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생애을 보자..
“수상도 할만하다”는 국왕의 평가대로 최윤덕은 출정을 마친 직후인 세종 15년(1433) 5월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마침내 정승에 올랐다. 열 달 뒤에는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세종 16년 2월). 58세 때의 일이었다.
최고의 문반직에 오른 노년의 대신이었지만 그는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출동했다. 우의정이 된 지 한 달 만에 야인이 다시 침범하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로 나갔고, 세종 27년(1445) 7월에도 서북면 변경에서 야인의 침범이 발생하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출정했다. 이때 그는 69세의 완연한 노령이었다.
이런 행동 자체가 가장 뚜렷한 증거겠지만, 그는 오직 국방에만 전념하는 무장으로 자처했다. 우의정에 임명된 직후 그 자리를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는 그런 견결한 자세를 또렷이 보여준다.
“의정의 직책은 본래 용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륜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신은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외적을 막아 북방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은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마음과 힘을 다할 것입니다(세종 16년 2월 5일).”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최고의 자리에, 그것도 문반 위주의 사회에서 무반으로 올랐지만, 자신에게 더욱 합당한 직무가 있다는 이유로 사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방금 보았듯이 69세에도 평안도로 출정했다는 사실 등은 이때의 발언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좌의정일 때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변방 방어와 군비 강화를 건의한 24개항의 비변사의(備邊事宜)는 그의 국방 정책이 집약된 문건으로 평가된다(세종 17년 4월 13일).
일흔의 노장이자 재상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궤장(几杖,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하사한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은 직후인 세종 27년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실록의 졸기에서는 그가 “순진ㆍ솔직ㆍ간소ㆍ평이한 성품에 용략(勇略)이 많아 한 시대의 명장이 되었다”고 상찬했다(세종 27년 12월 5일). 세종 때 그의 위상과 공로는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허조(許稠)ㆍ신개(申槩), 이조판서 이수(李隨)와 함께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사실이 웅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윤덕 [崔潤德] - 북방 개척에 공헌한 조선 전기의 명장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죽기 몇개월전까지 변방에 오랑캐 토벌하고 와서
몇개월뒤에바로 죽은 무장..
(IP보기클릭)183.107.***.***
(IP보기클릭)175.200.***.***
문신쪽에는 황희 였다면 무신쪽은 최윤덕이였다고 보면 되서 최윤덕 후임으로 변방 보던게 그 김종서 .. | 24.04.30 03:11 | | |
(IP보기클릭)175.200.***.***
변방 오랑캐 믿고 맞길수있는 무장 | 24.04.30 03:1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