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오랜 숙적이었던 마왕이 소멸했다.
용사의 성검이 만악의 심장을 꿰뚫고 그 육체와 영혼을 불사르니, 잿빛이 자욱한 하늘이 부서지며 성광(星光)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용사 알티엔. 그대의 공로에 무한한 치사와 경의를 표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 나, 국왕 오가헤아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무엇이든 이루어 줄 것이다."
용사의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
그곳엔 국왕과 왕비, 공주를 비롯하여 다수의 고위인사들이 용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이옵니다."
"말해보라"
붉은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사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사모하던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과 혼인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호오. 진정 바라는 것이 그것뿐인가?"
원한다면 무소불의의 권력도, 평생의 금은보화도 필시 하사받으리라.
하지만 용사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왕은 흡족한 미소로 성성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딸인 라펠 공주를 슬쩍 흘겨보았다.
공주는 엷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에 모두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국왕 전하, 용사 알티엔은 탐욕이 없고 심성이 올곧은 사내입니다. 용사로서도 완벽하지만, 한 여인의 배필로서도 일체 부족함이 없다 사료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용사 알티엔의 신원은 라브노 공작가의 14대 가주인 제가, 명예와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나이다."
마치 짜여친 연극처럼 입을 맞추어 용사를 밀어주는 상황.
잠깐 침묵하던 국왕이 다시 긍엄한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사 알티엔. 그대의 바람을 윤허하겠다. 그대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공주와 혼인을..."
"제가 사모하는 여인은 공주님이 아닙니다."
"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직전까지 용사를 옹호하며 지지하던 이들도 적잖게 당황한 얼굴로 식은땀을 삐질 흘린다.
"공주가.. 아니라고?"
"아닙니다."
확인사살 같은 답변에 공주는 갑자기 모닝스타로 뒤통수라도 후려 맞은 것처럼 넋나간 표정으로 용사를 응시했다.
7년이다. 7개월도 아니고 7년.
용사와 함께 밥도 먹고, 축제도 가고, 안부 편지도 간간이 주고받았는데...
그런데도 사랑하는 여인이, 가정을 꾸리고 싶은 여인이 내가 아니라고?
그럼, 대체 어떤 년을...
"저는 리즈이파 왕비 전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국왕 전하, 부디 왕비님을 제게 주십시오."
"뭐, 뭐라...?"
용사의 폭탄발언에 국왕이 안색이 벌겋게 사색되었다.
국왕 뿐만 아니라 귀가 열려있던 모두가 회생한 마왕을 목도한 것처럼 얼굴에 공포와 충격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중에서 특히 당사자인 왕비의 얼굴은 참혹함 이상으로 일그러져 입조차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왕좌에서 벌떡 일어난 왕이 부들부들 떨리는 검지로 용사를 지목하며 소리쳤다.
"저, 저 역적 놈을 당장 투옥하라!! 아니, 당장 참수하여 저놈의 수급을 성문에 내걸라!! 당장!!"
"국왕 전하께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권력도 재물도 아닌, 그저 왕비님을 달라는 것인데 그게 그리 어렵습니까."
"닥쳐라!! 왕비를 탐하는 것은 곧 나를 우롱하고 그 왕좌를 탐한다는 방증이다!! 뭐하느냐!! 당장 저놈을 잡아라!!"
연이어 국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주춤거리고 있던 기사단들이 일제히 용사를 둘러싸서는 재빠르게 포박했다.
그러나 용사는 아무런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제압당했다.
누가 알았을까.
용사의 공적을 치하하는 축제의 날이, 용사가 파렴치한 역모죄로 투옥되는 날이 될 줄.
"하.. 제대로 ↗됐군. 공작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빛이라곤 드문드문 놓인 작은 횃불이 전부인 지하 감옥.
라브노 공작은 오싹하리 만큼 차가운 감옥 바닥에 가부좌를 튼 채로 횃불에 비쳐 일렁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하, 참. 설마 왕비와 내통하고 있을 줄은... 자네, 언제부터 왕비와 배꼽을 맞대는 사이였나?"
라브노 공작이 삶의 끈을 반쯤 내려놓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는 왕비와 내통한 적이 없습니다."
"뭐? 없다고?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왕비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저런 미친..."
원래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없는 놈이었지만, 지금은 그 속내의 티끌도 모르겠다.
그냥 ㅁㅊㄴ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라브노 공작은 다시 되물었다.
"정말로 왕비와 내통한 적이 없다고? 그래, 그럼 대체 왜 그랬나. 왜 그런 ↗같... 미친 발언으로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무고한 나까지 대역죄인으로 만들었냐 이말이야. 이 ㄱㅅㄲ야."
"라브노 공작님."
"듣고 있으니 말해, ㄱㅅㄲ야."
한참 고개를 떨구고 있던 용사가 메마른 눈으로 라브노 공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누군가 라브노 공작님의 부모와 형제를 흉포한 마수들에게 고의로 내던져 죽음으로 몰았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부모와 형제가 실수로 구두에 흙탕물을 조금 묻혔다는 이유만으로요."
"ㅆㅂ 그런 호로개잡놈은 당장 18갈래로 찢어서 쳐죽여야지."
"그게 귀족이라도요?"
"귀족이면 뭐? 귀족 배때기는 칼이 안 들어가나?"
"제 부모와 형제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인물이 바로 왕비입니다."
"어...?"
냉랭한 지하 감옥 안에 더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어... 그러니까 왕비가 개새... 아니, 자네의 원수라고?"
"그렇습니다."
"하아... 그래, 그랬구만. 이런 ㅆㅂ. 그런 거였어. 아니, 그냥 죽여버리고 멀리 도망하지 그랬나. 어차피 자네는 대적불가의 용사 아닌가. 나였으면 왕비를 죽이고 왕도 죽인 뒤에 먼 대륙으로 넘어갔을 걸세.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그 말에 용사가 피식 웃었다.
과거,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무참하게 죽이고도 뻔뻔하게 왕비가 되어 '왕국의 어머니'라 불리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후안무치의 괴물.
그런 괴물을 찢고 죽이는 상상을 수천 번은 더 했다.
"도망칠 필요가 없어서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 이대로 삶을 포기할 셈인가? 고작 왕비의 둔부에 비수 하나를 꽂은 것으로 만족한 채로?"
"그럴리가요. 비수는 하나가 아닙니다."
"뭐? 하나가 아니야? 숨겨둔 묘책이라도 있나?"
"라브노 공작님. 마왕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
드득- 우드득-
라브노 공작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뼈와 근육이 튀들리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용사의 머리에서 검고 날카로운 뿔이 솟아나며, 곧 등에서 하늘을 까맣게 뒤덮을 만큼 커다란 날개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이런... ㅆㅂ..."
완전한 마왕의 모습으로 변모한 용사는 경악스럽게 질린 라브노 공작을 한번 흘겨보곤 지하 감옥 천장을 주파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본문
[잡담] "국왕 전하, 부디 왕비 전하 를 제게 주십시오" [4]
2026.03.23 (13: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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