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른다.
사흘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보름이 되며, 보름이 한 달이 된다.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어보고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덜 주고자 산 좋고 물 좋은 자그마한 집에서 가정 호스피스를 받고 있던 트레이너는 이제 그나마 남아있던 군살도 빠르게 빠져있었다.
“조용하네.”
이미 손을 쓸 단계를 지났기 때문일까, 덤덤하게 받아둔 약을 먹어가며 생활하는 그는 가끔 트레센에서의 일상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련은 어떻게든 털어내야 했다.
현세를 떠나서 미련이 남은 귀신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똑-. 똑-. 똑-.’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올 사람이 있던가, 그의 기억에는 없는데.
삐쩍 말라버린 몸을 일으킨 트레이너는 가까스로 움직여 문을 열었다.
“네, 누구십-.”
“…찾았다.”
“….”
그리고 그 너머에선, 그가 최후의 수단을 써가며 인연을 끊으려 한 이들이 있었다.
“…타키온, 카페. 여긴 어떻게 알아낸 거니.”
옛 담당들.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묻고 가려 했던 두 사람.
“그러는 트레이너님은 대체 왜 자신의 상태를 안 알려주신 건가요.”
“….”
맨하탄 카페가 무언가 속에서 끊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가운데, 아그네스 타키온의 휑한 눈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던 그녀는 이내 주저앉았다.
“내 탓이야, 내가 모자라서 모르모트군을 고칠 약을 만들 수 없었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내가 부족해서….”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눈물로 땅을 적시며 절규하듯 하는 통곡은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매우 명확히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해하던 트레이너는 이내 고개를 돌려 카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아낸 거니.”
“항암제와 표적치료제를 드신다는 것, 그리고 강력한 진통제도 같이 드신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맨하탄 카페는 물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트레이너님. 어떤 상태인지요?”
옛 담당의 말에 그는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아마 진실을 알아챈 걸로 보이는 아그네스 타키온은 직접 들어서 확인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를 위한 약을 만드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으로도 저리 통곡하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알게 하는 것이 좋겠지.
“췌장암이라는구나.”
“…!”
“폐하고 간까지 전이되어서, 수술로 손을 쓸 수 없다더구나.”
마침내 진실이 나왔다.
그리고 맨하탄 카페는 간신히 몸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친구’가 그녀의 몸을 부축했으니까.
“아아아아아…!”
아그네스 타키온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것만 같이,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
아주 상황이 좋으면 2년.
그것이 트레이너에게 남은 시간.
“짐을 들고 오길 잘했군요.”
“무슨 소리니, 카페. 짐이라니.”
“머물 생각을 하고 찾아온 거니까요. 간호하겠습니다.”
“도구들도 어느 정도 가져왔으니, 진통제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네, 모르모트군.”
“부디 합법의 선에서 놀렴, 타키온.”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네는.”
그리고 이 시간은, 아그네스 타키온과 맨하탄 카페에게 있어 무엇보다 귀중한 ‘남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트레이너의 거처를 파악하러 다닐 때부터 트레센에 휴학하겠다고 서류를 내버렸으니까. 막 대학 생활이 꽃필 나이지만, 그거보다 자신들을 이끌어준 이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게 뭐니.”
“보시다시피 가츠동입니다만.”
“….”
“병을 이겨내시려면 든든히 드셔야 합니다. 대신 먹여드릴 테니 입 벌려주세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환자를 위해서 카페는 고열량식을 챙겨주기 시작한 건 물론이오.
“보게나, 모르모트군! 이제 이렇게 깔끔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네!”
“장하다, 타키온. 이제 자취해도 되겠네.”
“무슨 소릴, 내가 합성해 낸 치료제들 계속 먹어보면 같이 살 수도 있는 것을!”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실험하며 만들어낸 항암제를 주는 건 물론, 이제 홀로서기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 타키온도 있었다.
1분 1초가 소중한 추억이었고, 1시간이 흐르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더 나아간 미래를 꿈꿀 수 있었는데.
현실은 너무나 잔인했으니까.
“우웁.”
“괜찮은가, 모르모트군?”
“아냐, 그냥 좀 통증이 오네.”
가벼이 말하지만, 결코 저렇게 말할 정도의 고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두 우마무스메가 알고 있었다.
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췌장암.
심지어 전이까지 된 상태면, 가장 강력한 진통제로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고통을 항상 참느라 수척해진 팔에 항상 힘이 들어간 탓에 힘줄을 따라 팔은 움푹 패여들어갔고, 그의 형상은 점차 사람보다는 미라에 가까운 꼴이 되었다.
“….”
희망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0.001의 희망에 걸던 아그네스 타키온은, 결국 자신이 짠 그 어떠한 방법도 듣지 않음을 깨닫고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머지않아 그가 세상을 떠나갈 것이라는 걸.
곁에서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준 그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걸.
“트레이너님….”
맨하탄 카페는 담담해 보였지만, 매일 밤 소리없이 울었다.
들키지 않은 건 순전히 ‘친구’가 약간 도와줘서 그랬다.
카페를 늘 지켜주는 ‘친구’는 트레이너실에서 그녀가 트레이너와 가까워질 때마다 일으키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절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조만간 떠나갈 이를 배웅하듯, 주변의 모든 부정을 대신 치워주고 있을 뿐이었다.
투약하는 진통제의 양이 늘어나고, 그가 점차 일어나는 시간보다 병상에 누운 시간이 길어질수록 찾아오는 호스피스의 안색 또한 어두워졌다.
