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추워죽을 것 같은 날입니다.
독감으로 인해 집필이 현저히 느려진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완성했으니
제 모자란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무한한 영광을 돌립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용상은 무언가 다급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방금전의 상황이 괜히 신경쓰여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엄지 손톱까지 물어가면서 초조함을 드러낸다.
"으으... 스승님과 조 동생 단 둘이라니... 신경쓰여..."
그러나 곧바로 안심하는가 싶으면,
"아니지? 조 동생은 세간에는 못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그럴 일은... 없겠지?"
또다시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초조함에 빠지다가,
"으으... 조 동생에게 유부녀 취향이 있는건 아니겠지? 설마 스승님에게 못생긴 사내 취향이 있다던가..."
기어이 깨달음과 포기의 중간선까지 와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러 버리기도 한다.
"으으으... 그, 그럴리가 없잖아? 우리 둘은 그 밤을 같이 지새기도 했는데, 설마 조 동생이 바로 바람을 핀다고? 그럴리가... 아니야, 분명 잘못된...... 으으윽!! 아니잖아, 바보 용상! 왜이리 사리분별을 못하는거야!! 현실적으로 그럴리가 없잖아!? 하아... 이러지마 제발......"
별별 생각을 하던 차에 기어이 힘이 빠지고 어깨가 축 늘어져 고개마저 무겁게 숙여졌다. 마음이 악받쳐 눈물이 살짝 고여 흐를정도로 용상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럴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승에게 그를 잠시 용무라는 이유로 빼앗겼다는 사실이 용상에게는 힘겨웠다. 살면서 처음겪는 가장 풋풋한, 소녀스러운 반응에 당황함도 이제는 슬슬 적응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현실을 되찾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변에 그 모습을 보는 이도 없었으니 부끄러울 일도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지간히 둘의 대화가 신경쓰이는 용상이었다.
"......하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이리 늦는거지? 이리 심도있는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내일 당장이 무림대회인데 말이지. 슬슬 각 문파들이 금향궁으로 도착할 시간인데...... 응?"
그때 마침 금향궁 바깥에서부터 달콤한 과일향이 풍겨져 오기 시작했다. 용상은 그 달달한 냄새에 절로 잡생각이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호기심에 냄새가 나는 방향을 찾기위해 금향궁 본궁 옆에 솟아오른 나무 위로 올라가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이 향은 분명... 살구(杏)향인데. 어쩜 이리도 진하게 풍기다니. 신기하네. 주변에는 분명 살구나무가 없을텐데... 응? 저... 건?"
용상은 서둘러 나뭇잎을 가림막 삼아 몸을 숨겼고, 곧 금향궁을 향해 다가오는 가마무리를 발견했다.
' ......이상한 자들이다. 살구향이 진하게 풍겨오던 이유는 저 가마가 원인인가? 게다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두 사람과 시... 녀? 시녀로 보이는 자는 그렇다쳐도 저 두 사람은..."
한 명은 상의를 탈의한채 도롱이를 걸친 대머리가 인상적인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삿갓을 써서 그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검을 쥔 손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보통 예사롭지 않았다. 용상은 입으로 내쉬던 숨이 살살 가빠져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긴장했다.
"......확실해. 엄청난 고수들이다. 내가 과연 저들에게 대적 할 수 있을까? 싸울 수나 있을까? 마구 두근거리는 구나. 그리고... '
용상의 시선은 살구향이 진하게 풍겨져 나오는 일인승 가마에 꽂혔다. 어느 귀족의 여자라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마를 호위하는 셋 보다도 가마 안의 인물이 가장 경계가 될 정도 였다. 두 고수는 이동 중에도 주변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용상은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지 않게 최대한 자신의 기척을 숨겼고, 계속해서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때, 용상의 뒷통수가 싸늘할 정도의 오한을 느껴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아아아아악...
