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9년 음력 10월, 평안감사 이시발이 장계를 올려왔다. 해당 장계는 만포첨사 김응서/김경서의 첩정을 기술하고 있었는데, 해당 첩정은 온성 번호 출신으로서 조선으로부터 가의대부의 직첩을 받은 추장 가음거와 그외 11명이 만포로 와서 전달한 당시 건주의 정보와 동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해당 첩정의 첫 번째 내용은 누르하치의 여허 공략 좌절에 대한 정보였다. 해당 정보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명과 여허의 공조에 관한 소문을 듣고 군을 회군했다고 하며, 명나라의 침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당시 후금의 기록에는 여허를 공략하려 했다가 철수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당시의 정황을 생각해 보건대 여허 공략의 시도 자체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중도에 회군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을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내용은 '오을고다의 반란'에 관한 정보였다. 가음거는 누르하치의 사위 '오을고다'를 이미 죽은 '왕태'의 손자이며 그의 백부가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고 설명한 뒤, 이전에 오을고다의 아비 '마응거'가 누르하치에게 살해당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오을고다와 누르하치간의 사이가 표면적으로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실상 원수나 다름 없는데 그 탓에 이번에 그가 여허, 몽고등과 연대하여 누르하치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오을고다의 처가 이 사실을 알고 누르하치에게 고변하여 반란은 실패, 오을고다와 함께 모의한 이들이 모두 처형되고 오을고다는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1
여기서 오을고다란 누르하치의 어푸 우르구다이를 뜻하며, 왕태는 하다의 군주였던 완 한을 뜻한다. 오을고다의 아비 마응거는 하다의 사실상의 마지막 버일러였던 멍거불루를 뜻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여허 공략 시도와 회군의 경우 타당성이 있지만 두 번째의 우르구다이의 반란의 경우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정보이다. 우르구다이의 반란은 여허 공략의 중지와는 다르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건주의 후신인 후금에서도 기록을 굳이 남기지 않거나 삭제할 필요가 없다. 당장 슈르가치의 전례와 같이, 왕실 인척간에 존재한 불미스러운 일들 역시도 어느정도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후금의 기록에 남긴 하는데 굳이 우르구다이의 반란에 관한 부분만 후금의 기록에서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우르구다이는 이후 뇌물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후금 내부에서 계속해서 중용받았다. 그는 지휘관으로 기용되기도 하고 도당이 되어 집정을 보기도 했다.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이를 이렇게까지 중용하는 사례는 보기 힘들다. 물론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보지리 역시 재차 기용하긴 했으나 그의 반란은 후금의 직접통치영토 외부에서 일어났던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며, 더불어 우르구다이만큼 중용되지도 못했고 실권도 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르구다이의 경우에는 왕공들을 제외하고서는 후금의 내부 통치의 최고위직에 올랐었더니만큼, 만약 그가 정말로 후금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었다면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조선에 전해진 우르구다이의 반란 미수 소식에 관하여서는 몇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우르구다이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누르하치의 지시에 따라 기록이 누락되고 덮어졌고 그로 인해 후금에서는 해당 반란에 관한 이야기가 아예 사라졌으며, 당대에 건주와 소통하거나 내속된 번호들에 의해서 조선에만 해당 반란미수 사건에 관한 정보가 전해져 기록되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이 경우 해당 반란시도가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미수에 그쳤기에 후금의 기록에서는 누락될 수 있었으나, 정보를 알고 있던 번호들에 의해 미수사건의 전말이 조선에 전해졌으리라는 추정이다.
이 경우, 누르하치가 우르구다이의 반란을 묻어버린 까닭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가정으로는 우르구다이의 아내이자 누르하치의 딸인 망구지가 자신의 부친에게 탄원하여 자신의 부군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했을 가능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이 접한 정보에 따르면 망구지야말로 우르구다이의 반란을 누르하치에게 고변한 인물임으로 해당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할 수도 있으나, 망구지로서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부친을 상대로 승산없는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고변을 하고 자신의 남편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청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둘째로 망구지와는 상관없이 누르하치 본인이 우르구다이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그의 죄를 덮어버리고 계속 기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르구다이는 하다의 마지막 계승자였으므로 그 혈통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죽인다면 하다 출신 주민들과 병사, 장수들의 불만과 이탈 행위를 감수해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피해 역시 감당해야만 한다. 당시 누르하치는 울라, 여허와 경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건이 미수로 종결된 바, 해당 사건을 기록에서 일부러 누락하고 우르구다이를 계속 기용했다는 것이다.
