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너티독은 마치 스필버그의 영화 같이 보이는 대작 게임을 만드는 회사로 여겨질 것이다.
너티독은 완성도 높은 그래픽과 스토리텔링이 합쳐진 최고의 게임들을 만들어서 게임의 경계선을 넓혀왔다.
90년대 중반의 너티독은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로 널리 이름을 알렸었다. 소니의 퍼스트 파티로 합류한 뒤에도 계속
너티독은 잭과 덱스터 같은 플래포머 마스코트가 될만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왔고 점점 더 발전하여 훌륭한 스토리와
액션이 결합된 언차티드 3부작과 라스트 오브 어스를 제작할 정도로 진화했다.
필자는 이전 소니 벤드 스튜디오의 역사, 소니 산 디에고 스튜디오의 역사,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역사, 인섬니악의 역사
등의 기사를 집필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가장 쓰고 싶어했던 기사는 너티독의 역사이다. 이 이야기를 쓰려고 몇년동안
노력해왔는데 이제야 소니 스튜디오중에서 왕관을 차지하고 있는 너티독에 관한 기사를 쓰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 너티독은 필자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워터 가든에 위치한 그들의 멋진 사무실로 초대해 주었다.
그곳에서 3일동안 지내면서 창립즈음부터 근무했던 직원들,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Evan Wells와 Christophe Balestra, Amy Hennig과 Neil Druckmann뿐만이 아니라 너티독의 공동창립자인 Andy Gavin과
Jason Rubin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너티독은 나에게 20명에 가까운 직원들에 대한 제한이 없는 접근권을
주었고 내가 묻기를 원하는 어떤질문을 어디에서나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 권한을 나는 십분 활용했다.
3일동안 내가 알고자 했던 모든 정보들과 아이디어들을 얻을수가 있었고 내가 여지껏 작성했던 어떤 기사보다도
훌륭한 결과물을 얻어낼수 있었다. 여지껏 쓰여진 어떠한 기사보다도 완벽한 너티독의 역사를 즐기기를 바란다.
Colin Moriarty
유태교에서는 남자아이가 13세가 되면 Bar Mitzvah라는 이름의 축하행사를 하게된다. 이 행사에 참가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pre-Bar Mitzvah라는 수업을 이수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서 12살의 Jason Rubin와 Andy Gavin이 만났다. 바로 이들이
훗날 게임 산업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튜디오들증 하나를 창립하게된 루빈과 게빈이었다.
북부 버지니아에서 열린 시몬씨의 수업에서 마음이 맞는 아이들끼리 그룹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수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작은 클럽이 만들어졌었죠"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제이슨과 나 그리고 다른 두명은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마침 우리는 애플2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2년간 프로그래밍을 해왔었죠"게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제이슨은
그때 이미 스스로 작은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그들의 능력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걸 즉시 알아차렸다.
그들의 우정과 계속되는 파트너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2살의 아이가 만든것이지만 제 게임들은 매우 진보된 방식의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고 제이슨은 예술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제이슨은 매우 훌륭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게임에서 훌륭하게 실행시키지는 못했고 제 게임의 그래픽은 솔직히 좋지 않았었죠. 그래서 정말로 빠르게 우리는 서로
"야 우리 뭉쳐야 겠는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그들의 장점을 합친 게임의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시절 비디오 게임과 컴퓨터 사업에 있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모든것이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입니다."라 게빈은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게임기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아이들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빈과 루빈, 그리고 다른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동료들은 컴퓨터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희귀한 때에 살고 있었다. 특히나 그 나이대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문제가 생겼을때 지금 처럼 인터넷이 없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문성이 자라나게 되었다.
