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구 이슈로 시끌벅적한 유게에 은근슬쩍
직구빨을 따라서 은근슬쩍 스리슬쩍 고려사 글 써봅니다
사실 지금은 공부하기 좀 힘들어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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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고려와 거란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하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는 태조 초기부터 대거란 정책은 대부분 적대관계였고, 거란 역시 마찬가지였죠.
고려가 거란을 적대한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대표적인 이유로는
태조대부터 지속된 대 거란 적대정책이 기본이겠네요.
그런데 이 대 거란 적대정책의 기초를 알아보자면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했다는 점이죠.
발해는 한민족 국가이자, 동시에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 유민들은 대거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 내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죠.
대표적인 인물이, 최근 고거전 드라마 초반에 나온 대도수 등이 있죠.
이들 대씨 왕실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은 고려 내에서 상당히 대우를 받았고,
당연히 고려 왕실 측에서도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고려에서 거란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태조 24년, 거란측에서 먼저 우호관계를 맺자는 의미로 사신과 선물인 낙타를 보냈지만,
태조 왕건이 사신은 유배, 낙타는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니,
이것이 '만부교 사건'입니다.
거기다 태조의 유훈인 훈요 10조에서도 나오죠.
-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삼가 본받지 말라.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고려와 거란은 완전히 손절치게 됩니다.
'외교적'으로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그 유명한 거란 1차 침공 및 서희 담판을 통해
목종 8년 이후로 고려와 거란 간의 교류가 시작됩니다.
이는 거란의 2차 침공으로 끊어지게 되지만요.
이 이후로 고려와 거란 간 교역은 사행무역使行貿易이 주가 되었습니다...만
사실 고려와 거란 간 대부분의 무역은 밀수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애초에 양국간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았던 것도 있고,
거란은 내부 경제적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고려와 거란 간 교역은 국가 대 국가보다는 상인 대 상인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루어진 양국간의 교역품을 살펴보자면
고려에서는 금, 은, 공예품 등을 주로 수출했고
거란에서는 비단이나 양 등을 주로 수출했죠.
이렇게 고려와 거란 간에 무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교역의 범위는 크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밀수'라는거 보시면,
애초에 고려는 거란과 사적으로 교류할 생각은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굳이 거란에서 구할 물건이 있었다면 직구 말고 밀수를 했다는거죠.
고려도 북방민족에서 나오는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냐고요?
아 물론 필요했죠. 근데 고려는 더 싸게,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여진족이요.
이 시기 여진족은 세력이 굉장히 약했기 때문에 더 싸게 물건을 구할 수 있었는데,
굳이 재수없는 거란족과 교류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오늘의 고려사 글은 직구 이슈 보고
교역과 관련된 글을 써봤습니다.
궁금한 거 있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