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의 트레이너 자격 시험은 매우 까다롭다.
재수는 기본이요 4수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무시무시함은 더 이상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시기에 트레센에 들어오게 된 동기들이라고 할지언정
동갑내기인 사람을 찾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첫 시험에선 악명대로 쓰디 쓴 고배를 마셨지만
두 번째 시험에선 와신상담의 마음가짐으로 노력한 결과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앙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올해 들어온 트레이너들 중에선 단 하나뿐인 최연소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신인 트레이너 환영회에 참석했건만
나와 동갑인 녀석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첫 시험에 바로 합격했다나 뭐라나.
나조차도 재수를 하게 만든 시험에 바로 합격한 것도 모자라 나랑 동기라니.
부풀었던 내 자신감을 한방에 터트려버린 기고만장한 녀석이 누군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 녀석의 자리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구석진 곳에 있었다.
고개를 숙인채로 말도 없이 트레이너 뱃지를 만지작거리는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인사를 건넸다.
"여어, 아직도 중앙에 온 게 실감이 안나서 뱃지를 보고 있는거야?"
암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에 "여어" 는 좀 많이 깼나?
하지만 이미 질러버린 건 어쩔 수 없다. 그대로 가는 수 밖에.
"앗."
하지만 내 무안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사를 듣고 놀란듯한
그 녀석은 짧은 소리와 함께 바닥에 뱃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칫. 칠칠치 못한 녀석이구만.
그러게 누가 말도 못들을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래?
뭐, 내 잘못이 맞는 거 같기도...하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연찮게 내 앞으로 굴러온 뱃지를 못본척 할 수는 없었으니
그대로 뱃지를 주워 그 녀석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뱃지를 주워들어 잠시 살펴보자
그 녀석이 보고 있던 뱃지는 이미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듯이
금빛 광택을 잃은지 오래에 여기저기 잔 상처로 가득했다.
설마.
그런거였나.
짜증나는구만.
어디 명문 트레이너 가문 도련님이라도 되시나 ㅂㅈ?
그럼 이건 은퇴한 양반이 가지고 있던 뱃지겠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탐탁지 않지만
건방진 도련님에게 뱃지를 돌려주려던 찰나.
"지금 당장 그거 내놔!!"
상상 이상의 거친 반응과 함께
녀석은 내 손 안에 있던 뱃지를 가져갔다.
뭐지 이녀석.
왜 이렇게 화가 난거야?
"아...죄송합니다. 무척 중요한 물건인지라 그만 화를 내고 말았네요."
"아니, 이쪽이야말로. 떨어졌다고 해도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만진 쪽이 나쁘지."
허나 아까의 분노는 착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하는 녀석의 태도를 보자
나 역시 누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내 잘못이기도 하니.
그 이후로는 간단히 통성명과 기본적인 정보 교환을 끝으로 헤어졌지만
뭐랄까,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명문가 도련님도 아닌데다 그 뱃지는 자기게 맞다니.
어떻게 하면 그 뱃지가 벌써 그렇게 되는거냐.
---
어느새 시간은 흘러 내게도 담당하는 아이가 생겼다.
이름은 마야노 탑건.
재능은 확실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일면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막상 할 때는 누구보다 멋지게 해내는 영 종잡을 수 없는 아이.
물론 아직 본격화가 오지 않아 데뷔를 할 수는 없지만.
마야노와 함께 본격화가 오기를 기다리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나가던 어느 날.
참 간만에 녀석과 다시 마주쳤다.
게다가 전보다 더 상태가 나빠 보이는 안색으로.
그런 녀석의 담당인 후지 키세키가 뒤쫓아 걸어가고 있었으나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있는 평소와 달리 걱정스럽다는 듯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은 뒤를 좀 보고 걷지 그래?"
"네? 뒤라니...후지? 괜찮아? 어디 다친거 아니지?"
마치 판다라도 된 듯 짙은 다크서클이 얼굴에 내려앉은 녀석은
내 말을 듣자마자 후지의 얼굴을 보더니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원.
"트레이너씨...? 보다시피 나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그것보다 트레이너씨는 괜찮아? 요새 제대로 잠은 자고 있는거야?"
"미안. 일 말고도 요새 잠을 설치는 일이 많네.
괜찮아, 후지만 다치지 않는다면야."
"트레이너씨...?"