"정보를 얻을곳이 없었지요" 루빈은 지적했다. "문제가 생기면 답을 구할곳이 없는거에요" 어떤 해답을 얻기위해서 이 소년들은
파워 애플 유저들의 그룹이나 산업 종사자들에게서 답을 얻을수 있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By 1984, Gavin and Rubin were copying Nintendo's famous arcade game pixel-by-pixel. (Courtesy: Wikipedia)
" 그 사람들을 저는 언제나 "간달프"라고 불렀지요"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그러한 사람들을 그는 그룹 모임에서나
전화를 통해서 만났었다."어떤 사람은 하얀 긴 수염을 기르고 있던 나이드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특별하게 아는것이
많은건 아니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처럼 온라인 포럼이 없던 때일때에 그분의 대답은 큰 도움이 되었지요. 물론 책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수가 적었어요... 책들은 구글처럼 질문에 해답을 던져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책을 얼마나
살 수 있었겠어요? 온라인에서 찾을수도 없구요."
그당시 가장 중요한 정보의 소스는 바이트 매거진이었지만 그 조차도 정말로 희소했었다. "반대로 보면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을
할줄 모르는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을 할 줄 알면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뛰어난 점을 가지고
있던 것이니깐요"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새로운 파이팅 게임을 만들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때 우리는 캐릭터들을 똑같이 베껴온 것들을 만들었습니다."라고 게빈은 인정했다.
"처음 우리는 다른 게임의 캐릭터를 똑같이 베껴오는 것이 안되는 행위라는걸 알지 못했습니다." 이 소년들은 1000 ISO 필름에 다른 게임들의 움직임을 녹화한 후에 프로그래밍을 하여 닌텐도의 유명 게임인 '펀치 아웃'을 PC 버전으로 포팅했다. "솔직히 결과물은 굉장히 좋았습니다."게빈은 자랑스러운듯이 말했다. 그들의 파트너쉽은 문제점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게 했고 루빈과 게빈은 아케이드에서나 할 수 있었던 훌륭한 액션게임인 펀치아웃을 PC로 포팅해 내었다.
하지만 1984년에 재앙이 닥쳤다. 닌텐도가 변호사를 고용해 루빈과 게빈을 고소한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닉 하게도 루빈의 아버지는 지적재산권을 중점으로 하는 변호사였고 후에 소년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불법이라고 지적했지만 아이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외적 요인이 아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던 실수인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디스크에 공디스크를 복사하여 데이터를 날려먹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 백업을 만들려다가 실수로 공디스크를 복사해서 데이터를 모두 날려먹었습니다. 정확히 기억하지만 않지만 12살 소년의 백업을 하는 습관이 모든걸 무로 만든거지요." 그들의 펀치아웃 불법 버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웃기는건 펀치아웃을 날려먹은것이 이들이 게임 데이터를 잃어버린 단 하나의 사건은 아니란 점이다. 제작하던 오리지널 골프게임또한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폭해버린 좌절에서 벗어나 둘은 최초의 오리지널 게임을 재작하게 된다. Math jam이 그것인데 그 당시 유행하던 많은 교육용 애플2 프로그램이었다. 게빈과 루빈은 아직 너티독이란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대신 JAM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Jason과 Andy’의 Magic의 약자이다. 그들의 새로운 회사는 1984년에 세워졌는데 나이가 14살때의 일이었다.
JAM은 스스로 게임 퍼블리싱 까지 맡았었는데 그때 많은 인디애플용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하던 방식이었다. 게임을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한후 기본적 조작을 사진으로 찍어 복사한 뒤 집락백에 집어넣어 판매하던 방식이었다. 그들은 1985년 학교
들에게 Math JAM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15세 소년들에게 극복하기 힘든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판매하려면
교육부 정책에 따라 3~4명의 정신학자들과 16명의 선생님들의 인증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게임에 대한 룰이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 거지 같았죠. 말해지는 데로 기준을 맞춰야만 했습니다."
루빈과 게빈은 매쓰 잼을 제작하다 부딪힌 예상외의 문제점 이후로, 좀더 그들의 게임에 대한 열정을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매쓰잼은 게임이었지만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좀더 수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에 만들것이었죠."
