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태양이 햇빛을 내리꽂는 수면 위와는 반대로, 수면 아래 오르카 호 함장실은 프로젝터 불빛 이외에는 아무런 광원이 없었다.
함장실에선 지휘관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각양각색 다양한 미모의 여성 바이오로이드들과 남성 인간이었지만, 단호한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이 지휘관으로서의 카리스마라는 공통점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만 남성의 뒤에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소녀만이 동떨어져 있다.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닫고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의 주제는 항구 점령 작전이었다. 비록 오르카 호가 정박하기엔 작지만 함 내에 탑재된 수송선이라면 정박할 수 있는 항구였다. 작전 후 귀환하는 대원들이나 육지에서 물자를 수송하기엔 안성맞춤인 항구인 만큼 점령했을 때 사용 가치가 컸다.
간단한 브리핑을 마친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렌? 항로가 적절한지 확인해줄래? 일단 내가 설정했지만, 항해 지식은 네가 더 뛰어나니까."
앳된 소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령관님. 후퇴를 대비해서 오르카 호는 이 지점에서 대기하면 될 것 같아요. 나머지는 문제없어요."
"그래 고마워, 정확한 항로 변경은 회의가 끝난 후 전산상으로 수정해줘. 이제 각 부대 배치를 확인할게. 우선 A지점에서.. 어라?""
사령관은 당황한 듯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의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얼빠진 모습으로 소지품을 확인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소녀, 베라가 익숙하게 레이저 포인터를 건넸다.
"여기 있어요, 사령관님."
"아, 고마워. 베라."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매서움을 표정에 드러내는 메이가 한심한 듯 입을 열었다.
"또 깜빡한 거야? 정말 칠칠치 못한 남자라니까."
"메이, 각하께선 항상 사령관으로서 업무에 시달리고 계신다. 그리고 어차피 부관이 있지 않나."
"뭐 그건 그렇지만.."
불굴의 마리의 제지에 메이는 꼬리를 내렸다. 확실히 사령관의 전략적 식견이나 통솔 능력은 어떤 바이오로이드보다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에 반해 일상적인 부분은 놀랍도록 미숙했다. 생각에 몰두하다 자잘한 사고를 치곤 했다. 특히 소지품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자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던 사령관은 지휘관 개체들의 조언에 따라 전속 부관 제도를 마련했다. 다양한 바이오로이드가 지원했지만, 그중에서도 평소 준비를 잘하는 성격인 T-12 칼리아흐 베라가 사령관의 전속 부관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어수선한 분위기도 잠시, 진지한 회의가 계속되었다. 사령관은 다시 작전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각 지휘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각 지휘관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와중에 레오나는 뒤돌아서 배웅하는 사령관을 마주 보았다.
"사령관? 베라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 같던데. 우리 부대원을 너무 혹사시키진 말아줘."
백금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연 레오나는 사령관을 탓하는 모습보단 베라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하하.. 마치 친정 어머니 같은 말을 하네. 명심하도록 하지."
"어머, 난 사령관의 장모보단 아내가 되고 싶은걸. 그러니까 내게 어울리는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 좀 더 정진해줘."
과연 철혈의 레오나. 농담에 당황하지 않고 받아친 말에 얼굴을 붉힌 것은 사령관이었다. 그녀는 살포시 눈웃음을 짓고는 우아하게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령관에게 함장실을 나온 베라가 말을 걸었다.
"자료 정리는 마쳤어요. 사령관, 레오나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나요?"
"별거 아냐. 그냥 베라를 잘 부탁한다더라."
그 말을 듣자 포근한 미소가 베라의 입가를 맴돌았다.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 모습을 보며 사령관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방금은 고마웠어."
"네? 뭐가요?"
사령관은 대답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 위에는 회의 중에 사용한 레이저 포인터가 있었다.
"아 맞다! 회의 들어가면서 준비물 잘 챙겼는지 확인하시라고 했잖아요! 매번 제가 챙겨줘야겠어요?"
`괜히 벌집을 들춘 건가` 하고 생각하면서 난처한 듯이 웃자 베라의 둥근 눈매가 어울리지 않게 매서워졌다.
"지금 속으로 제가 귀찮다고 생각하셨죠? 그렇죠? 그러면 안 돼요. 제가 혼내줄 거예요!"