...못봐주겠네 정말.
우리 어린이보다 더 어린이 같구만.
"받아, 원래 내가 마시려고 아껴뒀던 거지만.
네 꼴이 말이 아니니까 특별히 주는거다."
금색 편자모양 뚜껑이 인상적인 바이탈 65.
마시면 피로가 눈녹듯 싹 풀리는 마법 같은 드링크.
타즈나씨가 쉽게 나오는 물건이 아니니 정말 힘들 때 마시라고 주셨던 거지만.
지금 눈 앞에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녀석이 있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감사합니다...하지ㅁ..."
"감사 인사는 됐고, 담당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너 자신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아프면 같이 아픈 법이야. 저번에 마야노가 감기 걸렸을 때 나도 간병하다가 옮아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쬐그만 녀석이 밤에 추우니까 일찍 자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누누히 당부했는데 진즉 말 좀 듣지..."
"저기, 마야노의 트레이너씨? 본심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는데?"
"앗! 마야노가 알면 한동안 삐질텐데! 잊어! 앞 부분만 기억해!
그거랑 또 뭐냐 후지! 우리 마야노가 늘 신세지고 있다. 고마워!"
정말이지.
한마디만 하려고 했더니만
갑자기 생각나서 마야노 얘기를 절반 넘게 해버렸잖아.
혹여나 마야노가 들어버릴까 겁이 난 나는 그대로
드링크를 옆에 있던 후지에게 건네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
.
.
"...참 한결같은 사람이네."
"응? 트레이너씨. 마야노의 트레이너씨랑 아는 사이?"
"...아아. 떨어트렸던 내 뱃지를 돌려주시려던 좋은 분이셔. 물론 내가 먼저 화를 내고 말았지만..."
"트레이너씨는 은근 덜렁이구나? 나랑 만났을 때도 뱃지를 잃어버렸었잖아?"
"정말, 그런걸지도."
---
이후에도 녀석과는 종종 마주쳤을 때 드링크를 마신건지 안 마신건지는 몰라도 다크서클은 조금 줄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최소한 적정 수면 시간 정도로 잠은 자고 다니는 모양이지.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초조한 표정 만큼은 변할 기미가 없었다.
왠지 마음에 걸려서 몇 번 더 말을 걸어봤지만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얼버무릴 뿐,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보다 당신이 보기에 후지의 상태는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는건 대체 뭔지.
당연히 후지 키세키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우마무스메 중에 하나.
이대로 클래식 전선에 참전하기만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 압박이 되겠지.
이렇게 답변했건만 돌아오는 건
"그건 저 역시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제가 궁금한 건 후지의 다리 상태입니다.
당신이 보기에 그녀의 다리는 어떤 것 같습니까?" 질문이었다.
"너 말야, 건강염려증이라도 있냐?
뭐 물론 담당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후지는 지금까지 골절은 고사하고 사소한 염증이나 염좌도 겪은 적이 없지.
항상 제 몸은 내팽개치고 담당 건강만 신경 쓰는 누구누구씨 덕분에.
하지만 그렇게 걱정만 하다간 온실 속 화초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저는 상관 없습니다. 후지가 계속 달릴 수만 있다면."
"...그러냐. 모쪼록 무리하지는 말라고."
"아, 그러고보니 탑건양도 곧 모의 레이스가 있죠?"
녀석. 자기 담당 이야기만 하다 갑자기 내 담당으로 화제를 바꾸다니.
이러면 왠지 나도 마야노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것 같잖아.
저번에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가 어린이들에게 인기라고 하니까
"어린애가 아닌걸!" 하면서 의욕을 떨구던 기억 밖에 없는데.
"가끔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말을 잘 듣는다면 말이지."
그 꼬맹이녀석 말을 듣는 꼴을 나는 못봤걸랑!
하지만 뭐어, 이상하게도 이 녀석이 해주는 조언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트레이너가
들려주는 충고처럼 언제나 틀리는 일 없이 아주 실속 있고 유용한 조언들만 가득했었지.
참고해둘까.
.
.
.
"뿌뿌~ 트레이너짱! 오늘의 마야는 왠지 앞에서 달리고 싶은 기분인걸!"
"도주로 달리고 싶다는 말이니 마야노? 당연히 안...!"