하지만 교육용 제품을 만드는것은 많은 제재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열정이었죠"라고 루빈은 덧붙였다.
그들의 첫번째 게임은 "Ski Crazed"였는데 1986년에 발매했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16세였다. 이 타이틀은 때때로 그들이
아웅다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제이슨이 이 게임을 해킹했었지요." 원래의 게임 제목은 Ski Stud 였다고 말하면서
게빈은 지적했다. "슬로프를 스키로 내려가면서 이쁜이들을 낚아챈다음 뜨거운 욕조로 들어가는 게임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스키 스터드는 잘 구동되지를 않았습니다. 루빈은 베이직으로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정말로 정말로
느렸었습니다. 언덕을 내려갈수록 점점더 느려져서 제가 어셈블리로 다시 프로그램해서 빨라졌었죠."
Ski Crazed was JAM's first proper game. The boys were 16-years-old. (Courtesy: Eli's Software Encyclopedia)
스키 크레이즈드는 1500장 정도가 판매되었는데 개당 2불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개발도중 그들은 핀볼 컨스트럭션 셋트라는 개발툴
에서 벗어나 테이크 원이라는 개발툴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의 컴퓨터는 부모님이 사주신 것이었고 그 외에 특별히 개발비가
나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익은 전부 다음 게임의 개발자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이 정말로 원했음에도
가질수 없던것이 한가지 존재했다. 그것은 하드 드라이브였다.
작업하다 에러나 실수로 유실했던 경험때문에 게빈과 루빈은 거리 반대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불렀었는데 그 사람은 5메가 바이트
하드 드라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가격은 24000 달러 였었다. "그때 제가 처음으로 메가 바이트 단위의 하드 드라이브를 보고
생각했던것은 이 사람을 꼭 합류시켜야돼!였습니다."
데이터를 날려먹었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게빈과 루빈은 트리오를 구성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합류하지 못했다. 그는 도둑이었다. "사실 그 사람의 하드 드라이브는 절도품이었습니다. 그당시 우리는 그걸 알지
못했었죠. 그 사람은 10만 달러 상당의 카드 사기를 행했었고 FBI에게 체포당했습니다.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 친구는 정말 큰 문제에 빠졌었죠."라고 게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게빈과 루빈은 전에 만들었던 게임으로부터 엄청난 수익을 얻지는 못했지만 16세 치고는 괜찮은 성과였다. 그로 인해 다음 게임인
드림 존은 퍼블리셔인 Baudville와 계속적인 파트너쉽을 유지하면서 발매되었다. 이 게임은 1987년에 발매되었다.
드림존은 많은 양의 텍스트와 그래픽이 결합된 형태의 어드벤쳐 게임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꽤나 진보한 방식의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 게임이 두 콤비가 최초로 만든 애플2 전용이 아닌 멀티 플랫폼 게임이었다. 아마가의 코모도어 시리즈에서도 구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픽이 구린 미스트 시리즈 같은 것이였습니다."라고 루빈은 농담조로 말했다.
타이틀에서 보여지는 대로 드림존은... 음 꿈에 관한 내용이다. 전형적인 형식대로 "한 아이가 이상한 꿈속에 빠지게 되어 그 안에 갇혀버렸다."라는 내용이라고 게빈이 설명했다." 화장실을 통해 꿈의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시된 디지털화된 오즈의 마법사 같은 것을 만들고자했습니다. 꿈의 세계는 흑백으로 현실 세계는 칼라로 묘사했었습니다."
드림존은 Baudville와 JAM모두에게 적당한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게임은 10000장 이상정도 팔렸고 둘은 15000달러 정도의 수익을 그들의 힘들 작업의 대가로 받았다. 17세에게는 꽤나 큰 성공이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좀더 나은 게임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해에 이들은 Baudville과의 거래를 끝내게 되었다.
