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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화 관련해서 얼마 전에 썰 풀었던 유게이임.
이 글에서 소개하는 설은
일본 언어학계를 중심으로 나오는 상당히 골때릴 수 있는 주장인데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상당히 좋은 발상일 것 같아서 소개하는 설이야
완벽하게 옳은 주장도 아니고 민속학이나 역사학에서는 정설이 아니라고 보지만
어디까지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보는 게 좋음
백제사가 한일 공동의 고대사라는 건 꽤 더 메이저한 주장이고 근거도 많은데
그쪽은 나중에 소개하려고 함.
고대 신라와 왜는 서로 관계가 깊었다고 보는 가설이야.
1. 석탈해는 왜인(야마토인)이다?
석탈해 관련 가야/신라 기록을 모으면 이렇게 돼.
여기서 주목해야할 건 "다파나국"의 왕자라는 점이야.
현대 한국인은 이 내용을 보면
왜국 동북쪽 1000리를 보고
캄차카 반도를 이야기하는건가? 생각하게 될 거야.
근데 당시 왜국이라고 생각한 곳은 일본 열도 전체가 아니야.
애초에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게
왜=일본 전체
신라 고려 백제는 교과서에서 보여주는 4세기 정도의 강역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분인데
왜는 6세기까지만 해도 일본 관서 일부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삼국은 4세기에 와야 우리가 아는 정도의 거대국가가 됨.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왜의 위치는 여러 제설이 갈리지만
지금도 야마토 신앙의 주축인 이즈모거나
후쿠오카라는 설이 있어.
전자는 일본 내 기록들이 뒷받침하고
후자는 물질적 유물이 뒷받침하지.
동이전 왜조의 설명을 기반으로 하면
대마국(쓰시마)의 건너편에 있는 후쿠오카/이즈모 양쪽 모두 대응되는 걸 알 수 있어.
거리적으로는 후쿠오카가 가깝지만
해류 때문에 쓰시마에서 배를 띄우면 이즈모 앞바다에 닿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정설이 갈리니까 넘기면
이 후쿠오카, 이즈모 동쪽에 꽤 오래전부터 고고학적 자료가 존재하고
다파나국의 설명에 부합하는 유적이 있어.
후쿠오카로부터 해안가를 거쳐 500km 떨어진 효고시 안의 분지 지대
단바 시야.
다파나국과 발음적으로 유사성이 있는 경우지.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호공의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 혁거세조
혁거세왕 38년 2월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왕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이 기사를 보면 호공은 왜인 출신이란 걸 알 수 있어.
즉 다파나국 = 단바 가설을 채용하면
석탈해는 일본쪽에서 넘어온 집단으로,
가야를 들렀다가 문전박대당하고 신라에 들러 호공의 직위를 찬탈하고 왕위에까지 올랐다
는 결론이 돼
그런데 왜 가야-신라 순으로 움직였을까?
반도 일본어 가설은 알렉산더 보빈이 주장했는데,
해당 주장이 어디까지 옳은지를 빼고
이 "왜인 집단"이라는 게 삼국시대 중기 이후의 왜, 일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특정한 민족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왜인 집단이 가야에도 있었다는 전제로 보면
석탈해의 이동루트가 이해하기 쉬워짐
고대 백제의 왜인 집단에 대한 유물발굴에 대한 오늘 올라온 유게 베스트 글
삼국시대 초기의 언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말이 통하고
백제와 왜는 말이 통하나
고구려와 왜는 백제 사절이 필요하고
신라와 백제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등 일관성이 없긴 하거든.
여기서 일부 정보만 뺴서 보자.
석탈해는 왜와 언어가 통하는 다파나국에서 왔고,
왜와 언어가 통했으리라고 추측되는 가야 지역과 접촉했으나 왕권 혹은 직위를 얻지 못하고 충돌 후 쫓겨나
언어가 통하는 호공과 접촉을 했고
신라 왕실에서의 호공의 자리를 뺴앗아,
유리 이사금 때 왜와 우호를 맺고
이 우호와 권력을 바탕으로 신라 왕의 자리에 올라
이후 백제/마한/가야와 전쟁을 벌였음.
이 마한과의 전쟁은 말그대로 마한 전체와 전쟁을 벌였다기보다는
마한 소속의 어떤 나라랑 전쟁을 벌인 걸 확대해석했다고 보는 게 좋음
낙랑군 관련해서도 삼국사기/유사 초기엔 이런 기록들이 잦거든.
이 자료를 모아서 보면
석탈해는 일본 열도 쪽에서 넘어온 사람이고
자기 나라에서 권력을 뺏겨 반도까지 망명해와 거기서 성공한 사람이 됨.
2. 일본 신화 짚어보기
이제 반대로 일본 설화를 짚어볼 거야.
먼저 스사노오를 볼까
가장 일본 측에 가까운 자료를 보자.