녀석의 말처럼 모의 레이스에서 마야노는 미리 정해두었던 선행이 아니라
도주로 달리고 싶다는 말을 대뜸 출주 직전에 내게 통보하고 있었다.
칼같이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문득 녀석의 말이 떠올라서 잠시 이마를
두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마야노는 제멋대로인 기분파긴 하지만
가능성이 0인 일에 무턱대고 시도하는 바보는 아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마야노. 가장 먼저 착륙할 자신은 있어?"
"I copy!"
"뭐야, 나 대신 서류 복사 해주게?"
"우우~레이디를 놀리지 마, 트레이너짱!"
"그래 그래.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달리고 와."
라고 말하며 게이트로 향하는 마야노를 지켜봤지만
마음 한 구석의 불안한 생각은 영 가시지 않았다.
탕-!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자, 그 생각이 기우라는 것을 증명하듯
마야노는 그 누구보다 빠른 스타트를 끊으며 강렬하게 선두를 차지했고
그대로 이변 없이 1착으로 레이스를 마무리 지었다.
바로 달려와서 방방 대며 엉기려는 마야노는 그렇다 치고
그 녀석, 항상 후지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마야노의 성격은 어떻게 안거지.
뭐 이겼으니 됐나.
나중에 밥이라도 한끼 사줘야겠구만.
---
시간은 또 다시 흐르고 흘러
마야노도 본격화가 찾아오기 시작하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마야노를 데뷔전에 출주시켰지만
첫 데뷔전은 5착.
두 번째로 도전한 미승리전도 3착.
초라한 성적표에 나는 설마 이대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런 나와 달리 후지와 작년부터 달리기 시작한 녀석은
그야말로 승승장구라는 말이 딱 맞게 승리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녀석의 담당인 후지가 사츠키상의 전초전인 야요이상에 출주하는 날.
녀석과 나의 트레이너로서의 위치는 이제 큰 차이가 나지만
서로의 관계는 의외로 이것저것 잡담을 자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친구의 담당이 출주하는 레이스를 놓칠 수야 없지.
게다가 첫 1년부터 G1을 딴 후지 키세키라면 더욱 더...
"트레이너짱...마야를 제대로 보고 있는거 맞아?"
이런.
들떴다는게 표정에 너무 티가 났나.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지와 마야노의 차이도 나와 녀석의 차이와 비슷하니까.
그럼 어디.
"꺄앗!? 트레이너짱. 갑자기 뭐하는거야!?"
"목말. 이러면 더 잘보이지?"
"마야는 어린애가 아닌걸!"
"하지만, 보고싶지? 후지의 레이스."
"...응."
"이길거에요. 분명. 하지만..."
"우왓."
비장의 수라고 할 수 있는 목말로 마야노를 진정시키고
본격적으로 레이스를 관람할 준비를 하려던 찰나.
바로 옆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담당이 이긴다는 확신이 담긴 곧은 목소리였으나
그 다음에 오는 말은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져, 어딘가 불안하게 들려왔다.
"설마 너 또 걱정하는건 아니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있다고.
네 담당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해.
그러니 넌 후지가 다칠 걸 걱정하는게 아니라
클래식 전선을 어떻게 해쳐나갈지를 걱정하는게 어때?
뭐, 이렇게 말하는 나는 마야노의 미승리 탈출부터 고민해야 하지만...."
"잠깐, 트레이너짱! 아까 마야에 대해 뭔가 말하지 않았어?"
"아, 레이스 끝나면 뭐 먹을지 얘기한거야!
...아무튼 뭐 그런거다."
"후지의 클래식 전선...그렇네요."
이럴 줄 알고 마야노를 일부러 목말 태워서 위에 뒀지롱.
그것보다 녀석, 걱정이 너무 심하다니까.
주니어 시즌에 G1을 따놓고 뭘 걱정하는건지 원.
.
.
.
레이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후지의 압승이었다.
관중석을 향해 멋들어진 인사를 한 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마야노는 언제쯤 저렇게 성숙한 레이디가 될까...라는 생각을 하던 도중
옆에서 얌전히 레이스를 지켜보던 녀석이 갑자기 울타리를 넘어 후지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야!
미안. 마야노 잠시 보고 올게!"
나 역시 목말을 태워주던 마야노를 아래로 내려주고 녀석의 뒤를 쫓아갔다.