"Baudvilled는 훌륭한 마켓티어는 아니었습니다. 드림존은 많은 가게의 판매데이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이슨과 저는
'어 너무 작은거 아냐'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17세의 해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7세의 나이로 3개의 게임을 개발했다는 경력을 지니고 EA에 거래를 제안하였다.
놀랍게도 그들이 EA에 전화를 했었을때 바로 회사의 결정권자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요청에 따라 드림존의 카피를 EA에 전달했고
EA는 꽤나 이 게임에 감명을 받았다.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요"라고 EA 대표자가 말했다고 게빈은 회상했다. "계약서를 보내드리겠
습니다."라고 EA측에서 전했다. 계약 내용은 15000달러의 개발비를 받고 판매장수마다 10%의 인센티브를 받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EA가 게임 개발자들은 "일레트로닉 아티스트"로 대우해주면서 게임제작자들을 스타처럼 대우해주었다. 이는 EA의
전설적인 창업자인 Trip Hawkins의 방침이었다.
EA에게는 불행히도 15000달러의 개발비는 루빈과 게빈이 다음 게임을 만드는데 충분치 않았었다. 새로운 RPG게임인 Keef the Thief
를 만드는데에는 최종적으로 48000달러 정도의 개발비가 들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개발비는 아니었고 여전히
이익을 낼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었다. 게빈은 당시의 EA의 상황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때때로 EA는 개발중인 게임을 취소하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엄청나게 많은 장수를 팔아야지만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EA는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EA는 많은 돈을 벌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훨씬 힘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는 5만불 정도의 예산이 들어간 게임을 40달러나 50달러에 판매했습니다. 때로 20불 정도로
인하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손익분기점까지 몇천장 정도만 팔면되었었고 그 이상이 되면 수익을 냈습니다."
킵 더 시프는 1989년에 애플2, 아미가, MS DOS 버전으로 발매했었다. 이 게임이 최초로 너티독이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된
게임이었고 5만장 정도를 판매해서 게빈과 루빈에게 꽤 많은 양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최초로 게임을 만들때
퍼블리셔의 압박을 받는 경험을 하게되어 이는 후에 이들이 게임을 개발할때의 비젼을 결정하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
"게임은 Groo the Wanderer같은 종류였습니다."라고 게빈은 결론지었다. 사실 심각한 내용의 RPG로 만들려고 했으나
EA에서 원한것은 좀더 익살스러운 것이었고 둘에게 코미디 작가를 붙여주기도 했다. 코믹적인 내용의 강조를 위해 박스에는
만화같은 그림이 들어갔는데 게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의 시장은 코미디 RPG를 수용하기에는
아직 이른 편이었다는 겁니다. 재미는 있었어요. 하지만 이상한 느낌의 재미였지요. 너무 이른 시절에 비디오 게임 라이터가
코미디를 쓴다는 자체가 코메디였지요."라고 루빈은 말했다.
"킵 더 시프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하지만 일정량 정도밖에 팔릴 수 없는 종류의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EA가 나중에 저희에게 코미디 게임으로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한것을 기억합니다. 그건 저에게 있어 좋지않은
기분을 들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게임을 만드는데에 저희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계약에 서명을 했고 EA는 저희에게 원하는 것을 지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만과
창조성에 대한 제약을 두고서도 루빈과 게빈은 EA와 계약을 유지하면서 더 야망을 가지고 더 큰 예산을 지닌 RPG 게임을
개발하고자 했다. 코드네임은 Buccaneer였고 EA에 개발비로 9만 달러를 요청했다. 거기에 EA는 동의했지만 결과적으로
게임이 발매될때 개발비는 15만 불까지 늘어났다.