***
항구 점령 작전은 무사히 성공했다. 애초부터 바다로 튀어나온 곶 지형에 있기에 철충의 수가 적기도 했지만, 만반의 준비와 사령관의 적절한 지휘에 힘입어 시설을 온존한 채 사상자 없이 항만을 점령할 수 있었다.
모처럼 지상에 안전 구역을 확보한 오르카 호는 짧은 휴식 기간을 계획했다. 사령관도 지상에 발을 디딜 겸, 전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시찰을 계획했다. 상급자의 방문이라면 질색하는 병사들이었지만 유일한 인간이자 유일한 이성인 사령관의 방문은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보자... 수첩은 챙겼고... 아, 이것도 가져가야겠군."
사령관은 아우로라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예쁘게 포장된 초코바를 집어 들었다. 이번 점령 작전에서 알비스가 큰 공을 세웠다. 상이라기엔 조금 소소하지만, 평소에 초코바에 환장하던 알비스를 위한 선물로는 딱 맞았다.
"좋아, 이제 출발하자."
준비물을 모두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기다리고 있던 베라가 멈춰 세웠다.
"잠깐! 이럴 줄 알았어요. 옷차림도 확인 않으시고. 얼른 이리 와봐요."
사령관이 한 발짝 다가서자 베라는 사령관의 소매와 옷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익숙하게 베라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오늘은 고생한 자매들을 격려하러 가는 거니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요. 자! 이제 멋있어졌네요."
꾸중하며 매무새를 정돈한 베라가 고개를 들어 올려보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령관이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화들짝 놀란 둘은 동시에 한 발짝씩 물러섰다.
"엇, 엇흠. 고마워. 명심할게."
"아, 아니에요. 뭘 이 정도 가지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사령관은 짐짓 큰 동작으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베라가 얼굴을 붉힌 채 총총 따라갔다.
"쯧."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바닐라는 가볍게 혀를 차고 청소를 재개했다.
***
항구에 도착하자 눈 부신 햇살이 두 사람을 감쌌다. 전투의 흔적이 대부분 정리된 부두는 시원하게 펼쳐진 수평선과 어우러져 잠수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청량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물자를 정리하는 인원들에게 인사를 마친 후 사령관은 베라와 함께 걸어서 목적지를 향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머플러를 하지 않았네?"
단둘이 되자 사령관은 출발했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것을 언급했다. 평소엔 가려져 있던 목선이 드러난 베라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밖은 더우니까요. 아무리 저희가 온도 변화에 둔감한 바이오로이드라도 이런 날씨에 한랭지용 복장을 하고 돌아다닐 순 없어요. 이 옷도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훨씬 가벼운 옷인걸요."
"그렇구나. 고생이 많은걸."
겉보기엔 목이 드러났을 뿐이지만 평소와는 인상이 달라졌다. 노출이라고는 목선과 허벅지밖에 없지만 신선한 느낌이었다. 사령관은 떠오르는 감탄사를 애써 삼키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근처에 있는 쇼핑몰 입구 광장이었다.
비록 인류가 멸망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자동 관리 시스템에 의해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멸망 전 인간들이 거닐던 장소에 관한 관심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대부분 사령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광장에 모여 있었다. 다소 형식적이지만 진심이 담긴 칭찬과 격려를 짧게 마치고 알비스를 불렀다.
"알비스! 이번 작전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고 들었어. 훌륭한걸."
"알비스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알비스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품에서 미리 준비한 초코바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래 기특하네. 그래도 정말 잘했어. 레오나가 제대로 된 포상을 준다고 하더라.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주는 선물이야. 맛있게 먹으렴."
"와! 사령관! 너무 고마워! 헤헤 언니들한테 자랑해야지."
기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모습이 귀여워 잔뜩 머리를 쓰다듬은 사령관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열된 상품은 먼지는 쌓였을지언정 대부분 멀쩡했다.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들떠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 이후에 올 부대원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한사람 당 한 개의 물건만 가져갈 수 있도록 정해두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비교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쇼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우리도 조금 보고 갈까? 어차피 이쪽으로 가야 하기도 하고."
"네 사령관. 오늘은 이후 일정도 없으니까요."
시간이 지나자 베라와 사령관도 마찬가지로 쇼핑을 즐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서로 모자를 씌워주거나 액세서리를 끼워보는 등 고를 물건을 신중하게 정했다.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에 말을 잃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웃어넘기기도 했다. 간혹 눈치 없는 브라우니가 말을 걸어오긴 했지만, 대부분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았다.
