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색채의 침공이 끝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상처가 시간이 흐르며 아물듯 키보토스의 피해도 천천히 회복되고 있는것 같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나들이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오르지만 슬프게도 내게 그럴 여유는 없다. 난 언제쯤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
4월 20일
당번으로 온 히나 덕분에 간만에 일이 빨리 끝났다. 감사를 전하고 싶어 같이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히나 역시 선도부 일로 바쁘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시무룩해 하는 히나를 잔뜩 쓰다듬어주고 돌려보낸 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한 취미였지만 키보토스에 온 후로는 너무 바빠 한동안 연필을 잡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동안 그림을 그리던 중, 문이 열리며 유우카가 들어왔다. 왠지 화난 것처럼 보였다.
유우카는 곧바로 다가와서는 내 눈 앞에 종이를 들이대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색채 사태 직전 큰 맘 먹고 구입했던 비싼 고급 색연필 세트의 영수증이었다. 적절히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유우카의 눈은 속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3시간 동안 혼나고 색연필 세트도 압수당했다. 내 돈으로 산 건데... 4개월만에 그려보는 그림인데...
-월 29일
시라토리區 재건과 온갖 일들 때문에 바쁘다 보니 5일 연속 철야를 하게 됐다. 처리하고 처리해도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순간,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며 그대로 기억이 끊겼다.
정신를 차려보니 트리니티의 종합병원이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미네와 세리나의 말에 따르면 심하게 과로한 나머지 쓰러진 것이라고 한다. 역시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걸까.
5월 2일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미네와 세리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나절 정도만 있다가 퇴원했다. 일은 계속 쌓이고 있고 내가 없으면 다른 학생들이 떠맡게 될 테니까.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틈만 나면 전기톱을 휘두르려는 하나에가 무서워서기도 하지만.
샬레에 돌아오니 노아와 유우카가 있었다. 내가 쓰러진 동안 일을 대신 처리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걱정하는 둘에게 농담을 던지며 안심시켜주고 다시 한 번 서류지옥에 몸을 던졌다.
5월 19일
오랜만에 일기를 쓰는 것 같다. 시라토리區의 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급한 일들도 대부분 처리해서 어느정도 여유도 생겼다. 어디까지나 저번에 비해 여유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서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슬슬 퇴직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퇴직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절대 안된다며 길길이 날뛰거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를 붙잡으려 할 학생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호시노, 유우카, 히나, 미카, 나기사, 히마리, 이로하, 아오이, 카즈사, 키쿄, 키사키, 그리고... 그만 생각하자.
지금 당장 퇴직하려는 건 아니다. 선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도 많이 남았고 인수인계 등 여러가지가 남았으니. 적어도 시라토리區가 완전히 재건되고 키보토스가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남아있을 생각이다. 그래도 린에게는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지?
그나저나 퇴직하면 뭘 할까? 일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계획을 미리 세워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은데 와일드헌트에 입학신청서를 넣어볼까? 받아주지는 않겠지만. 아니면 만화를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리니까. 멋진 제목도 이미 생각해 뒀다!
-닫힌 세계를 떠도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멋지지 않은가!
5월 24일
결론부터 말하면 내 퇴직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린에게 퇴직에 대해 말을 꺼내자마자 곧바로 거부당했고, 곧바로 그만두는 게 아니라고 계속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통하지 않았다. 린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화났다기보다는 어딘가 애절하고 필사적인 표정. 결국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우울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어야 하는 걸까?
5월 25일
아로나와 프라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TV를 켜보라는 둘의 외침에 의문을 느끼며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누른 순간, 내 머리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긴급 속보! 샬레의 선생님이 은퇴!?'
뉴스에서는 나의 퇴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분명 나와 린만 알고 있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멍하니 TV를 보다 옆에서 계속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모모톡을 확인해보니 수많은 학생들에게서 온 수천 개의 모모톡이 쌓여있었다.
계속해서 오는 모모톡에 굳어있던 것도 잠시, 아로나와 프라나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업무실에 몰래 만들어 놓은 비상 통로로 향했다.
싯딤의 상자의 도움으로 평범한 로봇 시민으로 변장하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고 간신히 블랙마켓의 폐건물까지 도착해 숨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5월 30일
내가 도망쳤다는 것을 안 학생들이 나를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싯딤의 상자의 전력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 변장조차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내가 숨은 건물 근처가 자주 시끄럽던데 꼬리가 잡힌 건 아닌지 염려된다.
일단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피신해야 하지? 맨몸으로 나갔다가는 곧바로 들킬게 뻔하고, 그렇다고 여기 계속 있자니 위험하고 배도 고프다.
그래도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겠지. 지금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잡힌다면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뻔하다. 나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움직여야 ㅎ
(누군가에게 펜을 빼앗긴 것 같은 흔적이 있다.)
-10월 13일-
사랑하는 학생들과 맞이하는 아침은 언제나 좋다. 밤일을 너무 많이 해서 허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행복하니까.
학생들의 고백을 받아들였을 때는 고민도 되었고 걱정도 되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학생들의 새로운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예를 들면 린쨩은 귀를 깨물거나 빨아주는 것에 약하다든지, 노아는 평소에는 늘 여유롭게 행동하지만 밤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장 먼저 기절한다든지, 아야네와 세리카가 의외로 욕구가 엄청나다던지... 여기까지 하자.
그나저나 이 일기장은 왜 군데군데 찢어진 부분이 있는 걸까? 내가 찢은 기억은 없는데. 아로나와 프라나에게 물어봐도 말을 흐릴 뿐 제대로 답해주지는 않는다.
뭐,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지. 중요한 건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앞으로 더 힘내야겠네.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