Buccaneer는 결국 Rins of Power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개발은 킵더 시프가 개발완료된 1989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게임의
개발은 의외의 곳에서 난항에 부딪혔다. 루빈과 게빈은 이때 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서로 다른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둘은 전자통신장비를 이용해 작업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아마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통신장비를 통해 게임 개발 작업을 한 사람들일 겁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우린 처음에는 300, 다음에는 1200, 다음에는 2400 baud 모뎀을 이용해서 통신을 했습니다." 루빈은 미시건 대학에 재학중이었고 게빈은 펜실베니아 대학에 재학중이어서 지금에 비하면 끔찍할
정도로 느린 (당시로 보면 꽤나 진보한 기술이었지만) 모뎀을 통해서 정보와 데이터를 주고받으면서 개발을 했다.
상황은 학기가 끝나면서 변했다. 방학동안 그들은 버지니아에서 다시 뭉쳐 게빈의 부모님의 집 지하실에서 작업을 여름 내내 했다. 결국 게임 제작기간은 2년을 상정했었지만 3년이 걸렸다.
개발과정을 복잡하게 했던 또다른 점은 링스 오브 파워는 처음에 PC용으로 개발되었지만 나중에는 세가사의 실패한 콘솔인 마스터 시스템으로도
포팅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네시스라고 불렸었다.
EA를 방문하는 동안 둘은 제네시스 개발킷에 주목했다. "EA 회사안에 리본 케이블이 붙어있는 제네시스 개발킷이 잇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니터와 연결된 제네시스를 가지고 분주히 일하는 것을 보고 '흠, 저건 분명히 제네시스 개발 유닛 같은데'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EA는 제네시스의 기술을 해석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해 개발된 게임으로 세가와 대우가 좋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계약으로 인해 EA는 제네시스용의 초반 게임을 제작하게 되어 이는 너티독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동안 우리는 이 해킹한 기계를 여기저기 늘어놓고 개발을 했었는데 이 기계는 심한 전자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이 소음이 심한 제네시스용 개발킷은 짜증나는 점도 있었지만 결국 유용한 개발머신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기계를 켜면 같은 전자 기판을 사용한 모든 텔레비젼들이 소음을 내기 시작했었습니다.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저희에게 불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제네시스 개발킷으로 인해 주위의 집들의 텔레비젼들이 소음을 내게 된것은 확실했습니다. 재미있는건 게임을 개발하면서 패턴이 바뀌면 소음도 패턴이 변화했는데 이점을 이용해 유용한 디버깅을 할수 있었습니다."라고 게빈을 웃으며 말했다.
링스오브 파워는 제네시스로 1991년 발매되어 3개월 만에 10만장을 판매했다. 하지만 EA로 부터 걸려온 전화는 퍼블리셔와 함께 일할때 일어나는 힘든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퍼블리셔는 언제나 쉽게 성공할수 있는 장르와 저렴한 비용만을 찾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말하기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게임이 매진되었다는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하지만 저흰 게임을 추가 생산하지 않을 것일는 겁니다."
"EA는 다른 게임들이 더 잘팔릴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발한 게임은 높은 카트리지 메모리 용량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산하는데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세이브를 위한 EEPROM이 들어가니 배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게임은
더 큰 생산비용이 들어가니 EA는 다른 게임을 파는 것이 더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 게임이 매든이었습니다."
"이때가 EA가 '머, 우리가 좀더 잘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텐데요'라고 말한 두번째 였습니다."라고 루빈은 계속했다.
"존 매든이 포스터에서 다른 선수들과 얼싸안는 포스터하나만으로 쉬운 마켓팅이 가능합니다. EA가 직접 고용한 사람들은 모두 스포츠가이였죠."라고 게빈은 말했다. " 빌딩의 프로그래밍을 하는 부서의 모든이들은 범생이 같아 보였습니다. 조롱하자는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친구들이니깐요. 하지만 같은 빌딩 안의 마켓팅 부서의 모든 사람들은 더 덩치가 크고 옷도 잘 빼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포츠바에 가곤 했죠. 그 사람들은 스타워즈를 인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용과 마법반지가 나오는 우리들의
괴상한 게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 스포츠 게임은 세가제네시스와 매우 잘어울렸다. 결국 너티독은 스포츠게임의 성공에 둘러싸여 갈곳을 잃고 말았다. 더 싸게 개발하고 더 싸게 팔수 있는 게임들에 의해 말이다. 게빈에 의하면 EA의 세일즈 맨들은 스포츠 스타들을 마켓팅에 이용하기 위해 불러오는것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결국 너티독의 게임 스타일은 단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사업의 우선도에서 뒤로 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이후가 너티독이 설립후 유이하게 휴식을 가진 기간이 되었습니다."
