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가 일어나는 문화에서의 '개인의 정의' 는
국가의 정체성, 몸의 정체성, 종교적 정체성 등 수많은 문화적이고 인식적인 정체성의 교차점으로써 개인이 정의된다고 함
이를테면
'나는 미국인, 백인 남성이고,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났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라는 '정체성' 으로써 정의된다는거지
마찬가지로
'나는 미국인 흑인 여성이고 2000년대 태어났으며 이슬람교를 믿는다' 등으로 정의될 수도 있고
그런데 나는 이러한 정체성 정치가 본질적으로 '퇴행적' 이라고 이해하는 게
이러한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규정, 그리고 그 정체성 집단의 일원으로써의 의견의 표출은 전근대적인 '개인 없음' 과 너무 유사하다 보거든
렘브란트, 자화상
근대의 징후로써 자주 거론되는 것들 중 하나인 '개인의 탄생' 은, 자주 거론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정체성에서 벗어난, 집단에서 벗어난, 오롯이 스스로 사고하고 존재할 수 있는 기반' 위에서 성립되었음.
이를테면, 전근대에서는 농노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음.
그러나 식민지가 개척되고, 자본의 힘이 인간적 기준들-국가, 종교, 신분 등- 을 넘어서면서, 이 자본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을 표현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 징후가 바로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나타난거임. '난 돈이 있고, 내 스폰서가 원하는 그림만 그릴 필요가 없으며, 내 자신을 드러내겠다' 라는 징후.
여기서, 자본을 통해서, 개인이 집단성에서 탈피하여, '개인' 이 탄생했다라는 기술은 반대로 말하면
자본 이전, 전근대의 개인은 결국 집단, 정체성에 묶여 있다는 말이 됨.
중세 농노의 삶. 농민들의 수확작업과 이를 감독, 지시하는 장원관리인.
작자미상, Queen Mary's Psalter(Ms. Royal 2. B. VII), p. 78v
예를 들면, 중세에서의 개인은 이런 방식으로 규정됨. (예시로 만든 거라서 정확하지 않음)
“나는 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 4세 폐하의 충직한 신민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받은 신자로서, 프랑크족 혈통을 잇는 농노 하인리히의 아들로 태어나, 슈트라스부르 근처 마을의 수호자이자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자이다.”
이 형식은, 우리가 앞서 '정체성 정치' 에서의 '개인' 의 규정과 형식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버린거임.
즉, 정체성 정치는, 개인을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판단하여 행동하는 근대적 개인의 영역을, 다시금 정체성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넣는 전근대적 퇴행성의 위험을 가지고 있음.
전근대에서, '나의 정체성이 아닌 집단' 에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집단' 에게, 전근대의 집단은 무엇으로 응대했나?
오로지 전쟁 뿐이었음.
그래서 나는 현대의 정체성 정치가 근본적으로 퇴행적이라고 이해함.
이쯤 되면 왜 정체성 정치는, 특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체성 정치는 서로에게 극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발전하는지도 설명이 되는거임.
그것이 정체성 정치가 향하는, '저 집단은 이해하지 못할 집단' 의 사고방식이 도착하는 곳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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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무관심이지, 필요 이상의 관심이 아님. 무관심이라는게 남이 죽건 말건 신경쓰지 말자 이런게 아님. 남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건 중요한거 아니니까 그저 동등한 사람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된다는거임. 근데 자꾸 성적 지향 운운하면서 거기에 관심 없다는 사람 아가리를 열어서 집어 먹이려고 함. 안 먹으면 너는 적이라고 서로 지하드를 선언하는 와중에, 자기 파이(소수자 지위) 뺏기는 거에 위기감 느낀 페미 진영과 전쟁이 터짐. 여기서 정체성 정치가 결국 이권 다툼이라는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음. 그나마 페미니즘의 수명을 대폭 줄여버린 공헌도 하긴 하였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알고 싶지도 않은 타인의 성적 지향을 문제삼아 영원한 진흙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성적지향은 하나의 예시고 열거하자면 끝이 없음. | 25.08.23 16:0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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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어젠다이기 때문에 보수적 테이스트라는 경향성이 안느껴지는 경향이 있어 보임 근대성 그 자체의 의심이 영향이 좀 크다 느껴지긴 하는데 | 25.08.23 16:0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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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은 아닌데, 우리는 그걸 '이권 다툼' 이라고 말함. 개인의 인권 들먹이면서 마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이익 단체화 한 정체성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지. | 25.08.23 16:0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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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그마저도 전근대적인 경향이라는 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생각함. '모이지 않으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는 '모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와 형식적으로 다르지 않음. 실제적으로도 딱히 다르지 않고. 주변의 자연이 적대적이기에 모여야 했던 전근대와 주변의 문화가 적대적이기에 모여야 하는 필요성은 사실 다르다고 말할 필요가 없음 문제는 그것이, 위 댓글에서처럼 본질적으로 '보수적 테이스트' 일 가능성이 놓쳐지는 것이 좀 걸림 | 25.08.23 16:0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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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자존 자립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님. 