우르구다이의 반란 미수 소식에 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우르구다이가 당시 누르하치를 상대로 이반을 일으키려던 다른 인물과 착오되었다는 추정이다. 특히 그 대상으로 유력히 꼽히는 것은 슈르가치이다. 1609년은 슈르가치가 누르하치로부터 이탈을 결심하고 그 행동을 실제적으로 옮기려 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 때 슈르가치는 누르하치에게 가혹한 진압을 받고 본인의 장수와 아들들을 잃은 뒤 본인은 유폐당했다.2
조선에 전해진 우르구다이의 반란 미수 소식과 슈르가치의 이반 정황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우르구다이가 여허와 연대하려고 했다는 것은 슈르가치가 여허와 연대하여 독립을 꾀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며 우르구다이와 협력한 장수들이 먼저 처형되고 우르구다이는 처벌되지 않고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슈르가치의 장수들이 먼저 처형되고 그가 유폐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슈르가치의 이반 미수 소식이, 이반을 꾀했을 개연성이 높은 우르구다이의 이반 미수 소식으로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가음거가 만포에 전했다는 소식에는 '형제의 변고'가 1년 사이에 존재했다는 언급도 존재한다. 해당 '형제의 변고'에 관하여 자세한 것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해당 형제의 변고야말로 슈르가치의 이반에 관한 소식일 가능성이 높음을 생각해 보건대 우르구다이의 이반 소식은 가음거의 보고내에서 슈르가치의 이반과는 구분되는 것 같다. 그로 생각해 보자면 '정보전달자'들이 슈르가치의 이반 미수 사건과 우르구다이의 이반 미수 사건을 동일 사건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또 다른 추정으로는 우르구다이의 반란과 관련한 정보가 애초에 거짓 정보라는 것이다. 사실, 번호들을 통한 정보 탐지는 이전부터 부정확한 면이 많았다. 조선에서도 역시 번호들의 진고에 허언이 많고 온전히 믿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3당장 당시 가음거의 진고와 관련한 치계에서도 '해당 사실이 거짓이든 진실이든'이라는 내용이 언급된 것을 보건대 김경서와 이시발 역시도 해당 진고를 완전히 믿지 않았으며, 이후 또 다른 여진인인 동대내가 허투 알라에 들어갔다 나와 가음거의 진고와 비슷한 정보를 들고 나온 뒤라서야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 이 중에서 여허에 대한 공격 시도는 비록 맥락은 다르나 복수의 정보에서 확인이 되지만, 우르구다이의 이반 미수에 관한 정보는 그보다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로 보건대 건주 쪽에서 동대내와 가음거에게 일부러 잘못된 사실을 전해주거나, 혹은 가음거와 동대내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전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누르하치가 건주 내부 상황의 유출을 딱히 좋아할 리는 없었다. 1608년~1610년 당시 건주와 조선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건주가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과 조선이 명나라와 손을 잡고 건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양측에 발생한 시기가 바로 해당 시기였다.4 건주와 조선간에는 번호규례를 매개로 한 교역관계가 시작되었으나, 그러한 무역관계가 양자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상황을 완전히 완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가 조선에 건주의 내부사정이 전해지는 것을 딱히 좋아할 리는 없었다.
사실, 조선과 건주간 관계가 실제보다 우호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세력의 내부 사정이 지속적으로 유출된다면 과연 군주로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만큼 누르하치로서는 정보 유출을 반길리 없었다. 그렇기에 건주 내부의 정보를 통제하는 동시에 가음거와 동대내에게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유출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더불어서 가음거와 동대내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들이 일부러 우르구다이에 관련하여 잘못된 정보를 전했을 가능성 역시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능성의 경우 조선에 전해진 누르하치의 여허 공격 중단에 관한 소식 역시 그 사실성을 의심해 보게끔 한다.
이러한 추정들을 내놓긴 하였으나, 해당 사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것이 진실일지는 확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르구다이가 정말로 난을 일으키려 했을 수도 있고, 애초에 해당 정보 자체가 소문이 부풀려진 거짓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후금의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우르구다이의 이반'과 관련한 기록이 조선에 있다는 점에서 해당 기록이 상당히 흥미롭다는 점이다.
1.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음력 10월 13일
2.만문노당 기유년 음력 3월, 청사고 슈르가치 열전
3.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9월 28일, 선조 39년 음력 1월 23일, 광해군 4년 음력 9월 18일등
4.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즉위년 음력 8월 13일, 8월 17일등/조선왕조실록 광해군 2년 음력 2월 1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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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빌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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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글을 쓰는 사람한테 빌런은 좀 아니지..... 그리고 몽골도 아닌걸..... | 23.04.18 13:0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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