스사노오는 타카마가하라에서 이자나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바다를 다스리라는 명을 거부했다가 추방되어 신라 의 소시모리로 쫓겨남.
신라요?
이거 일본 왕실이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신화에서
자신들의 삼신 중 하나이자, 왕권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야마타노오로치 설화의 시작인 스사노오를
"신라"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음.
이 비밀을 풀 만한 다른 신화를 건드려 보자.
阿加流比売神(아카루히메노카미)
신라의 아그누마의 늪에서 여자가 햇빛을 무지개처럼 받으니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거 주몽 탄생 설화랑 시작부터 동일한 게 보이지?
아카루히메란 이름도 재밌는데
이걸 일본어적으로 밝은 아가씨 혹은 공주로 해석한다면
똑같이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어원(밝은해, 붉은해)와도 일치하는 걸 확인할 수 있어.
이제 일본 신화의 중심인 니니기의 천손강림을 보자.
구지후루타케에 내려와
한국을 향하고 아침해도 석양도 잘 비치는 좋은 나라다.
구지후루타케?
하늘에서 신이 내려온다?
문종(文宗)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②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알을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 후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었다. 여섯 알은 모두 여섯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절하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곧 은나라 천을(天乙;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은 용을 닮아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8채로 요(堯)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곧 우나라 순(舜)임금과 같았다.
③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하였다.
또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가서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바다,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④ 왕은 임시로 대궐을 짓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소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
구지라는 땅에 내려옴
이거 완전히 가야 수로왕 신화와 일치하지?
그래. 일본 각지에 남은, 일본서기에 수록된 신화 상당수는 고대 한반도에 있던 신화의 조립의 결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일본의 주요 신화(기기신화)의 경우
적어도 야마토 신화, 이즈모 신화를 비롯한 여러 개의 신화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인위신화라는 설이 있는데
그 중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즈모 신화에서 신라가 몇번이고 언급되는 점
스사노오의 신화해석의 문제 : 한반도와의 연계를 중심으로, 박규태, 한양대학교
그리고 기기신화의 3신기가 제례/전쟁/산업에 연관되어있다는 점 등으로
인공신화 혹은 그에 준하는 신화인 게 정설이야.
극단적인 일본/한국 학자들은 아예 일본 신화의 네노쿠니를 한반도로 비정할 정도고
한반도에서 넘어온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던 조상남신이 "스사노오"의 형태로 야마토인에게 받아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일본=왜가 한 나라였다는 생각을 버리고 보면
이 신화의 이상함을 이해하기 쉬워.
일본 지명에서 신라/고려/한 관련 지명이 확인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에 대한 픽업 이미지
(영상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EwLrtntJfCc)
(이 유튜버의 주장은 재밌지만 정설도 주류가설도 아니니 걸러서 들으세요)
신화가 정립되던 1-3세기는 일본은 명백하게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고 보면 됨.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언제부터 신라와 왜가 분리되었는가?를 동의하는 부분은
3세기 중반의 신라의 귀족 장군 석우로가
왜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모욕했다가 왜에게 살해당한 때부터.
첨해왕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피난해 있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삼국사기>
신라 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뼈를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죽은 왕의 처는 신라인과 공모하여 일본 대사에게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속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자 곧바로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대사의 시신을 왕의 시신 밑에 묻고 "존비(尊卑)의 순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군대를 보내자 신라인들이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여 일본군은 철수했다.
<일본서기>
양쪽 표현이 다르지만 우류조부리지간은 우류(우로) 조부리지간(서불한)으로 해석되고
일본서기 및 남아있는 백제본기 인용서 등에서는 왕족도 왕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음.
(8세기 일본의 자국 찬양 윤색의 결과로 보이기도 함)
특히
4세기 말 신라와 왜의 완전한 외교적 결렬이 이루어지면서
왜가 신라를 침공하고 약탈한 신라-왜 전쟁부터는
신라와 왜의 관게는 공식적으로 끊어진 것으로 보고 있어.
3세기-4세기를 지나면 신라,고구려는 자신들의 민족성을 어느 정도 정의한 중앙집중형 국가로 변하게 되는데
백제/가야는 이 시점까지도 단일 국가의 정체성보다는 연합국의 형태를 강하게 띄는지라
백제-왜 관계는 백제 멸망까지도 강한 동맹국이거나
아니면 백제 자체가 일본의 소국들 +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들의 연합체제인 채로 쭉 이어져온 거라는 주장도 있지.
일본이 완전히 백제 아래에서 벗어나는 건 백제 멸망 후 10년이 지난 670년,
자신들을 "일본"이라고 정하고 각국에 사절을 보낼 떄야.
일본서기도 이 시점에 만들어졌고
이즈모풍토기 등에서 확인되듯이 기기신화도 이 시절에 각지의 신화를 짜집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이 부분은 나중에 다룰게!