' !!!! '
순간 용상은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차갑고 괴상한 기운을 느꼈다. 뱀. 온갖 무수한 잔꾀가 넘쳐흐르는 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알몸째로 훑어보고있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혹여나 싶어 조심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때 머리가 주뼛 곤두서는 듯한 본능이 무언가를 용상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 ......이 불안한 기운은...... 가마인가? 뭐지? 저 가마에는 누가 타고 있는거야?? 불길해. 하필 금향궁 본궁으로 향하고 있다니... 하지만... '
꺼림칙한 기운과는 정반대로, 그들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일 것이라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 자체가 살구향과 뒤섞인 탓인지, 가마에서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침착하게 만드는 향인가? 독향은 아닌데...... 그러고보니 조 동생이 그랬었지. 나는 지금 만독불침의 상태라고. 행여 독이 있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해도 이 달콤한 살구향은 유난히 내 마음을 달래는 기분이야. 무섭다. 고작 향 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니... 아니면 진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향이란 말인가? '
용상은 가마무리가 어느덧 본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순간 그 가마무리의 불경함에 화가 머리 끝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뭐, 뭐야? 감히 가마 째로 본궁으로 들어간다고?? 뭐, 이런 파렴치한들이 다 있지?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궁안의 궁주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무뢰배란 말인가?? 하아... 마치 금향궁이 이들에게 유린 당하는 기분이 드는구나. 으으... 그래도 참아야 한다. 참아야해, 용상. 끝까지 바라보는 거다. '
용상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지만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 조 동생... 스승님... 대체 금향궁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어? 누가 나온다. '
방금 전, 본궁으로 들어갔던 세명의 가마무리가 가마를 제외하고 바깥으로 나와 주변을 감시하듯 움직였다.
그때.
' !?!? '
긴 검을 가진 삿갓의 검객이 용상이 있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과연 그 눈빛이 착각이었을까? 내 바로 위의 나뭇가지를 본 것은 아닐까? 가지가지 생각이 용상의 머리 속을 휘젓고 있었다.
' 설마, 내가 들킨건가? '
그리고는 용상이 잠시 눈을 감고 떴을 때, 그 옆에 있던
도롱이를 걸친 괴상한 노인이 사라져 있었다. 용상은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고 뒤로 주춤했다.
' 어, 어떻게 된거지?? '
"이런 곳에 홀로 숨어서 뭐하는게요?"
"!?!? 윽!!"
용상의 귀로 들어온 늙고 중후한 목소리가 온몸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었다. 당황한 용상은 그 자리에서 뛰쳐나갈 법 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않고 그저 고개만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웃고 있었다.
"허허. 이것 보게. 내가 생각 이상으로 꽤나 겁을 줬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요지부동? 하! 담력 하나는 호걸에 준하는 아가씨구만. 금향궁에 이런 여협이 있을 줄은 몰랐군.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같이 내려가세나."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나머지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노인의 모습은 마치 매(鷹)와 같았다. 용상은 침을 삼키며 노인의 말대로 지면으로 착지해 그들을 마주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껄껄! 그새 말도 할 줄 아는게요? 행화림의 살구향에 살짝 마비독도 첨가되었는데 그걸 비집고 입을 열 줄이야. 재밌군. 그나저나 그 검... 호오... 과연..."
노인은 용상의 검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천상검(天上劍) 아닌가?"
용상이 흠칫하며 검을 품안에 넣고는 경계했다.
"이 검을 아십니까?"
노인이 헛허 웃으며 말했다.
"알다마다요. 구 무림맹의 맹주 용연 대협의 검 아닙니까? 신기하구먼. 그 영웅의 검이 금향궁 여협의 손에 있다니 무슨 운명인지 허허. 그럼 혹여, 여협께서 용 대협의 딸이라도 되는 게요?"
용상은 입을 꼭 다물고는 조심스레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이 폭소했다.
"하하하하!! 진짜인가? 이것 참! 하하!...... 흡!"
"윽!!"
챙!!
