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기록
1월
19일(경진)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각 군대를 점고했다.
25일(병진) 흐림.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色吏)들에 게 벌을 주고 첨사(命使)를 잡아들이고 교수(敎授)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으므로 눌러 유숙했다.
26일(정사)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개이도(介伊島)〔추도(楸島), 즉 싸리섬〕에 이르 니 여도(呂島)〔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배와 방답(防踏)〔여수시 돌산읍〕 마중배가 나 와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에 무기 를 점고하였다.
긴 편전〔長片箭〕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참으로 딱했으나 전선은 조금 완전하니 반가웠다.
27일(무오) 흐림. 아침 점고를 마친 뒤에 북봉(北峯)으로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따로 떨어져 외롭고 위태한 섬이라 사방으로 적을 받게 되었고, 성과 못 역시 지극 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못했으니 어 찌하랴.
느지막이 배를 타고 경도(京島)〔여천군 화정면〕에 이르니 여필(汝弼)과 조 이립(趙而立)과 군관 우후(軍官虞侯)들이 술을 싣고
마중을 나와 함께 즐기다가 해 진 뒤에야 본청으로 돌아왔다.
2월
11일(임인) 맑음. 식후에 배에 나가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고했다.
16일(정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활 6순을 쏘고 신구번(新舊番) 군사들 을 점고했다.
20일(신해) 맑음. 아침에 온갖 방비와 전선을 점고해 본즉,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얼마쯤 완비되어 있었다.
늦게 떠나서 영주(贏州)〔고흥(高興)〕에 이르니 좌우 의 산꽃과 들가의 봄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 같은 경치던가.
22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마친 뒤 녹도(鹿島)로 갔다. 황숙도도 동행했다. 먼저 흥 양 전선소(興陽戰船所)〔고흥읍〕에 이르러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고 그길로 녹 도로 가서 바로 새로 쌓은 문루(門樓) 위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군내에 서는 으뜸이었다. 만호(萬戶)의 애쓴 정성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 흥양 원과 황능 성(黃綾城)과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또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보았다. 촛 불을 밝힌 뒤 이슥해서 파했다.
3월
1일(신유) 망궐례(望闕禮)를 드렸다. 식후에 별방군(別防軍)과 정규병을 점고하고 하번군(下番軍)을 점고하여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16일(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보았다. 각 고을 벼슬아치들과 색리(色吏)들 이 인사차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虞侯), 가수(假守)들도 역시 검칙(檢飭)하지 않기를 이렇게까지 했으니 해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 으니 앞날 일도 역시 짐작하겠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朴夢世)가 석수 랍시고 돌 뜨는 데로 가서 이웃집 개에게까지 폐해를 끼치기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19일(경진)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각 군대를 점고했다
4월
1일(경인) 흐림.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드렸다. 공무 본 뒤에 활 5순을 쏘았다. 별조방(別助防)을 점고하였다.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임대하러 온 군사〕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93년
임진왜란 후 난중일기 기록
11일(정해) 궂은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면서 종일 그치지 아니했다. 울(蔚)이 가는 데 곤란할 것이 걱정되었고 면(葂)의 병이 어떠한가도 궁금했다. 장계를 친히 기초 (起草)했다.
경상 순무(巡撫)〔서성(徐渻)〕의 공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말하였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함께 쏘았다. 윤언침(尹彦忱)이 점고를 받기 위해 왔기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저물녘에 비바람이 크게 치면서 밤새 계속되었다. 충청 수사가 보러 왔다.
23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웠다. 일찍이 사정에 나가 공문을 처결하였다. 원 수사가 와서 군사 기밀을 의논하고 갔다.
낙안 군사, 본영 군사 51명, 방답 수군 45명을 점고하였다. 고성 인민들이 등장(等狀)하였다. 진주(晋州) 강운(姜雲)의 죄 를 다스렸다. 보성(寶城)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은 보다 엄히 신문 하였다.
광주(光州)에 가두어 둔 창평현(昌平縣) 색리 김의동(金義同)은 사형에 처 하라는 군령을 내려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 수사 및 마량 첨사〔강응호(姜應虎)〕가 보러 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오후 8시께 복춘(福春)이 와서 사사로운 얘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경상 순무(巡撫)〔서성(徐渻)〕의 공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말하였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함께 쏘았다. 윤언침(尹彦忱)이 점고를 받기 위해 왔기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저물녘에 비바람이 크게 치면서 밤새 계속되었다. 충청 수사가 보러 왔다.
삼도수군 통제사가 요즘으로 따지면 해군 총사령관인데.
해군 총사령관이 해군 있는곳마다 직접 다 가서 창고 열고 무기랑 갑옷,배 점검하고 잘못돼있으면 곤장 수십대 때려서 사실상 죽임.
육군으로 치면
군단장이 출퇴근없이 옆 내무반에서 영내생활하면서,
중대장, 주임상사, 인사계, 작전장교 역할,
짠밥은 특전사 상사처럼 근무.
가끔 시장도 겸임.
군단 관할이면 옆사단 옆 연대,대대,중대,소대 다 찾아가고 찾아갈때마다
관물대랑 창고,총기보관함을 손수 까서 살펴보심.
압권은
25일(병진) 흐림.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色吏)들에 게 벌을 주고 첨사(命使)를 잡아들이고 교수(敎授)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으므로 눌러 유숙했다"
쓰리스타가 직접 점검 나와서
개같이 털리고 부대간부들은 징계먹이고 영창보내놓고 직무해임시켜서 몸소 부대 개박살 내놓고하는 말이
"너네 우수부대 표창 추천받았던데 윗라인 대체 누구길래 전비태세가 이따위니? 군대 꼬라지 잘돌아간다. 그지? ^^"
그러고선 하룻밤 자고 갔다.
"수사 영감, 식사는 하셨는지요?" -> 꼴보기 싫으니 꺼져라 or 너같으면 밥 넘어가게 생겼냐? -> ㅜㅠ
"수사 영감, 기침 하셨습니까 밤새 강녕하셨는지요?" -> 너네 때문에 강녕하지 못하다 -> ㅜㅠ
대신 전투 나가면 맨날 이기고 이기면 챙겨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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