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과 함께 나타난 여인. 쿠모이 이치린의 물음에 센라는 짚이는 게 없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이만."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자, 이치린은 가던 길을 가려 할 때였다. 센라가 그녀를 급히 불러 세웠다.
"저.. 저기!"
"네? 무슨 일이시죠?"
이치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센라를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인지, 기다리고 서있는 그녀를 두고, 센라는 우물쭈물하며 입안에서 말을 굴렸다. 그리고 정했다는 듯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 가는 방향이 같다면.."
"동행 하자는 말인가요?"
"이런 험준한 산길을 여자 혼자서 다니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니 말이죠. 기왕이면 저 같은 강한 남자와 동행하는 편이 안전하고 좋지 않습니까?"
"음.. 권유는 고맙습니다만."
이치린은 센라의 권유를 선듯 받아들이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렇다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작게 날숨을 뱉어내고는 품에서 금색으로 된 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휘두른 순간이었다.
그녀 주변으로 한바탕 강풍이 몰아닥치더니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올랐다. 구름은 곧 형체를 갖추더니 족히 10척은 되어 보이는 구름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되었다. 매서운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질량을 가진 구름인 그것의 정체.
"미코시 뉴도인가."
센라는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뉴도의 종류중 하나인 미코시 뉴도. 그것은 자신의 크기를 자유자제로 조종한다는 몸이 기체로 이루어진 요괴였다. 이치린은 그 정체를 꿰뚫어본 센라에게 거절의 말을 전했다.
"제겐 운잔이라는 믿음직한 호위가 있으니, 거절하겠어요."
과연, 미코시 뉴도가 호위라면 위험한 산길을 걷는다 해도 안심일 것이다. 하지만, 센라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저 뉴도가 정말로 믿음직한 호위인 겁니까?"
"네. 이래 뵈도 운잔은 수십 년 이상 저와 동행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이보다 믿음직한 호위는 저는 달리 알지 못하는 걸요."
"정말입니까아~? 그야, 저 녀석이 강하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겠는데.."
센라의 말투가 비아냥에 가깝게 변했다.
"관상이 아주 호색한인 것이. 밝히는 녀석인 게 분명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운잔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그만둬 주세요."
비꼬는 듯한 센라의 태도에 이치린은 불쾌감을 드려냈다. 그러나 센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비아냥을 이어갔다.
"저 눈을 보십쇼. 그쪽을 보는 눈이 음흉하기 짝이 없네요. 이런 녀석이랑 수십 년 동안 동행하셨다니.. 혹시, 그 동안 무슨 짓을 당하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그런 일 없었어요. 이봐요. 자꾸 엉뚱한 소릴 할거면 제아무리 저라도 참지 않을 거예요!"
수십 년 전, 자신과의 승부에서 패한 뒤로 자신을 따르게 된 운잔이 폄하 당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천박해 보이는 오니가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인지는 모르나, 이치린은 더는 참는 것이 한계였다. 살기가 담긴 시선이 센라에게 쏘아진다. 센라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사과드리죠. 그런데, 정말로 저랑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치린은 센라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즉, 센라가 운잔을 억측하면서까지 트집 잡은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과 동행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자, 이치린은 어쩐지 화를 낸 것조차 바보같이 느껴졌다.
'대체 누가 호색한인건지.'
아무리 거절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이치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길이 같다면, 어느 정도 동행해 주겠어요."
상대는 강대한 오니. 싸워봤자, 이쪽이 손해인 상대였다. 내키지 않지만, 이치린은 그의 끈질김에 손을 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역하는 미코시 뉴도는 다른 모양이었다.
"운잔!"
모욕을 받을 때에도 묵묵히 있던 운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뿐이었지만, 이치린은 의외라는 듯 운잔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운잔 운잔!"
"확실히 천박해 보이긴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는.."
"운-자아안!"
"실례지만 저 녀석 아까부터 운잔운잔 거리는데."
둘의 대화에 센라가 끼어들었다.
"뭐라 하는지 알아듣는 겁니까?"
운잔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상대와 대화를 하는 이치린이 희한해 보이는 센라였다. 이치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 운잔이 당신과 동행하는 것이 못 마땅한가 봅니다."
"정말인가요? 내 귀에는 지 이름만 말하는 걸로만 들렸는데?"
"운잔은 그런 식으로 밖에 대화를 하지 못해서 처음 보는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오랜 사귐을 가진 저 같은 사람은 충분히 알아듣지만요."
