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뻘
1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배설물처럼 죽뻘에 반죽되는 것이다
죽뻘에는 무덤이 없다 설령 있다 해도
무덤은 죽뻐레서 뭉개져 죽뻘이 되었을 것이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썰물과 밀물, 그 반복되는 바다의 애무 밑에서
이불 없이 잠자는 것이다
죽뻐레는 비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게를 위해 묘비명을
쓴다
―한평생 옆으로 걸었노라!
구멍으로 나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게의 흔적은 뭉개지고 지워진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혼돈의 반죽 같은 상태로
바다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는 것이다
2
젖무덤의 만다라처럼
끈적끈적한 죽뻘에서
배를 밀며 기어 다니고 꿈틀거리는 것들,
어디가 입구멍이고 어디가 똥구멍인지
그 구멍이 그 구멍 같을 때
앞장서는 구멍에 끌려가는 구멍이 항문 아닐까
갯지린내 속의 갯가재, 아무르불가사리,
가시닻해삼, 큰구슬우렁이, 서해비단고둥,
만약 뻘이 만물의 어머니라면
우리는 족보 어지러운 뻘가(家)의 자식들인가
최승호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R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