순간 노인의 손이 마치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용상을 덮쳤다. 대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용상은 노인의 기세를 가까스로 읽고 재빨리 천상검을 뽑아내 유려한 초식으로 물 흐르듯 반격해 공격을 와해시켰다. 노인은 용상이 반사적으로 출수한 초식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호오... 이런이런. 정말인가? 용연칠절의 검결 참락성진강(斩落星辰纲)의 강로결(剛蘆抉)이구먼. 게다가 이 강건하면서 맑고 은은한 기운은 현현조화공(玄玄造化功)의 기운이로군. 과연, 여협의 긍정대로 용 대협의 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군. 그래, 젊은 여협께서 이름이 어찌되오?"
용상은 한 초식의 검을 휘두르고 반격한 탓인지 긴장이 어느정도 풀어졌다. 상대가 더 이상 공격의 뜻을 품지 않은 것을 흘러나오는 잔잔한 기운으로서 확인했고 조심스레 천상검을 검집에 넣었다.
"용상(龍湘) 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다소 놀란듯 했다.
"호오. 정말 용씨인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내 생각과는 다르다는 결론이라는 것인데, 정말 용 대협의 자녀인 것인가......"
나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의 노인을 보고는 출생은 더 이상 비교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금향궁에 온 목적을 확인해야 할 용상의 순서였다.
"그, 그럼 이제 본녀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좋소. 상황으로 보나 금향궁에 결례를 범한 것은 우리 쪽이니 금향궁 검녀께는 무엇이든 대답해드리리다."
용상은 그제야 크게 한 숨을 쉬고 한꺼풀 경계를 풀어 신중히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들은 누구지요?"
그때 무리 중에 작고 수수해보이는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은은한 미소. 알 수 없는 눈빛. 단순해 보였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용모에서 터져나오는 신중함에 용상은 손에 땀을 쥐었다. 여성이 말했다.
"우리는 행화림(杏花林)입니다."
"해, 행화림?? 그 정체불명의 집단 말하는 겁니까? 그래서 살구(杏)향이..."
여성이 용상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 지었다.
"후훗. 저는 행화선(杏花仙)을 보좌하는 서용(書蓉)이라 합니다. 여협께서 맞이하신 노인께서는 응인(鷹人) 만리붕정(萬里鵬程). 만리 어르신입니다."
"응인? 만리... 어르신?"
용상은 만리붕정의 용모를 조용히 살펴보았고 과연 별호답게 스스로를 마치 매처럼 보이기 위해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서있는 상태에서도 손을 매의 발톱 다루듯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의 별호가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응조수(鷹爪手)의 달인이 나란 말이지. 혹시 들어본적 있나 용 여협?"
용상은 조심스러웠다.
"처, 처음 듣습니다만..."
"흠... 용연이 그것이 제대로 이야기도 안한 모양이군. 나름 발군이었는데 나도. 이름이 아깝도다."
"아... 하하..."
용상이 힘없이 웃는다. 그리고 마침 눈에 띈 인물이 있었으니.
"저기 뒤에 계신 분 께서는 누구신지?"
그때 용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을 든 무인이 순식간에 용상의 앞으로 다가와 검을 내리쳤다.
휙!
"윽?!"
콰창!!
날붙이의 섬뜩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의 공격마저 용상은 기지를 발휘하여 막아냈다. 하지만 만리붕정의 장난스러운 초식과는 다르게 이쪽은 제대로 베어버릴 심산이 가득한 살초였다. 부딪힌 두 개의 칼날은 불꽃을 튀겨내며 힘겨루기를 하기 시작했고 용상은 이를 악물며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 윽... 이 날카로운 기세. 혹시나 해서 이 사람에게 만큼은 경계를 소홀히 않아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머리가 쪼개지고 심장이 꿰뚫릴 뻔 했다. 어째서지? 나에게 적의는 없어보였는데, 이 검격은 대체 뭐지? '
캉!!