아무리 담당이 이긴게 기쁘다지만 터프로 갑자기 난입하는 건 매너 위반.
이런 상식을 모르는 녀석도 아닐텐데 대체 왜 저러는 거람.
아니나 다를까 다급하게 달려온 녀석을 본 후지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트레이너씨...? 갑자기 터프엔 왜...?"
"후지...후지...괜찮은거야?
다리...아프지 않아? 위화감 같은 건 없고?"
"으음...전력으로 달렸으니까 피로는 있지만
아프지도, 위화감도 없이 깔끔한 상태야."
"아...아아...아아아아....!!
다행. 다행이야...다행이야...!
염증이 생기지도, 부러지지도 않았어.
잘...돌아왔구나 후지...!"
그렇게 녀석은 터프에 난입한 시점부터
관중들의 시선은 신경쓰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대로 쓰러지듯 후지에게 안겼다.
"잘, 다녀왔어. 트레이너씨."
그런 녀석을 후지는 짧은 인사와 함께 그저 푹 안아줄 뿐이었다.
다 큰 어른이 담당하는 아이에게 안기는건 기자들의 먹잇감이 될게 뻔하지만
녀석이 후지에게 안겨 우는 표정은 마치 정말 오랫동안 감옥에 억울하게 갖혀있던
죄수가 풀려나 자유를 만끽하는 것만 같아서, 그 누구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기자들이 셔텨 소리를 멈추지 않고 퍼부었지만.
그렇게 녀석은 다음 날의 뉴스 한 면을 커다랗게 장식하며 야요이상을 마무리 지었다.
---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야요이상 이후.
녀석은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나쁜 방향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묶여있던 족쇄에서 해방된 것마냥
표정에서 여유가 느껴지고 좀 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었다.
처음엔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싶었지만
가면 갈수록 이것이 녀석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녀석의 변화에 부응하듯 녀석의 담당인
후지 키세키는 사츠키, 더비를 무패로 승리했다.
뭐 우리 마야노도 드디어 미승리를 탈출하고
거기다 1승을 더 추가했지만 말이야!
이제 녀석에게 남은 건 국화상 뿐.
혹여나 녀석이 또 후지의 다리를 걱정할까 신경 쓰여 찾아가 봤더니만
"이젠 괜찮아요. 후지는 더 이상 부러질 리 없으니까.
남은 건 후지에게 왕관을 어떻게 씌어주냐만 남았죠."
"...걱정한 내가 바보 같구만. 그나저나 괜찮겠냐?
후지의 거리적성은 장거리에 적합하진 않을텐데."
"후후, '키세키' 라는 이름에 걸맞는 기적을 선사해드리죠."
"보통 그런 대사 하는 녀석이 지던데 말이지. 뭐 지켜봐주겠어.
내년에 우리 마야노도 클래식 전선에 참가하니까 말이지."
"똑똑히 봐두시죠, 제 애마가 왕좌를 차지하는 모습을...!"
말 그대로 녀석은 자신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야요이상 이전에 느껴졌던 불안과 자책의 기운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호언장담한 대로 후지는 거리적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레이스인 국화상을 제패해내는데 성공했다.
무패의 3관마가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아쉽게도 마야노는 사츠키상과 더비에 출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화상에 출주할 기회를 얻어 클래식 전선의 마지막 1관을 차지할 수 있었다.
국화상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기쁨에 가득찬 나와 마야노는 홧김에 저지르고 말았다.
친구로서 국화상을 관전하러 와준 녀석과 후지를 둘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음은 아리마에서 보자! 짜샤!!"
"아리마에서 승부야, 후지씨!!"
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물론 직후 마야노와 눈을 마주친 나는 "이거 일났네." 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무패의 삼관마라는 타이틀을 가진 후지 키세키와
그런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녀석은 잠시 같이 웃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국화상을 이겨서 기고만장한 건 이해하지만, 그쪽이 도전자라고?""
우와, 이쪽은 타이밍도 말도 다른데 너흰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똑같냐.
당당히 응수한 후지와 녀석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마야노와 나 역시 다음 날의 신문 한 면을 크게 장식했다.
---
"왜 못이기는거냐고 제엔장...!!"
"후후, 탑건과 기적이 붙으면
당연히 기적이 더 강한게 아니겠습니까?"
"말장난 하지마 임마!"
