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2013. 푸른숲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 근현대사를 잘 나타낸 장편소설입니다. '인생'을 비롯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소소한 인간의 가정사를 통해 중국이라는 나라가 겪는 격변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실개천에 떠다니는 작은 나뭇잎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물의 흐름 전체를 파악하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이 소설의 주인공인 허삼관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돈을 모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거나,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거나, 아들이 아파서 병원비가 필요할 때면 헌혈을 해서 피를 판 돈으로 가정을 꾸려나갑니다. 요즘은 헌혈이 그렇게 큰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는 그야말로 목숨을 헐어서 뽑아낸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기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는 그 희생이 더 크게 와닿습니다.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이제 알겠나?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어떤 힘이 피에서 나오고, 어떤 힘이 살에서 나오는 건가요?"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우리 집에서 근룡이네 집까지 갈 때는 별로 힘이 들지 않지. 이런 게 바로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하지만 자네가 논밭 일을 하거나 백여 근 쯤 되는 짐을 메고 성안으로 들어갈 땐 힘을 써야 한단 말씀이야. 이런 힘은 다 피에서 나오는 거라구." - p.31
그 사람이 피를 판 것만 해도 저와 일락이를 위해서, 또 가정을 위해서 한 일이라구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피를 파는 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목숨을 잃지는 않더라도 현기증이 나고 눈도 침침해지고 힘도 빠지잖아요. 허삼관은 저와 일락이, 그리고 우리 집을 위해 목숨마저... - p.119
하지만 한 가족의 일대기가 보여주는 희노애락이나 소소한 가정사에 투영되는 거대한 중국사 -대약진운동과 공영급식소, 삼년 대기근, 그리고 하방운동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언제나 그렇듯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음식 이야기들입니다. 시작부터 삼촌네 밭에 앉아서 수박 두 통에 황금과와 할미과, 오이와 복숭아까지 야무지게 먹어치우며 먹방을 찍던 허삼관은 아내를 꼬실 때는 샤오룽빠오와 훈툰, 매실, 사탕을 사주며 결혼하자고 조르더니 피를 판 후에는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며 돼지간볶음과 따뜻하게 데운 황주 두냥을 꼬박꼬박 챙겨먹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음식들의 향연 속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홍사우러우(홍소육)입니다. 삼년대기근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서 멀건 옥수수죽만 먹으며 겨우 버텨내던 와중에 생일을 맞이한 허삼관이 가족들과 함께 누워있다가 "내가 말로 각자에게 요리를 한 접시씩 만들어줄 테니 모두 잘 들어라."라면서 아들들에게 홍소육을 만들어 줍니다.
자, 그러면 삼락이한테는 홍사오러우 한 접시다. 고기에는 비계와 살코기가 있는데, 홍사오러우는 반반 섞인 게 제 맛이지. 껍데기째로 말이야. (중략) 자, 우선 고기를 끓는 물에 넣고 익히는데 너무 많이 익히면 안 돼. 고기가 다 익으면 꺼내서 식힌 다음 기름에 한 번 튀겨서 간장을 넣고, 오향을 뿌리고, 황주도 살짝 넣고, 다시 물을 넣은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곤다 이거야. 두 시간 정도 고아서 물이 거의 졸았을 때쯤... 자, 홍사오러우가 다 됐습니다... - p.163
