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대체역사 게시판에 글을 남기네요. 많이 늦긴 했지만 이제 임용고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해서 게시물을 많이 못 남길 것 같은데, 그 전에 미리(?)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서로마 강역 회복이라는 목표의 완전 달성 및 영토 유지를 실패하게 만든 근본적 원인은 역병이었죠. 유스티니아누스 본인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았을 정도로 역병의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농산물 수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족한 세수를 메우려고 세율이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더 고통받는 악순환이 이어졌죠. 이런 점으로 인해 고토 수복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후임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2세 때부터는 기껏 회복했던 구 서로마 지역이 상실되었습니다. 결국 서로마 지역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죠.
그런데 만약 역병이 돌지 않아 유스티니아누스가 서로마 강역을 완전히 수복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표를 달성했으니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의 권위는 상당히 올라갔을 게 자명합니다. 그런데 확장한 영토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로마 동서 분열 이전에도 광대해진 영토를 관리하는 일은 역대 황제들과 관리들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업무였으니까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에는 서로마 강역을 유지했을 수도 있었을지 몰라도 유스티누스 2세 대부터 서서히 영토를 잃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운이 따라주어서 서로마 강역을 계속 유지했다면, 카롤루스의 '서로마 제국'이나 오토의 신성 로마 제국 등 시쳇말로 '폰로마'가 등장하는 시기가 늦춰졌거나 아예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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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유스티니아누스 본인과 외숙인 유스티누스 1세도 로마화된 트라키아인이었다고 하죠. 벨리사리우스는 고트족 혈통이었다고 하고요. 그만큼 로마 제국 자체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는 증거니까, 장기간에 걸쳐 민족 간 갈등이 생겼을 것 같긴 합니다. 특히 근대에 민족주의가 발흥했다면 더더욱 필연적이었겠죠. 현실 역사에서 오스만 제국이 여러 갈래로 분열된 원인 중 하나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마자르족의 이주, 슬라브인과 튀르크인의 연립 민족인 불가르인의 침입이 현실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큰읍내 님 말씀처럼 그런 여러 민족의 이동 등이 대체역사 안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22.03.01 03: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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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계 불가리아인과 남슬라브족의 혼혈은 불가리아인이지만, 크로아티아/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란스카) 등으로 나뉜 서부 남슬라브족도 존재할 터이고... 마자르족과 아바르족도 들어오고, 먼 미래에 쿠만족, 페체네그족 등의 유목민도 들어오고 하니까... 슬라브 제민족 vs 동게르만 제민족 vs 라틴계(로망스) 민족들이 내부에서 싸움과 동시에 헝가리인이 떨어져카가서 로마와 대립하는 구도겠네요. | 22.03.01 03: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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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계 불가리아인 ➡️ 튀르크계 민족인 불가르족 | 22.03.01 03: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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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로마 제국 말기에 세르비아 등지에 영토를 많이 상실했죠. 물론 이건 팔레올로고스 내전 탓이 컸지만, 그만큼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의 힘이 어느 정도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동유럽이 아시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지역이기도 하니, 다양한 민족이 이주해오고 그로 인한 갈등이 격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죠. 많은 사람에게서 제대로 주목을 못 받아서 그렇지, 동유럽의 역사를 제대로 파다 보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 22.03.01 04: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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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슬라브족 등도 쭉 살다가 키이우 루스 대공국을 세웠으니까요 ㅇㅇ | 22.03.01 04: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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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반란 때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그 이후로 의심하는 습관이 더 심해졌겠죠. 더군다나 벨리사리우스의 인기가 워낙 높기도 했고, 실제로 인기 많은 장군이 황제 목을 날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한국사에서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 있으니까요. 물론 일관성 없이 사람을 쓴 것과 군납비리를 대충 넘겨버린 점 등은 확실하게 비판받을 요인입니다. | 22.03.01 04: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