽에 진출,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일본은 과거 조선에서 넘어온 도공들에게 전수받은 기술로 도자기를 만들어 수출했는데
오히려 유럽인을 매료시킨건 도자기를 포장했던 포장지였다.
오랜 항해 동안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하는 데 쓰인 질 좋은 그림 종이가 눈을 사로잡았고
회화적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한 인상파 화가들은 이 포장지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이 포장지 그림은 일본 에도 시대(1603~1867년) 고유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이다.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그 특유의 평면성과 과감한 구성, 과장된 표현을 통해서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에두와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46.5cm x 114cm, 1868년, 오르세미술관
당시 우키요에가 얼마나 인상파 화가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는
이들의 그림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우키요에의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네(Edouard Manet)의 그림 ‘에밀 졸라의 초상’에는
일본 무사도 그림들이 배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세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맨 오른쪽에는 ‘올랭피아’가 있고, 그 뒤에는 스페인화가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승리’가 보인다.
그리고 올랭피아 왼쪽에 일본 스모선수를 그린 우키요에가 있다.
화면 중심부에는 앉아 있는 에밀 졸라 등 뒤에는 일본 병풍이 세워져 있는데,
병풍 속 그림은 전형적인 동양의 ‘화조화(花鳥畵)’다.
이로써 마네가 우키요에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Claude Monet;Madame Monet en costume japonais
끌로드 모네, 기모노를 입은 까미유, 1876년, 231,6cm x 142.3cm, 보스톤 미술관
모네(Claude Monet) 역시 19세기 우키요에의 영향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아내인 까미유를 모델로 일본 여인을 그렸다.
이 작품이 ‘일본 여인(La Japonaise)’이라는 그림이다.
모네는 1876년에 개최된 두 번째 인상파전에 ‘일본풍(La Japonaise)’이라는 제목으로
화려한 빨간색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한 아내 카미유를 그려 출품했다.
그림 속 벽과 바닥에는 우키요에가 그려진 부채로 가득 차 있다.
당시 파리에 있는 미술품 가게나 골동품 가게에서는 기모노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부채와 같은 소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그림에는 그런 일본풍 소품들이 모두 그려져 있다.
파리에서 이처럼 일본 문화가 유행한 덕분에
이 그림은 인상파 전에 출품되어 좋은 평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높은 가격에 팔렸다.
그러나 정작 모네 자신은 자포니즘이 유행하던 당시
일본풍 그림을 하나의 습작 정도로 그렸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 연못과 일본식 다리(Water Lilies and Japanese Bridge)
모네는 말년에 지베르니 집에 수련이 있는 연못을 꾸미고는
일본식 다리를 만들어 그 풍경을 즐겨 그렸다.
반 고흐, 탕기영감의 초상, 92cm x 75cm, 유화, 1887년, 로댕미술관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열정적인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특히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 평면적인 색면, 강렬한 색채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건너온 고흐는 짧은 파리 생활을 마친 후 남프랑스의 아를(Arles)로 옮겨 정착했습니다.
아를로 이주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곳의 밝은 햇살과 강렬한 자연의 빛깔이 그가 우키요에에서 본 이국적인 풍경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를을 '일본' 같다고 표현하며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찾고자 했습니다.
반 고흐는 1887년 여러 우키요에 작품들을 모사하며 자신의 화풍에 적용했습니다. 같은 해 그린 물감 가게 주인 ‘탕기 영감’의 초상화 배경에는 후지산, 벚꽃, 기녀 등 다양한 우키요에 작품들을 그려 넣어 일본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일본 수도승처럼 묘사한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키요에 화법을 연구하기 위해 안도 히로시게의 대표작인 ‘오하시와 아타케의 소나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모사한 ‘비 내리는 다리’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원작의 구도를 따르면서도 고흐 특유의 강렬한 붓 터치와 색채 표현이 더해져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보여줍니다.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의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
(왼쪽 그림, 1857년, 34㎝×22.5㎝,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을
모사한빈센트 반 고흐의 ‘빗속의 다리’
(오른쪽 그림, 1887년, 73㎝×54㎝,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히로시게: 카메이도의 매화정원, 1985년, 반 고흐: 꽃이 핀 자두나무, 1887년,
반 고흐, 1887년, '탕기 영감의 초상' 배경에 있는 일본 목판화의 모사본(Courtesan (after Eisen))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걸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는데 영감을 줬다
“……어쨌든 내 모든 작품은 일본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본 미술은 일본 자국에서는 퇴폐해졌어도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다시 그 뿌리를 박고 있구나.
내게 자연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 물건의 거래적인 가치보다는
예술가를 위한 그 실질적인 가치에 있단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이렇듯 반 고흐는 자포니즘에 큰 영향을 받았다.
화가를 뛰어넘어 작곡가들에게 까지 영감을 줬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드뷔시의 "바다"이다. 그는 고흐와 마찬가지로 호쿠사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라르의 '일본 화장실'
메라커셋의 '편지'(왼)/ 주카 세이조의 '편지를 쓰는 유녀'(오)
제임스 휘슬러(미국) 가 그린 도자기의 나라에서 온 공주, 18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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