EA와 함께 개발한 두 게임의 성공과 동시에 EA의 마켓팅에 휘둘리는 두가지 경험을 한 후 게빈과 루빈은 한동안 게임산업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기전(이 게임들은 모두 재학중에 개발했다) 루빈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서핑을 배웠고
게빈은 MIT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했다. 물론 둘다 계획한대로 하지는 못했다.
"사실 전 서핑보드를 가지고 파도치는 해변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저는 서핑을 하러 간다고 말했지만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특수효과를 만드는 회사를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3D 그래픽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D는 사실 그때에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다. 당시 3D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75000달러 상당의
컴퓨터가 필요했다.
비싼 가격과 업계에 있어 새로운 기술이라는 점이 루빈이 계약을 맺는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콜롬비아 픽쳐의 잭 니콜슨 주연 울프라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계약을 루빈은 성사했다. "저는 주인공이 늑대로 변화하는 장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수효과를 맡는건 딱 한번 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1993년 3DO 불렸던 콘솔 게임 개발을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DO는 EA의 창업자인 트립 호킨스의 구상으로 부터 출발한 사업이었다. 그는 CD를 기반으로한 고가의 콘솔을 1994년에 발매하고자 목표했다. 호킨스는 너티독의 창업자들에게 연락해 게임산업으로 돌아올것을 제의했다. "호킨스가 전화해서 말하기를, '자네들 우리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다고!'라고 말했습니다."라고 게빈은 회상했다. "개발머신을 원하나? 첵킷아웃!"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게빈은 그때 당시의 문제점에 대해 덧붙였다. "게임들이 이렇게 용량이 거대해지기전인 그 시절엔 카트리지 생산때문에 많은 점들이 엉망진창었습니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가격도 너무 비쌌습니다. 재고가 남게되면 벌어들인 모든돈을 잃게되기도
했습니다. " 루빈도 뒤이어 말하기를 "우리는 정말로 카트리지를 싫어했습니다. 세이브가 가능한 거대한 게임을 만들고 싶었지만 카트리지는 벽이 되었습니다. 카트리지 때문에 우리는 매든만 찍기로 했습니다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CD로의 매체 변화는 정말로 큰 사건이었습니다. 원하는대로 빠르게 찍어넣을수 있고 재고가 생기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CD1장을 생산하는데에는 1달러 밖에 들지 않았으니깐요. 경제 체제가 변했갔습니다."
실제로, 너티독은 카트리지에 대항해 CD를 지지하는 쪽의 최전방에 있었다. CD는 로딩이 오래걸리고 쉽게 파손된다라는 단점에 대한 공격에도 그들은 이 주장에 대해 맞서이겨나갔고 결국 너티독은 역사에서 올바른 결정을 한쪽에 남게되었다. 너티독은 호킨스의 개발킷을 받고 3DO용의 좋은 게임을 만들기로 동의했다. 너티독은 링스 오브 파워를 통해 번 금액을 이용해 개발을 시작했고 퍼블리셔와 계약하지는 않았다. 이때 벌어두었던 80000달러의 마지막 1센트까지 모두 쓰였다고 한다.
앤디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제작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종료의 게임이 대박을 터트릴수 있을까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은 당시 유행하던 게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게임들은 사실 앤디와 제가 하고 싶었던 게임들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이 이에 덧붙였다.