"그것 참 희한하군요."
센라는 이치린과 운잔을 감탄에 찬 눈으로 번갈아봤다.
"오랜 사귐이라..."
조금 부럽다는 시선을 운잔에게 던지면서 센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잠자코 있던 코우가 무언가 할 말 있다는 듯이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저기, 운잔이라는 분은 선배가 쿠모이 씨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인가 본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가 감시하면 되니까 말이죠."
"운잔.."
"과연. 운잔도 그러면 안심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코우에 의해 동행에 대한 문제가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센라는 흑심대로 이치린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을 드려내는 것은 별개의 일. 후배의 감시가 있으니, 미리 피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판단했기에 이치린과 운잔은 센라의 권유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
"그래서 그 병 안에 나온 것이 제가 느꼈던 그 사이한 기운의 정체였다는 건가요?"
"아마도요."
산을 지나다 감지한 사이한 기운. 센라들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그것의 정체에 대해 이치린은 코우와의 대화를 통해 유추하고 있었다.
"참 위험한 기운이었지. 닿기만 해도 죽음에 이를 정도의 사기였으니까."
센라가 그것을 마주 했을 때를 떠올리며 코우의 말을 거들었다. 그에 코우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것을 그 퇴마사는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모르지.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센라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고, 모두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 중 이치린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센라와 코우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봤다.
"그 인간을 놓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지.."
"거기서 누가 바람으로 날려 버리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그에 지지 않고, 변명을 하는 센라.
이치린은 한층 목소리를 높여 책망했다.
"남자가 궁색하게 남 탓으로 돌리는 거 아닙니다."
"남 탓이라니!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참 이상한 아가씨구먼."
"애당초 머릿속에 흑심으로 가득 하지만 않았어도 깜빡하지 않았을 거예요."
"흑심? 이렇게 청렴결백한 남자를 두고 흑심을 품었다 의심하다니. 아무리 나라도 상처 받습니다!"
"처..청렴결백!? 푸훕... 푸푸풉...!"
센라와 말다툼을 벌이던 이치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체면을 생각해 어떻게든 참아 보려는 노력을 해보는 그녀였지만.
"퍄하하핫-! 자기 입으로 청렴결백이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의 기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센라는 당황해 하는 것도 잠시, 이치린의 웃음이 머질 때 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간신히 웃음기를 지운 이치린이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말했다.
"저란 여자도 참.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네요."
"아닙니다. 그렇게 활기차게 웃는 것도 보기 좋은 걸요."
"아아아.."
이치린의 머리 위로 하얀 김이 올라오는 듯 했다. 부끄러워하는 이치린을 제쳐두고 코우가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해왔다.
"놓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고. 그 퇴마사가 이번 일로 포기할 인간은 아니지 않나요? 제 예상이지만, 언젠가 또 한 번 습격해 올 것 같은데, 그때 잡아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센라는 코우의 말에 납득하면서 지나간 일에 대해 잊기로 했다. 그 퇴마사가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언제가 만나겠지. 또 어떤 계책을 써올지는 모르나, 정면에서 깨부수면 되는 일.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세 남자와 한 여자는 산을 넘어 다음 산으로, 그 능선을 타는 여정을 계속했다. 행선지는 일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센라가 그녀의 행선지에 맞춰 원래의 목적지인 투귀암에서 에치고로 변경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불기분방의 요괴가 백귀야행을 꾸려 전국을 떠돌고 있다라..!? 정말 그런가요?"
"네. 확실한 걸요.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슈텐도지는 전국 각지의 오니들을 규합하고 다닌다고. 이것도 벌써 삼년 전에 들은 얘기라 근황이라 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아직 그러고 다니지 않을까 싶네요."
"음.. 그렇다면 투귀암에 가봤자 소용없겠네."
동행하기로 합의를 본 직후, 이치린으로부터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투귀암에 들려야만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치린 같은 미녀를 두고 품지 않을 수 없었던 흑심 때문이었다.
본인은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 후배인 코우는 잠시도 감시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애석하게도 코우의 여행은 매우 피곤해졌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짓누르는 것은 두 번의 인질로 인해 절감한 스스로의 나약함이었다.
언제 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센라와의 여정.
코우는 이 여정이 너무나 소중해 언제까지고 계속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언제까지고 약한 자신인 채로 있어선 안 된다. 코우가 힘을 갈구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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