뭐어, 대충 알겠지만
마야노는 그해 아리마 기념에서 후지에게 아쉽게도 패배.
그 이후로도 그녀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라이벌인 브라이언은 한 번 이겼다고!
그 브라이언도 후지를 잡겠다며 맹훈련을 하는 중이지만.
녀석과 후지는 어느새 "기적의 삼관마." 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야 어느 레이스든 항상 기적 같은 승리를 거머쥐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후지는 녀석과 특별한 관계가 된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 애정 행각은 적당히 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마야노가 뭘 보고 배울거라 생각하는거냐.
...마야노?
에이. 아직 이르다.
게다가 나랑 나이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녀석과 길을 걷던 도중, 탱그랑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닳고 닳은 대다 떨어진 충격으로
반쪽으로 쪼개져버린 트레이너 뱃지였다.
"얼마나 뱃지를 험하게 쓴거냐 임마."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각난 뱃지를 주워 녀석에게 돌려주려고 팔을 뻗었다.
"호오, 이제 화는 안내는거야?"
"그때는...아무래도 여러모로 몰려있었거든요. 이젠 괜찮아요."
내게서 뱃지를 받아간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도 참 많이 변했구만."
"수고했어..."
"엉?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그렇네요.
후지도 멀쩡히 잘 달리고 있고 말이죠."
"이 후지 애호가 녀석. 그러다 후지가 질려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쩔려고."
".너무한거 아녜요!? 후지는...후지는..."
"농담이야 농담. 너랑 후지는 뭐랄까, 운명의 붉은 실로..."
"...촌스러워요 그거."
"시꺼! 암튼 너희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이지."
"헤헤..."
"얼씨구, 칭찬해주니까 헤실헤실하셔? 그건 그렇고 할 말이 하나 있어."
"뭔데요?"
잠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다.
늘 궁금하던 것. 마음 속에 품어왔던 의문.
오늘은 그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너 미래에서 오기라도 했냐?"
"예?"
"아니 그도 그럴게 전에 네가 알려준 지식들은
전부 트레이닝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지.
게다가 마야노에 대해 조언해준 것도 딱 들어맞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후지의 야요이상도 이길거란 걸 확신하고 있었어.
이 정도면 미래를 보거나 미래에서 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게."
"그러니까 말야, 미래에 마야노가 날 덮치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네. 네? 궁금하신게 그거라구요? 다른게 아니라요?"
뭔가 정곡에 찔린 것 같은 반응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이어지는 내 질문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지, 혹시 내가 헛다리를 짚었나?
"엉. 그거 맞는데.
나한텐 엄청 중요한 문제라고. 요새 날 보는 마야노의 표정이 이상해.
후지랑도 뭔가 수군거리고 있고. 솔직히 무서워 죽겠걸랑!"
"...참 한결같은 사람."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봐!"
"아니, 그럴리가 없잖아요. 제가 무슨 우주인도 아니고 어떻게 미래에서 와요.
게다가 탑건양은...뭐 아직 어린애잖아요. 잘 아시면서."
"하긴 넌 우주인같이 생기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도련님같이 생겼지.
아니, 것보다 마야노 얘기는 그렇게 뭉게기냐! 넌 후지랑 꽁냥꽁냥하니까 모르잖냐!"
"그러네요, 몰랐어요. 후지랑 이렇게 있게 될 줄은.
...고마워요. 여기까지 온 건 분명 당신의 덕도 크다고 생각해요."
녀석은 갑자기 뭐에 감격이 올라온건지 모르겠지만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참. 정말 닳아버린 뱃지를 부숴질 때까지 달고 다니질 않나.
갑자기 감사 인사를 하지를 않나. 정말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그래. 나도 고맙다. 덕분에 마야노랑 함께 비상할 수 있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옹냐. 것보다 부숴진 걸 계속 쓸 수는 없잖냐.
새거 받으러 가자. 마침 나도 뱃지가 다 닳아버렸거든."
"새거라...하기사 이제 새걸 받을 때가 됐죠.
그럼, 같이 갈까요?"
"그래. 가보자고,"
새로운 뱃지.
새로운 시작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그것은 결국 눈치채지 못한 마야노의 트레이너도
많은 시간을 되풀이 해온 후지의 트레이너도 알 수 없었지만
틀에서 벗어난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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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물 주인공의 주변인은 어떨까
그래서 썼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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