그들은 대전격투게임이 적당하다고 느꼈다. "이전 게임을 개발하는데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루빈은 말했다. "RPG
게임은 좀더 크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반면 대전게임은 매우 직관적이다. 캐릭터를 고르면 바로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일단 게임이 실행되면 밸런스 조정을 잘해낸다면 위대한 대전격투 게임을 만들수 있게 느꼈기 때문이다. 1993년 너티독의 웨이 오브더 워리어가 개발을 시작할 당시에 대전격투게임이 최고로 잘 나가던 시기였다. 스트리트파이터2, 모탈컴뱃, 사무라이 쇼다운 등이 아케이드와 거실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는 3DO의 대전격투 게임으로 발매되어 미드웨이, 캡콤, SNK등과 겨룰 예정이었다.
"모든 개발 자원들은 화면안의 두 캐릭터에 집중되었습니다. 캐릭터는 매우 컸습니다. 캐릭터들은 엄청나게 많은수의 애니메이션과 동작들을 가지고 있어 당시 성공하고 있던 대전격투게임과는 다른 형태의 밸런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그래서 우린 그때 "이거 큰돈이 될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배경하나를 만들고, 캐릭터 하나를 만들고, 혼자서 대전을 하면서 플레이가 가능해진 버전이 나오면 그때부터 밸런스 조정및 버그 조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루빈과 게빈은 모탈컴뱃과 같은 실사를 디지털화한 방식으로 게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면에선 모탈컴뱃보다 좀더 코믹한 느낌을 주는 게임이었습니다. " 그들은 모탈컴뱃과 홍콩 액션 영화로 부터 영감을 얻어서 게임을 제작했다.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둘은 같은 지역에 살아야 된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루빈은 게빈이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로 이사하도록 설득했지만 게빈은 MIT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에 루빈이 보스턴으로 오도록 설득했다. 게빈은 그들이 함께 살면서 작업을 할 아파트를 구했고 3DO게임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게임에 필요한 사진을 얻기위해 그들은 문을 열고서 복도를 촬영해야만 했고 이같은 작업은 그들의 이웃학생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그러면서 게빈은 밤중 내내 오디오 작업을 해야만 했다. 두명이서 쿵푸의 기합인 "하이야!" "허이챠"같은 소리를 한밤중에 내면서 잠을 자려 하던 이웃들을 깜짝 놀라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특수촬용용의 전통적인 블루스크린을 조달할수가 없어 황갈색의 스크린을 이용했는데 그나마 설치할 자리가 없어 아파트의 유일한 창문이 위치한 곳에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 촬영장소가 고정되는 바람에 촬영을 하는데에 계속해서 애를 먹을수 밖에 없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쉽게 개발 가능한 컨셉으로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프로젝트는 결국 두명이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들은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었다. 이 게임이 게빈과 루빈 단 둘이서 작업한 마지막 게임이 되었다.
"처음으로 두명만으로 게임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블루 스크린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때문에 픽셀별로 그래픽 수정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들의 결과물을 사랑했고 이를 신시티 스타일이라고 명했지만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밖으로 나갔습니다."루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블루테인 보드를 사서 자르고 가공한후 칠해줄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주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다. 한사람은 법대생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보스턴 토박이였는데 그 사람은 이 경험으로 인해 게임 산업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리드 테스터는 1994년 하버드 졸업 대표를 맡은 데이비드 리우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자면 "사실 게임안에 등장하는 플레이 가능한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밝혔다.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임내에 등장하는 캐릭터중 한명은 게빈의 MIT 교수인
Dr. Rodney Brooks이다. 게빈이 말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로봇공학 과학자입니다."라 하고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은 Vijay라는 인물인데 MIT에서 분자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너티독이 배우를 고용할만한 여유만 없던것이 아니라 코스튬을 제작할 비용조차 없었다. Vijay는 베게 커버로 만든 속옷을 입고 침대시트로 터번을 만들어서 촬영에 임했다. 터번의 전면에 있던 보석은 작은 여자 아이들을 위한 자스민 드레스 킷트를 사용했다. 여기서 자스민은 알라딘 만화영화에 등장했던 캐릭터였다.