추가) 쪽지로 보빈은 백제어.고구려어가 고대 한국어로 본다고 지적해주신 분이 있었는데요
보빈은 다른 논문에서는 고대 백제가 이중언어 구조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 논문을 인용한 논문을 바탕으로 적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야기한 대로 보빈의 주장을 이용한 일본 언어학계 + 한국 일부 고대사학계 논문 베이스로 소개하는 내용이라서요.
실제로 본문에 제가 소개드린 일본 언어학 연구자가 정리한 3세기 보빈 가설에 따른 강역도에는 신라, 가야 일대만 고대 일본어로 표시되어 있죠.
언어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고대 일본어 고대 한국어 연구는 내셔널리즘의 영향도 있지만
사학 연구, 고대 지역명 연구, 언어음성학적 연구가 다 결과가 달라서 정설이 휙휙 바뀌는 동네라서요
(저는 이쪽이 주 전공이 아닙니다. 단지 언어 자동처리 중간에 덤으로 한 거라 학부생보다 깊은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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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옛날 이야기를 지금의 국가나 민족관하고 똑같이 보면 안돠고, 그만큼 한반도랑 일본 사이엔 많은 역사적 연결점이 있다는 장도로 해석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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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사료도 적은데 양쪽 다 정치적 의미가 너무 커서 연구하기가 참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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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고대라고 하는듯 따지면 사로국이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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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크랩해 놔야겠다. 일 끝나고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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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의적으로 고대 신라라고 이해하기 쉽게 적었는데 고대 삼국시대는 간단히 말해서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태조왕, 신라 내물 마립간 이전을 지칭하시는 분들이 많긴 해요 우리가 아는 중앙집권형 국가는 이 언저리부터가 아닐까?로 보는 부분이 많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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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명백하게 백제와 독립국가로 나오는 건 위에서 말한 대로 670년이긴 합니다. 그 이전엔 야마토 조정이 백제에 낑겨서 사절을 보내는 일이 더 많았다고 보구요. 이게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해서 무령왕으로 고찰하는 논문들이 있는데, 이게 진짜 양국 내셔널리즘을 아주 강하게 건드리는 거라 어떤 논문이든 도중에 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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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초기때부터 왜의 약탈이나 침략 기록이 나오지 않음? 왜국=야마토국 구분을 사서에서 잘하지 않는건 둘째치더라도 야마토 조정과 신라간 관계는 거의 얘기가 안나온거 같은데. 차라리 백제나 가야가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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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크랩해 놔야겠다. 일 끝나고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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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궁금하면물어봐
편의상 고대라고 하는듯 따지면 사로국이 맞겠지 | 24.03.08 15:4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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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 24.03.08 15:4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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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의적으로 고대 신라라고 이해하기 쉽게 적었는데 고대 삼국시대는 간단히 말해서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태조왕, 신라 내물 마립간 이전을 지칭하시는 분들이 많긴 해요 우리가 아는 중앙집권형 국가는 이 언저리부터가 아닐까?로 보는 부분이 많아서요 | 24.03.08 16: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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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옛날 이야기를 지금의 국가나 민족관하고 똑같이 보면 안돠고, 그만큼 한반도랑 일본 사이엔 많은 역사적 연결점이 있다는 장도로 해석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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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사료도 적은데 양쪽 다 정치적 의미가 너무 커서 연구하기가 참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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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대사는 일단 지형부터가 달라서 현재 지도 들고 이야기하는게 좀 힘듬. | 24.03.08 15:5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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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초기때부터 왜의 약탈이나 침략 기록이 나오지 않음? 왜국=야마토국 구분을 사서에서 잘하지 않는건 둘째치더라도 야마토 조정과 신라간 관계는 거의 얘기가 안나온거 같은데. 차라리 백제나 가야가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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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왜 관계에서는 저 호공, 석탈해 관련 신라 극초기 기록들과 그 이후가 꽤 다르거든요. 신라에서 석씨 왕조가 빠르게 몰락한 걸 생각하면 왜와의 관계를 주로 삼던 석씨 가문의 몰락의 결과가 왜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24.03.08 16: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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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존나 고대에는 한반도 특히 남부와 일본 사이에 뚜렷한 민족적 문화적 구분이 없었을 수도 있음 | 24.03.08 16: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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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들의 국경이란 지금하고 똑같이 생각하면 안되는 개념이라 | 24.03.08 16: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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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명백하게 백제와 독립국가로 나오는 건 위에서 말한 대로 670년이긴 합니다. 그 이전엔 야마토 조정이 백제에 낑겨서 사절을 보내는 일이 더 많았다고 보구요. 이게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해서 무령왕으로 고찰하는 논문들이 있는데, 이게 진짜 양국 내셔널리즘을 아주 강하게 건드리는 거라 어떤 논문이든 도중에 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24.03.08 16:0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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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 묘비를 보면 옛적에 있던 나라를 일본이라고 나와서 제기된 주장임. | 24.03.08 16:1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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