말이 없던 검사는 검이 서로 맞부딪힌 채 그대로 위로 치켜들어 용상 째로 공중에 들어 올렸다.
"마, 말도 안돼...!? 무슨 완력이?!"
용상도 이에 질세라 공중에서부터 검을 휘둘러 검기를 뿜어냈다.
휙! 휭! 파앗!
검사는 용상의 검기를 모조리 자신의 검집으로 튕겨내며 아무렇지 않게 피해냈다. 하지만 용상은 이를 노렸다. 천상검의 검집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쌍검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쌍고겸쇄(雙苦鉗碎)!"
용상의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쌍검술에 검사는 깔끔한 합 하나하나마다 그녀의 모든 초식을 간단히 끊어냈고, 강하고 예리하게 벼려진 쾌검을 용상을 향해 뻗어냈다.
촤아악!!
' 쾌검?? 이리도 빠르게?? 게다가 이 초식은 점창파의...?? '
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검사의 쾌검이 용상의 방어로 인해 와해되며 둘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서둘러 용상은 거리를 벌려 검사의 다음 초식을 기다렸다. 만리붕정의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가 칼부림의 소리만 가득했던 자리를 깨어냈다.
"호오... 멋지군. 점창 무명(無名)의 공격을 방어할 뿐 만 아니라, 반격까지하고... 게다가..."
만리붕정은 용상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용상은 무너지는 모습없이 기세가 당당했었다. 만리붕정은 턱을 쓸어내며 그녀의 표정에 감탄했다.
"웃어?"
마치 사냥감을 찾은 듯, 한껏 날카로워진 눈빛과 미소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어, 용상의 호전적인 모습에 만리붕정의 감탄을 자아냈다. 남자를 상대로 한치의 물러섬 없는 용상의 모습에 놀랐지만, 검사 또한 냉정한 눈빛으로 일관하며 째려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 자. 여흥은 끝났습니다. 두 분 다 검을 내려놓으시지요? ]
매우 상냥하면서 가녀린 목소리가 본궁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용상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무릎을 꿇고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용상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뒤, 천상검을 집어넣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목소리의 주인공. 서용이 먼저 나서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녀에게 다가갔다.
"생각한 바는 이루셨습니까, 행화선(杏花仙)?"
"후후. 스승께서 하신 마지막 한 마디가 전율에 이를 정도 였습니다. 아직도... 짜릿하군요."
"뭐라 하시던가요?"
.
.
.
" ' 얕보지 말라. ' "
작고 아담한 키. 가녀린 몸매. 남녀노소 그 누가 마주 한들 감히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고 장담을 못 할 정도로 뇌쇄적인 눈빛. 가지런하고 정갈하지만 아름다운 움직임의 선율. 그리고 살구향.
' 이자가 행화림의 신선인가? 굉장한 기세다. 기운으로 봐서는 무공을 익힌 여자는 아니다. 허나 이리도 편안한 기운을 뿜어내다니. 지금 짙게 깔리는 살구향과 관련있는 것 일까? '
"어머? 이분께서는?"
행화선이 용상을 보고는 물었다. 용상은 식은 땀과 함께 두 손으로 천상검을 치켜 세우고 공손히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금향궁. 용상이라고 합니다."
행화선이 신비롭게 미소지었다.
"아아... 소문의 백운화(白雲花). 용 여협이시군요?"
"보, 본 녀를 아십니까? 제 별호는 제대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행화선은 바람타고 지나가던 나비마저 홀릴 듯한 표정을 짓고 용상에게 사뿐사뿐 발걸음 치며 다가왔다. 용상은 두려웠다. 알 수 없는, 범상치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데 마치 그 눈 속에 빠져들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당연히 알지요. 얼마전 공동파 부근에서 시끌벅적 했던 거대규모 도적떼를 가장한 금나라 자객을 몰살시킨 장본인 중 한 사람. 그리고 전 무림맹주 용연 대협의 외동딸."