"사령관,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어요."
두 사람이 발을 멈춘 곳은 관리 사무실이었다. 점령 작전이 끝난 직후 중요한 자료는 회수했지만, 나머지는 사령관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이곳의 자료도 회수하게 시킬까 했지만, 개인적인 흥미를 위해 명령을 내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사령관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베라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뒤를 따랐다.
책장과 책상을 살피던 사령관은 흥미를 끄는 서류를 발견했다. 지역 축제 개최와 관련된 서류였다. 오르카 승무원들을 위한 이벤트 진행에 참고할만한 내용이었다. 사령관은 이를 옮겨 적기 위해 수첩을 꺼내..지는 못했다.
"음? 분명히 챙겼을 텐데..."
"사령관? 뭘 찾고 있어요?"
뭔가 이상한 눈치를 챈 베라가 다가오자 가방을 뒤지던 사령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수첩. 나올 때 챙겼던 것 같은데 안 보이네. 분명히 확인했는데."
"하여간 못 말린다니깐! 여기 있어요. 정말, 나오기 전에 한 번씩 확인하라고 말했잖아요."
베라는 사령관을 혼내듯 허리에 한쪽 손을 올린 채 자신의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건넸다. 자신의 수첩이 베라의 가방에서 나오자 머쓱해진 사령관은 수첩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나도 챙긴다고 챙겼는데 흘린 것 같아."
사령관은 수첩을 받고 메모를 시작했다. 사령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자 베라는 다시 물러나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
"이런, 벌써 돌아갈 시간인가."
메모를 마치고 창문을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바다가 아름다웠지만, 사령관은 감탄보단 조급함을 느꼈다. 돌아가기 전에 건네야 할 선물이 있었다.
"베라. 잠깐 여기 와줄래?"
"네 사령관. 무슨 일인가요?"
총총 뛰어와서 자신의 앞에 선 베라에게 사령관은 조금 긴장한 듯 말을 꺼냈다.
"이걸 주고 싶어서."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서리의 요정, 칼리아흐 베라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눈꽃 모양 목걸이였다.
"항상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오더라고. 네가 좋아할 디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릴 것 같아서 집어왔어."
"아니에요, 정말 기뻐요. 그, 사실 저도 고른 게 있는데."
베라도 쑥스러워하며 품에서 선물을 꺼냈다. 항구 도시에 걸맞은 닻 모양 남성용 브로치였다. 결국, 둘은 서로를 위한 선물을 고른 것이다.
사령관은 피식 웃고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이리 와, 서로 달아주자."
사령관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걸었다. 양손으로 목걸이를 걸어주는 자세가 마치 연인의 목을 감싸는 것 같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넘기고 드러난 새하얀 목에 목걸이를 걸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자신이 느끼는 긴장을 상대방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가슴팍에선 브로치를 매다는 손짓이 마음을 간질였다.
"응, 이제 끝났어."
"저도요."
반 발짝 물러서 목걸이를 확인하자 항상 머플러가 가리고 있던 가늘고 하얀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깐깐한 부관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가냘픈 소녀.
그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은 단지 노을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턱 끝에 손가락을 받쳤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베라가 투정을 부리면서도 살짝 눈을 감는다.
"탈론페더라도 여기까진 보지 못할걸."
붉은 노을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감싼다.
그 안에서 바닥에 길게 늘어진 두 그림자가 서서히 겹친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순진무구한 소녀가 자신이 고른 초코바를 나눠주기 위해 지금 들어오려는 것을.
둘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다음날.
사령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베라는 사령관의 책상에 다가갔다.
그리곤 익숙하게 사령관의 짐에서 꺼낼 물건을 고른다.
오늘의 물건은 만년필.
사령관은 수첩을 꺼내고는 펜이 없어서 당황하겠지.
`미안해요. 사령관.`
베라는 허둥지둥하다 자신을 바라볼 사령관을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사령관은 깜빡하고, 베라는 챙겨준다.
그런 관계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소녀는 만년필을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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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관의 머플러를 벗겨낸건 차가운 북풍이 아니라 뜨거운 햇살이었습니다. 2. 소녀의 순정은 때론 비겁한 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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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관리해주는 베라쟝..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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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스 때문에 오늘도 고생하는 베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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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이 아니라 사기꾼이었네 임마 너는 내 배에서 퇴출이야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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