제작중에 둘은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루빈은 은행계좌에 6.37달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전 그때 앤디와 함께 라면으로 연명했습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게빈은 그나마 나았는데 해당 14000달러씩 MIT로 부터 연구지원비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남아있던 스텔오 같은 가재도구등을 팔아서 게임을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앤디의 화장실이 얼어서 막혀버렸었지요. 진짜 끔찍했었습니다. 동의 하지요? 우리는 이때 모든것을 게임 제작에 투자했었습니다. 게임쇼에서 부스를 빌릴 비용인 10000만 남겨놓고 그야말로 모든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마지막 자금으로 CES에서 3DO부스를 차렸었습니다. 크기는 3X3 피트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는 제이슨의 개인 모르건과 함께 살았었는데 우리는 1년간 환기를 한번도 할 수가 없어 거실 카펫에는 모르건의 털로 가득했습니다. 이웃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때 우리 아파트를 보고 하는 첫마디는 항상 "으웩 이게 대체 뭔 난장판이야"였습니다.
퍼블리셔 없이 1994 CES에 게임을 출품하여 관심을 끄는 것이 그때 너티독의 기본 전략이었다. 그들의 작고 아담한 부스는 거대한 멀티미디어 게임 부스들에 둘러싸여있었데 그 거대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회사들은 3DO와 유니버셜 스튜디오, 크리스털 다이나믹스 였다. "우리는 그때 크리스털 다이나믹스와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털 다이나믹스의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반정도는 우리 게임의 발매에 관심을 보였었고 나머지 반은 우리 게임의 엔진을 이용하여 사무라이 쇼다운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호킨스씨는 3DO사에 권리를 주자면서 그의 카리스마를 이용해서 설득을 했다고 하한다.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의 마법에 걸려들면 안된다고 되뇌일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저는 그때 연필을 다리사이에서 굴리면서 저 남자의 주문에 걸려들면 안돼라고 되뇌이고 있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로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우리에게 와서 많은 추가적인 게임의 개발의 권리와 개발의 자유를 준다고 제의했고 그 제안이 가장 멋지게 여겨졌습니다. 거기에 전 LA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나은 계약 조건이었죠. 우리에게 이 결정은 가장 큰 분기점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3DO와 독점 계약을 맺었었다면 그것이 너티독의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유니버셜이 너티독에 창작의 자유를 주고 개발 지원을 약속해 개발된 시리즈가 크래쉬 밴디쿳으로 알려진 게임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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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EA의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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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이 greatness인데 great은 그냥 좋다고 표현하긴 힘들죠. Good이란 단어도 있고 great은 못 해도 굉장하다란 의미 정도는 전달 되야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회사가 유명한 것은 언챠2 때문이 아니라 저 글을 쓴 동네인 미국에선 크래쉬 때부터 유명했으니까 못 해도 20년은 그냥 단순히 좋은 회사 이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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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게에서만? 장난하시나 ㅋㅋㅋㅋ 해외에서 너티독 나올때 댓글이나 반응을좀 보세요 ㅡㅡ 루리웹은 아무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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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번역물에는 미리 추천! 앞으로도 잘부탁드립니다~ 게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만한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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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개구리 말고 무슨 표현을 써야 하나...루리웹 밖 세상을 못보는건지 안보는건지 여기서만 과찬양한다는 생각이나 현재의 잠깐의 영광?!이란 생각이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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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게에서만? 장난하시나 ㅋㅋㅋㅋ 해외에서 너티독 나올때 댓글이나 반응을좀 보세요 ㅡㅡ 루리웹은 아무것도 아닌데 | 15.03.05 17:5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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