실제로 렘브란트의 예시에서 나타난 '개인' 도 결국 자본의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 농민들은 엄연히 말해서 개인으로써 완전히 나타났다 보긴 힘들다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문제는, 위 댓글에서도 말했다시피, 이러한 테이스트는 본질적으로 보수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퇴행적' 인데 이 테이스트가 진보의 어젠다를 통해서 진보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걸린다는거지 | 25.08.23 16:0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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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자립 자존을 못한다는건 넌센스임. 은연중에 차별 받는다는 정도는 있겠지. | 25.08.23 16:0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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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존 자립이 가능하다는 쪽도 나는 부정하는 편이긴 함 왜냐면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기반' 조차도 결국 인간적 기준점에 의해 가치가 왔다갔다 하는 불확실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거든 자연법칙과 같은 인간 사유랑 완전 무관한 기반도 결국 '인간이 그것에 영향을 받아야' 기반이 되니까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고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말했다시피 이 테이스트는 퇴행적이거나, 잘 봐줘도 '보수적' 이거든 그런데 이 테이스트가 다른 댓글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진보의 어젠다' 를 통해서 확산되고 있음 이 자체가, 우리가 진보라고 믿는 사상의 맥락성을 잘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무사유성을 내포하는 게 아닌가? 하는거지. 아렌트가 나치에게서 발견했다시피 무사유성은 악행을 이끌어내니까 | 25.08.23 16:1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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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자립 자존이 가능하려면 형이상학 수준에서나 논의가 가능하니 넌센스라는 말임. 현실에 기반한 논의에 현실에서 벗어난 논의를 접목시키는 것은 명백한 Category mistake임. 그리고 이것이, 네가 말하는 '퇴행'의 본질이라고 봄. 우리 사회의 잘못이 존재한다, 시정해야 한다는 비난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Category mistake를 저지르고 있는거임. 형이상학적 논의에서나 가능한 '자립 자존'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하므로, 따라서 이는 끝없는 전쟁이 되는거고 결론적으로 퇴행적이라는 말이 됨. 마지막의 두 둘은 아마 네가 이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증명으로 보임. | 25.08.23 16: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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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체성 정치 자체가 전근대적 정체성의 규정과 동일한 형식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퇴행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음. 그것이 특정 카테고리 오류를 통해 퇴행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거임 진짜 문제는, 말했다시피 이 퇴행성, 다르게 말하면 과거로 회귀하는 보수성의 테이스트가 진보의 어젠다를 통해서 방출되고 있다는거고 '고의성' 을 읽어내는 것을 나는 자제하는데, 왜냐면 고의성은 의도를 통해서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만 없었으면 잘 풀렸을 것' 을 전제하므로 행동,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약화된다 보거든 반대로 고의성을 읽어내지 않고도 비판이 가능할 경우, '그 행동 자체가 이 맥락에서 문제였다' 라는, 행동, 현상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가져갈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잘못이 존재해야 한다, 시정해야 한다' 라는 비난을 '목적으로 한다' 라는 것은 분명 존재했음. 그런데 나는 여기서 카테고리 미스를 고의적으로 일으켰다기 보단, '근대 비판' 이라는 탈근대적 서사의 대중적 열기가 문제였다고 이해하려 함. 이들은 '근대적 개인' 으로 인한 근대문화를 부정하려 하기에 탈근대거든 즉 내가 지금까지 말했던 '퇴행적 특성을 가지는 전근대적 사고방식' 으로써의 정체성 정치의 사고방식은 네가 말한 '완전한 자립자존은 불가능하다' 라는 인식, 즉 '완전한 자립자존의 가능성을 보려고 했던, 근대적 이상향에 대한 불신' 즉 포스트모던에서 나타난 사고방식임. | 25.08.23 16: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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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고의적으로' 실수를 일으킨 것은 아님. 근대의 귀결인 제국주의, 세계대전, 냉전 등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근대' 그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비고의적 실수라고 봄. 문제는, 그것이 비고의적이라고 한 들, 그것이 정당하지 않은 건 결국 변함이 없는데 (이를테면, 독립운동, 탈식민주의, 1세대 페미니즘, 노예해방, 아인슈타인 등의 반핵운동 등도 근대성이었음) 그 정당하지 않은 사고가 철학, 학문쪽까지 번져서 대중에 정당성을 부여해버린 거고 이 정당성이, '진보적인 대중이 기성의 경직된 규범을 개혁한다' 라는 이미지에 부여되는 정당성이, 앞서 계속 말했던 '퇴행적 사상의 보수적 테이스트' 를 '진보적 어젠다' 로 탈바꿈하게 만들었음. 아무리 잘 봐줘도 보수적,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전근대적 퇴행성' 인 사고방식이, '진보적 집단성을 옹호하는' 어젠다를 통해 진보가 되어버린거임. 즉, 정당성에 의해, 구호에 의해, '지금 우리가 진보라 믿는 사상은 실제로 진보인가?' 라는 사유가 멈춰버림. 이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인거임 퇴행적 사고방식일 가능성을 사유하고는 있는가? 라고 | 25.08.23 16:3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