허삼관이 말한 방식대로 돼지고기를 요리합니다. 우선 끓는 물에 살짝 끓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찬물에 담가 고기를 쫄깃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겉면이 갈색이 되도록 돌려가며 구워줍니다. 껍질까지 다 붙어있는 오겹살로 만드는거라 껍데기 부분이 구워질 때는 팡팡 소리를 내며 기름이 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자처럼 바삭한 소리를 내는 껍질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면 손이나 팔에 뜨거운 기름 한 두 방울 튀는 정도는 감수할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소육은 중국의 가정식 요리이다보니 그 레시피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오죽하면 이 요리를 주구장창 해먹었던 중국 시인 소식의 호를 따서 동파육이라는 이름의 요리를 따로 만들 정도니까요. 기본적으로 노추(노두유)라는 중국 간장을 쓰는데 검은콩과 당밀로 만든 간장이라 짠맛은 덜하고 단맛이 섞여있는 것이 특징힙니다. 하나 있으면 각종 장조림 만들 때 굳이 설탕 안섞어넣어도 됩니다. 다만 그 색이 워낙 짙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간을 맞추려면 새까맣게 변한 돼지고기를 먹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니 적당히 넣고 짠맛은 소금이나 국산 간장으로 맞춰주는 편이 좋습니다. 노추가 없다면 설탕을 녹여 캐러멜을 만든 다음 간장을 섞어 끓이는 방식으로 인스턴트 야매 노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외에는 오향분을 살짝 뿌리고, 대파와 간마늘과 통후추도 넣어줍니다. 생강은 생강맛술을 넣는 관계로 생략합니다. 그 외에도 특별한 재료라면 빙당, 즉 알맹이 큼직한 얼음설탕이 들어가는데 중국요리를 자주 해먹지는 않다보니 이것 역시 그냥 황설탕을 넣는 걸로 대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조절. 부글부글 끓이는 것이 아니라 기포가 살짝 보글보글 올라올 정도의 약한 불로 오랜 시간 조리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수비드 요리법이랄까요.
한시간 정도 졸이다가 고기를 뒤집어서 한시간 더 졸여줍니다. 동파육은 네다섯시간씩 졸여서 고기를 엄청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지만 홍소육은 두 시간만 졸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비계의 질감과 쫄깃한 고기의 질감이 함께 남아있습니다. 얼추 다 되어간다 싶으면 동파육 받침으로 유명한 청경채도 준비합니다. 한 번 씻은 다음 소금물에 데친 후 찬물에 헹궈서 물기가 빠지도록 채반에 담아두면 됩니다.
고기를 건져내고 남은 국물은 체에 한 번 걸러 채소와 향신료를 뺀 후, 강불에 졸여서 소스를 만듭니다. 고기를 잘라보면 단면이 수육마냥 하얗기 때문에 이렇게 소스를 만들어 붓으로 한 번 발라주면 먹음직한 색깔이 됩니다. 하나씩 놓고 보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가정식입니다. 그러니 허삼관 역시 비판대회에 끌려가 하루 종일 서서 벌을 받아야 하는 아내를 위해 홍소육을 만들 수 있었던 거겠지요.
"난 저 여자한테 맛난 것을 줄 수가 없어요. 내가 맛난 음식을 가져다준다면 그건 내가 저 여자를 옹호한다는 뜻이 된단 말입니다. 밥만 먹게 하는 것은 나 역시 그녀를 비판한다는 뜻이..."
허삼관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허옥란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 안의 밥조차 감히 씹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아주 멀리 사라진 뒤에야 허옥란은 다시 밥을 씹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허삼관이 낮은 목소리로 허옥란에게 속삭였다.
"반찬은 전부 밥 아래 숨겨놨다구.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어서 한 입 먹어."
허옥란이 숟가락으로 밥을 뒤집어보니 과연 아래쪽에 고기가 많이 들어 있었다. 허삼관이 그녀를 위해 홍사오러우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고기 한 점을 들어 입에 넣고는 고개를 숙인 채로 열심히 씹었다.
"이건 내가 몰래 만든 거야. 아이들 몰래 말이야." - p.226
접시에 청경채를 담고, 그 위로 썰어놓은 고기를 가지런히 올려놓습니다. 허삼관매혈기에 등장했던 홍소육 완성입니다. 다만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홍소육은 아이들이나 아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지만요. 생신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댁에 놀러가는 아이들 손에 쥐여 보냅니다. 사실 부자관계라는 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며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엔 좀 멋쩍은 사이인지라 축하편지는 커녕 짤막한 카드 한 장 쓰기도 왠지 쑥스럽습니다. 그냥 이렇게 요리 한 접시 보내드리는 걸로 은근슬쩍 표현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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