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전설 시리즈란게 원래, 하얀마녀 이래로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 즉 슈퍼 히어로는 없고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은 것이 영웅’이란 주제의식을 깔고 있는건 유명하죠. 뭐 굳이 따지자면 그 중에 어떤 구심점? 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보다 주목받기는 합니다만, 이것도 물리적인 강함보다는 어떤 정신적인 강함에 뒷받침되는 식으로 묘사되죠.
굳이 가가브 트릴로지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하궤나 영벽궤, 섬궤에서 올리비에가 린에게 쓴 편지 등등, 궤적 시리즈만 봐도 이 주제의식 자체는 이어져 왔습니다. 에스텔이나 로이드나 잠재적인 재능이 뛰어나단 언급은 있을지언정 1~2년 남짓한 스토리에서 강해져봐야 루키 수준으로 끝나고, 그럼에도, 혹은 바로 그렇기에 어떤 적을 상대하더라도 그들이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묘사도 없었죠. 그저 각자의 인연때문에 “그래, 너희들이 해결하는게 도의지”정도의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고 해야하나.
그에 비해 섬궤 시리즈는, 섬궤1의 구교사 탐색부터 시작해서 린의 운명적이고 영웅적인 각성과, 그에 맞춰서 쑥쑥 성장하고 변신모드(?)까지 있는 린 개인의 강함과 그 행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게 사실입니다. 적대하는 상대들 역시 린 개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간섭해오죠.(섬궤1은 구교사, 섬궤2는 비타 등등, 섬궤3은 오즈본 등등) 이러다보니 팬덤 역시 이례적일 정도로 ‘린이 다음작에는 얼마나 강해질까 두근두근’ 정도의 반응이 많습니다. 애초에 팔콤이 그런걸 기대하도록 캐릭터를 묘사하고 있거든요, 당연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로봇전이 본격 도입된 섬궤2부터의 몇몇 전투씬의 묘사는 시리즈 전체의 묘사로 볼 때 분명 이질적입니다. 기갑병이 되었건 신기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간에, 기신을 탄 린이 아니면(하다못해 기갑병이라도 타지 않으면) 싸움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가만히 구경하고 있다는 겁니다.(아크스 링크로 돕는다는 것도 솔직히 뭐하는건지....) 고대 인형병기나 골렘, 결사의 대형 인형병기(드래기온이나 골디아스급 등등)에 성수나 칠지보까지 때려잡았던 걸 생각하면, 우군측이 비록 맨몸이라도 기갑병 한둘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겁니다. 새삼 기신이나 기갑병이 없다고 도움이 안된다며 손가락 빨고 있는게 이해가 안가죠. 결국 린이 이기는게 당연하건 그만큼 믿기 때문이건, 도와준만큼 린의 부담이 줄어들테고 또 누가 얼만큼 강하고 도움이 되건 안되건 그렇게 함께 나서서 싸우는게 영웅전설 시리즈의 방식일겁니다.
섬궤3에서 신기들과 싸울 때도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충분히 강할만큼 강한 구 7반이나 심지어 오렐리아 마저도 로봇전에서 가만 보고 있는게 말이죠. 벽궤에서 데미지 안박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신기 상대로 죽어라 두들기던 브라이트 남매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분명 이상한 묘사입니다. 아크스 링크로 보조하는 동안엔 몸을 움직이면 안된다는 룰이라면 뭐 할말 없습니다만...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거의 모든 인물들이 ‘최종적으로는 린과 발리마르에게 맡긴다’는 방식을 거의 당연한(어쩔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힘내라’ ‘잘싸워라’따위의 말을 합니다. 비단 아군뿐만이 아니라 상대들 역시 ‘여기서부턴 늬들 기동자가 아닌 녀석들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다’식의 발언을 합니다. 이전 시리즈에도 몇몇 전투에서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이벤트성 전투고 그렇게 하는게 ‘도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섬궤 시리즈는 ‘능력’을 가지고 ‘싸울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선을 그어버립니다. 12살의 티타조차 그럴 ‘도의’가 있으면 전투에 참가했던 궤적 시리즈에서 말입니다.
즉 섬궤 시리즈는 굉장히 노골적일 정도로 린의 슈퍼히어로적인 전개와 연출을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싸울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능력의 유무’로 매우 노골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실 린이 작중에서 ‘혼자 끌어안는다’며 수차례 타박당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기신을 안 타고 있을 뿐이지 항상 최종국면에서 하던 대로 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 버릇이 안 고쳐지는거라고도 볼 수 있고, 고쳐봤자라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디 짤방에서 본건데, 잭 커비와 스탠 리가 대화하면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리에게 커비가 ‘그건 너무 구닥다리야’같은 말을 하더군요. 비슷하게, 섬궤 시리즈 역시 20년 가까이 이어진 하얀마녀 이래의 주제의식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주려는 과정에 있는 작품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궤에서 직접적으로 그 주제의식을 언급하고 국가라는 틀을 넘어 맺어진 수많은 인연을 통해 시대를 바꾸려했던, 어찌보면 종래의 주제의식의 표상과도 같은 올리비에가 폭사(?)하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즉 영웅전설 시리즈의 과거에 대한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전개라고 할까요.
그게 전통적인 주제의 전면적인 부정일지, 어느 정도의 수정일지는 다음작이 나오고 섬궤 시리즈가 마무리되어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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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일 가능성은 저도 생각하긴 했는데, 거북이님 말씀처럼 2편에서 끝내버렸을때나 이야기겠죠. 반면교사식이라기엔 너무 멀리 온 느낌이 듭니다... | 17.11.08 2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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