어느 날, 결국 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약을 평소대로 먹고 잠이 든 트레이너는 이틀 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카페와 타키온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결국 침착함의 가면이 벗겨진 카페는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고, 타키온은 그저 고개를 떨어트리고 주저앉아 있었을 뿐이니까.
2년은 살 수 있다고?
1년도 제대로 못 채웠다.
함께할 수 있을 때 더 많은 걸 쌓아둘걸.
더 좋은 기억을 남기게 할 걸.
후회가 몰아쳤다.
“…카페.”
간신히 의식을 찾은 그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눈물범벅이 된 우마무스메를 불렀다.
“카츠동, 맛있었다. 나중에 카페 차리면 그게 메인으로 더 유명해질 거 같아.”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하시네요….”
“진심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하는 말치고는 병을 앓기 전의 그다운 말에 카페는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키온. 이거, 네 탓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널 제대로 못 뛰게 해준 거 같아서 미안하다.”
“아닐세, 모르모트군은 언제나 최선을 생각해 줬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게.”
“그러냐.”
“정말이야.”
두 사람과 각자 실없어 보이지만, 평소와 같은 만담을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나는 너희에게 좋은 트레이너였니?”
그의 말에 두 담당은 답했다.
“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리고 유일무이한 최고의 모르모트군이었다네.”
맨하탄 카페와 아그네스 타키온의 답을 들은 그는,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앞으로도 좋은 기억을 쌓으며 살아가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트레이너의 눈은 찬찬히 감겼고, 가냘프게 이어지던 숨도 서서히 멎었으니까.
악우를 담당하며, 두 사람을 영광의 길로 이끌었던 한 사람의 트레이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담당하던 우마무스메들의 소리 없는 울음 속에서.
-⏲-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추억이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운명을 바꾼다.
‘딸랑-.’
“어서오십-. 아, 또 당신입니까.”
“그- 게- 무슨 태돈가! 카페! 2주일만에 왔거늘!”
카페 맨하탄.
맨하탄 카페가 졸업한 후 모아둔 자본으로 차린 자그마한 카페. 그곳에 익숙한 방문자가 찾아왔다.
“하아, 그래서 주문은요?”
“일단은 카츠동 특곱배기로 부탁하네.”
“…큿”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지는 카츠동 한 그릇 주문.
그래, 이 카페는 커피도 유명하지만 그거보다 더 유명한 것이 맛 좋고 양 많기로 유명한 카츠동이었다. 무려 그걸로 미슐랭을 받았다지.
누군가가 한 말이 정확히 맞아 들어간 것이다.
“하아, 이제 좀 든든해졌네. 아이스커피도 하나 부탁하네, 카페.”
“…정녕 에스프레소를 드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무슨 소린가, 아이스커피도 카페인 보충용으로 마시는 것이거늘. 여전히 홍차가 최고긴 하다네.”
“진짜 여전하시네요, 타키온 씨.”
아그네스 타키온은, 그 천재성으로 인해 고등부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석박사 학위를 여태 딴 것들을 토대로 교수가 되었다. 젊은 우마무스메 교수라, 그것도 한때 대파란을 일으킨 환상의 삼관 우마무스메 출신의. 딱 좋은 이슈거리 아닌가.
물론 그녀가 연구하는 과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연구는 잘 돼 가시나요?”
“어렵다네, 그 시절보다 훨씬 뛰어난 장비가 있는데도 쉽지 않아.”
타키온이 보름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와의 대화로 머리를 식히려고 하는 것도 있고.
“표적 치료, 항암 기술, 하나같이 난관에 부딪히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왜 암을 정복하면 의료사가 바뀐다고 하는지 알 것 같을 정도야.”
그런 그녀가 연구 중인 건, 한이 맺힌 기술이었다.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던 기억.
그러기에 다른 이들은 그런 걸 좀 적게 겪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몰두하기 시작한 기술은 하나를 해결하면 하나가 막히고 그걸 해결하면 다른 게 막히고 하는 식으로 계속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히 혼사 거리가 안 들어오나?”
카페가 내준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잠시 멈칫했다가 설탕을 잔뜩 넣은 후에야 편안한 표정이 된 타키온은 알바도 퇴근하고 홀로 마무리 중인 매장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시잖습니까, 제 연애에 대한 갈망은 그날 끝이 난 걸요.”
그리고 그에 대해 맨하탄 카페는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듯, 우울히 말했다.
“그랬지, 나 역시 그러니까. 결국 피차일반이로군.”
이는 아그네스 타키온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긍해줬다.
그날.
트레이너가 세상을 떠난 날. 두 사람은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와도 스스로 단절했다. 타인과 웃으며 기억을 쌓을 순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대신하여 평생을 함께할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트라우마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두 사람이 그에게 가졌던 애정의 깊이가 남달랐음을 의미했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언젠간 그것도 극복해서, 살아가야지.”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특히 아그네스 타키온은 그 입장상, 집안에서 계속 혼인을 보채는 위치기도 하니까. 극복해야 미래로 나갈 수 있다.
“그렇죠, 그 사람이 원한 건, 이런 모습이 아닐 테니까요.”
과거에 가로막혀, 미래를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마 그가 제일 슬퍼할 모습일 테니까.
“그래서, 우리 대학에서 미팅을 하게 됐는데 거기 끼지 않겠는가? 머릿수가 부족해서 말일세.”
“결국 본론은 그거였습니까.”
“카- 페-.”
“윽, 일단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카페 맨하탄 한 편에 걸린 액자에는 중앙 트레센 시절, 트레이너는 물론 타키온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채 저녁노을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제라도 전진하는 것을 격려하는 듯이.
처음 써보는 트또죽....이지만
최근에 친한 형님이 췌장암으로 가시면서 생각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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