용상은 소름이 돋았다.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알았지만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는 행화선의 안목에 적잖게 당황했다. 게다가 자신의 출생의 사실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 마치 용상은 모르는 사람앞에서 벌거벗은 듯 했다.
"제 출생의 사실까지......"
"호호호! 신선 놀음을 벗삼아 천문을 희롱하고, 음양의 조화와 이치를 따지다 보면 제가 마주할 누군가의 정보를 알 수 있답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하지만 부디 걱정마세요. 당신은 저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운명일 뿐이니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 용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행화선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도 용상은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으니 상당히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는 행화선이었다.
"세상에. 만독불침(萬毒不侵)이라더니 정말이군요? 제가 직접 피우는 살구향을 맡고도 멀쩡하시다니. 당문에서의 선물이 제법 명줄이 긴 모양입니다."
용상은 순간 단호해졌다. 눈빛은 매섭고, 들이쉬는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자신을 더 놀리려고 한다면 가차없이 베어버리겠다는 본능이 용상에게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어째서 금향궁에 온 것이지?"
행화선은 소녀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뒷걸음질 치며, 빙글 한 바퀴를 돌고나서 용상을 아이가 쳐다보는 것 처럼 쳐다보았다.
"후후. 그리 물어보시니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건 제가 먼저 이야기드리면 재미없습니다. 제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은 맨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지요. 그나저나... "
행화선은 곧바로 용상의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내밀어 그녀의 오른 뺨을 스치듯 겹쳤다. 용상은 그녀의 부드럽게 다가오는 살결의 촉감에 너무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행화선의 갑작스럽고 고혹적인 행동에 용상은 주춤했다. 그리고 행화선의 냄새를 맡는 듯한 콧소리가 끝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사뿐히 감쌌다.
" ' 처녀 ' 는... 아니시군요? 게다가 ' 그 '의 냄새까지 독차지하다니... 소녀는 용 여협이 부럽습니다. 후후...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지요?"
"어, 어, 어떻게 그걸...??"
용상은 행화선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소스라치게 놀라 한참을 뒷걸음질 쳤다. 어째서 그 사실을 아는지 몰랐지만 그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익숙하기도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남을 통해 들어버린 탓에 놀라버린, 이제 막 처녀를 벗은 여성의 순진한 반응이었다. 행화선은 그런 용상의 반응이 재밌는지 쿡쿡 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후후. 순진한 토끼를 놀리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군요."
"수, 순진한 토끼?"
용상은 행화선의 말이 성가셨는지 그녀의 말을 되뇌였다. 지는 느낌이지만 결코 지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치 자신을 그녀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애완동물 취급하며 용상에게 놀아주는 듯 하는 행동에 감히 행화선의 깊이를 알 수 없어 조용히 입술만 잘근 씹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행화선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자, 서용. 이만 가시지요. 우리는 예정대로 깔아놓은 도로를 걸을 뿐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 끝에 살구향은 만개할 것이고, 행화림은 물 만난 황금빛 비단잉어처럼 계속해서 영원토록 나아갈 것입니다."
"행화선의 말마따나."
행화선이 사뿐히 용상에게 다가와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럼 추후에 우리는 다시 뵙는 걸로 하시지요. 용 여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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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동안 용상에게 바람이 다녀왔다 금방 빠져버린 듯, 행화림의 인물들은 멍해진 용상을 남겨놓은 채 금향궁을 부드럽고 은은하게 빠져나갔다. 마치 그 모습은 구름을 타고 바람결을 따라 흘러가는 여 신선과 추종자들과도 같았다.
용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넋을 잃은 듯, 초점없는 눈동자로 하늘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엇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이 무림계는? 게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은 대체... ' 그 '의 냄새를... 독차지해? 이, 이상한 소리만 하고 가다니... 발칙하다 발칙해."
어느 덧, 살구향이 주변에서 사라지자 용상은 급히 무언가 떠오른 듯, 하늘을 보던 자신의 양 볼을 때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서둘러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알현실로 뛰어 들어갔다. 알현실의 문 앞에 도착한 용상은 잠시 들어갈지 말아야 할지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아직 회의가 끝나지는 않았는지 주변을 지키던 문지기가 보이질 않아 잠시 멈춰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있어 안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상아는 들어오거라."
"제자 용상! 들어가겠습니다."
용상은 바깥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헛기침을 두 어번을 하고 옷가지를 가지런히 한뒤, 알현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용상의 눈에는 너무나 반가운 뒷 모습이 반기고 있었다.
"조, 조 동생!"
"......"
"응?"
그러나 뭔가 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조활의 고개는 숙여지고 어깨는 천근추라도 단듯 힘없이 바닥을 향했다. 그의 표정을 보려고 용상이 다가가 조심히 확인하려는 찰나, 스승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용상은 들으라."
"네?? 네, 네. 스승님, 부디 분부를..."
그때 용상과 조활 주변에 화중선, 성설 등의 금향궁 인원들이 몰려와 감쌌다. 용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모두를 쳐다볼 뿐이었다.
"......중선 대사저와 설 사저? 그리고 용매, 결로, 봉아 까지?"
도저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몰랐다. 다들 슬픈 눈으로 용상과 마주했고, 용상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알 수 없어 고개와 시선만 대 여섯번 굴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중 용상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은 것은 큰 한숨과 전에 없던 아쉬운 목소리의 화중선이었다.
"에휴. 미안, 사매. 사매는 이제 더 이상 금향궁의 사람이 아니란다?"
.
.
.
.
"......네?"
너무나 충격적인 통보에 용상의 눈은 휘둥그레 졌다. 용상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저와 동기, 그리고 사매를 바라보았다. 다들 쉽사리 용상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언가 자신의 이해범주를 벗어난 이야기들이 자신을 덮치자 입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다, 다들 왜 이래요, 오늘 아침부터? 다들 나를 이상하리 피하기만 하더니, 이번엔 파문이라구요? 어째서죠? 설마... 제가 조 동생과의......"
티리리링!!!
온부인의 비파소리가 구슬피 알현실을 뒤덮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구슬퍼 다들 말이 없었다. 비파의 음색과 방금 들은 이야기에 당황한 용상은 그저 스승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은 스승님의 표정에 용상은 더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용상. 네가 어떤 일을 하여, 혹은 어떤 연유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너는......"
잠시 온부인의 입이 굳었다. 참으로 내뱉기 힘든 말을 그녀에게 하려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런 고통도 자신이 짊어져야할 운명이라면 이것이 곧 순리이니라. 온부인은 입술을 꾸욱 깨물고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당문의 사람이 되거라. 너와 금향궁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용상은 스승의 높낮이가 없는 무미건조한 한 마디에 너무나 당황해했다. 그녀의 시선은 칼바람에 에어 홀로 나뭇가지에 붙어 흔들리는 말라버린 나뭇잎과도 같았다.
"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스승님?? 저는 죽으나 사나 금향궁의 용상이요, 온부인의 제자입니다!! 이상한 소리 이제 그만......."
"상 사매!!"
성설이 소리쳤다. 용상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에 휩싸인 모습으로 뒤바꼈다. 환멸감이 가득 섞인, 뒤틀린 눈빛과 함께.
"뭐, 뭐야. 다들... 다들 날... 가지고 놀아요...?"
"그런게 아니다, 사매."
용상이 단전의 모든 진기를 목젖에 담아 소리질렀다.
{{ 아니기는!!! }}
현실에 대한 분노로 용상 자신도 모르게 성파공(聲破功)을 내질렀다. 알현실과 금향궁의 주변에 이르러서까지 그녀의 분노와 환멸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퍼져 주변에 날아가던 새들조차 놀라서 근처를 날기를 꺼릴 정도였다.
용상이 쉽사리 납득할리 없었다. 그리고 이제껏 남들이 보지 못한 울분섞인 표정과 원통스러운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말도 안돼...... 이유도 불문이오. 그냥 다짜고짜 금향궁을 나가라는 이야기에 본 녀가 아! 납득하고 물러설 줄 알았소?? 입으로 내뱉으면 그것이 말이 된다고 나를 설득할 참이오?? 웃기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나를?? 어째서 나를!?!?"
용상의 곡소리같은 울부짖음에 온부인의 치마자락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차피 이리될 운명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각박하고 이유없는, 가장 잔혹한 파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뿌리치고 더욱 매몰차야 했고, 속에서는 피눈물이 용암끓듯 터지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며, 격앙되어 구슬프게 울화가 분출되고 있었다.
용상이 눈물을 글썽이며 온부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스승님... 제발... 제발 파문 만은 면해주세요. 제자는 이런 현실, 제 얕은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자에게 잘못이 있다면 부디 그 무게의 가볍고 무거움에 연연하지 말고 엄하게 꾸짖어주십시오. 대련이란 단어를, 소녀가 살고 있는 동안에 절대 입밖으로 내지 않겠습니다. 무조건 스승님의 말대로, 의지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제자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스승님... 제발...... 흐윽... 흑......"
모두가 용상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불쌍한 용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처절한 부탁에도 감히 뭐라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여는 이가 한 명도 없으니, 용상의 흐느낌은 공기조차 흐를 힘없는 텅 빈 밀실에서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을 어린 아이의 생떼가 들리듯 했다.
조용히 조활이 용상의 앞으로 다가가 시선을 마주했다. 용상은 조활의 얼굴을 드디어 마주하고는 흐느끼면서도 그에게 만큼은 따사로이 얼굴을 제 얼굴 만지듯 소중히 다루었다.
"조 동생......"
"누님...... 같이 나갑시다."
조활의 고요한 눈과 용상의 흔들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용상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소중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지나고 나서야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이제는 좀 의젓해진, 이제 막 떼를 쓰던 아이의 탈을 벗어던져 무언가 깨달은 듯한 소녀처럼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고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더 이상 금향궁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 잔인하게 생각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힘없이 몸을 가눌수가 없어 휘청이더니 조활이 서둘러 부축하고 알현실의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미안하구나.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게 된다면, 지금 현실의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너의... '
온부인은 알현실의 문을 벗어나려는 용상의 뒷 모습을 망부석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 계속해서 너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싶구나... '
온부인조차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보 전진을 위해 눈물을 매정히 훔치고 앞을 바라보았다.
"설아에게 명한다."
성설이 온부인의 앞에 다가왔다.
"하명하시지요."
온부인이 굳게 닫은 입술을 열었다.
"현 시간부로 당문 전 인원을 금향궁 밖으로 안내하거라. 이 이상 당문이 니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져선 안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 소협께 일러두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된다. 알겠느냐?"
성설은 최선을 다해 고개를 숙이고 궁주의 명을 받들었다.
"모든 것은 인간도(人間道)를 위해."
망우협려전(忘憂俠侶傳) (9)
* 다음 작은 간만에 개인소설 -마이라-입니다. 아마 수정한 스토리를 우선 올릴 듯?
* 망우협려전 10장이 무림대회인데 어째 쓸수록 분량이 제 생각을 넘어가고 있어서 심히 당황중입니다. 그런데 글 쓰는건 재밌으니 계속할듯? 월영전은 손 떼지 않을 예정.
* 저는 연재소설 게시판에서 개인작을 쓰고 있습니다.
http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 (연재소설 게시판)
http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574330 (모음)
개인작과 활협전 팬픽을 번갈아 연재중 입니다.
링크 남기니 관심 부탁드려요!
* 마이피도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마이피에서는 자작시도 쓰고 있습니다!
https://mypi.ruliweb.com/mypi.htm?nid=574330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