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와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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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홈.
공식 단편 소설 - 시 속의 한 순간.
공홈에 새로운 공식 스토리인 시 속의 한 순간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로르테마르와 탈리스라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작가는 메들린 루(Madeleine Roux)입니다. 소설은 격전의 아제로스 후 로르테마르가 수라마르를 방문하고 생긴 일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는 둘의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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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원래 오고 가는 거예요. 하지만 전 오랜 세월을 살며 흥망성쇠를 거친 우리 동족이 다시 부흥하는 광경을 지켜봤어요. 저 자신이 새로이 만개하기 전의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메말랐던 때도 있었죠.
시 속의 한 순간.
물결은 살을 에는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수면은 그야말로 유리처럼 말끔했으며, 나룻배의 가장자리를 따라서만 파문이 일었다. 이렇게 해로를 따르게 된 건 옛 방식을 원한 로르테마르 테론의 고집이 원인이었다. 그는 하나도 남김없이 체감하고 싶었다. 순간이동을 통해 곧바로 수라마르 성 관문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윽고 잔잔한 푸른 호수 위로 일렁이는 돔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높은 수정 탑은 신이 빚은 산맥이라도 되는 양 우뚝 서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신이라. 그는 섬세한 감각과 단아한 감수성을 곁들여 단어를 되뇌었다. 일만 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킨 수라마르 성은 가벼운 미진에도 바스라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룻배는 위압적인 아스트라바르 항구를 지나 달빛 부두로 흘러갔다. 무성한 보랏빛 양치식물이 흡사 환영 깃발처럼 펼쳐져 있는 한편, 서로 얽히고설켜 꽃이 만발한 사파이어색 나뭇가지 지붕 밑으로 연자줏빛 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우뚝 드리워진 밤의 요새의 그림자를 강물 가르듯 지나 텅 빈 부두를 향해 나아갔다.
로르테마르를 이곳으로 이끈 건 첫 번째 비전술사 탈리스라의 초대 때문이었다. 방문을 보류한 지 너무나 오래되어 차일피일 미룰 핑계마저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올 마음이 없었느냐 하면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격무가 시간을 갉아먹었을 뿐. 신도레이의 지도자이자 신설된 호드 의회의 구성원을 겸임하게 된 로르테마르로서는 실버문 행정을 살피고 오그리마의 급한 안건을 처리하느라 남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몸이 두 쪽으로 나뉘어 어느 한 쪽도 온전히 그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도락이나 다름없는 오늘 방문은 양쪽과 무관한 용무, 따지고 보면 마음 한 구석에 잊혀 말라 비틀어지고 만 섭정 본인의 관심거리 중 하나였으리라. 이따금 찾아오는 조용한 오후에는 독서를 하곤 했지만, 그런 순간이 소중하디 소중한 휴식 시간이 되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일지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산문이나 소절을 써 내려갈 때가 잦았는데, 똑같은 주제가 되풀이되는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바로 그만의 아름다운 황혼 백합이었다.
로르테마르는 단 한 명의 나이트본 노꾼과 같이 토막만 한 나룻배를 타고 대도시의 발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불현듯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는 안 되었다. 이 시간은 그를 위한 시간이 아닌, 동포와 호드를 위한 시간이었다.
로르테마르는 어깨 너머로 지금까지 온 길을 흘겨보았다. 안개가 그를 사로잡으려는 듯 좁혀들며 이미늦었다. 네가선택한길아니더냐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노꾼이 그에게 미심쩍은 눈총을 쏘아 보냈지만, 로르테마르는 입을 꾹 닫은 채 엘프의 백발 위로 영롱하게 빛나는 예스러운 부두 등불을 응시했다. 출정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의 가슴은 낯익은 긴장감으로 아려왔다. 기대감과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이며, 구분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는 걸 로르테마르는 잘 알았다. 이 까다로운 2인조처럼 그는 단 두 개의 소지품, 왼쪽 허리춤에 도검, 오른손에 낡은 가죽 일지만을 갖고 있었다. 하나로 어우러진 기대감과 공포는 로르테마르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도 남았고, 이로 인해 가죽 겉표지 밑의 책장은 그의 긴장감을 여실히 증명하듯 축축하게 젖어버리고 말았다.
몸이 떨리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황금빛 태양이 수놓아진 두꺼운 진홍색 망토를 어깨춤으로 끌어당기곤, 피어오르는 입김 사이로 점점 가까워지는 정박지를 주시했다. 속도를 줄인 나룻배는 깃털 하나 부스럭대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우아한 학의 무리를 지나쳤다. 추위가 어떻든, 누가 오든 그저 무관심한 눈치였다.
“꽉 잡으시길.” 노꾼의 경고에 뒤이어 나룻배가 소음을 내며 부두에 접했다. 나이트본은 가까운 기둥을 붙잡은 채 로르테마르가 내릴 때까지 배를 고정하였다.
“안전한 항행에 감사를 표하오.” 로르테마르의 한마디에 노꾼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미소를 머금고 백합이 수놓아진 고요한 물결을 향해 나룻배를 밀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경계의 끈을 놓고 있던 로르테마르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첫 번째 비전술사 탈리스라가 안내인을 보내는 대신 직접 행차한 것이었다. 그녀는 달빛 부두로 통하는 계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바로 서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연자줏빛 자태를 자랑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물결을 가로질러 평안하게 몸을 씻는 학 무리를 등지고 선 로르테마르에게 전해졌다.
로르테마르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부두 끝자락에서 시작해 호화로운 시장으로 이어지는 드높은 계단에 이르는 짧은 거리를 단숨에 돌파했다. 밤이 다가오느라 그런지 왁자지껄한 시장 소리도 잠잠해졌다. 가슴을 옭아매는 통증은 진정되기는커녕 탈리스라에게 다가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섭정이 가까워질수록 탈리스라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그녀의 룬새김 단망토를 비집고 가녀린 보랏빛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비전술사는 전시에 착용하는 로브 대신 찬 공기를 막아줄 호화스럽고 부드러운 촉감의 벨벳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온기 주문이 주입된 것처럼 보이는 건 구태여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은사를 매듭지어 만든 머리띠 위로 단출한 수정 왕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르테마르가 탈리스라의 손을 잡자 시원하면서도 건조한 촉감이 전해졌다. 부드럽게 펄럭이는 망토에서 풍겨 나오는 라일락 향수 냄새가 로르테마르를 괴롭혔다.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네요.” 로르테마르가 부드럽게 밑으로 손을 내려 여인의 팔을 붙잡자 탈리스라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도시 쪽으로 발길을 돌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준비할 시간을 좀 더 줬으면 어디 덧나나요. 답사를 떠났던 시인 여섯 명을 물렸더니 오만상을 다 짓는 거 있죠. 사람을 붙잡고 몇 시간을 얘기하던지. 시로 열변을 토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죠.”
“미안하오.” 로르테마르가 깊고 중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대도 짐작은 가겠지만 실버문 내정을 뒤로 밀어놓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오. 하물며 그 사유가. . . 개인적인 용무라면 말할 것도 없소.”
탈리스라가 손을 휘휘 내젓자 또 저주받을 라일락 내음이 풍겨왔다. 로르테마르는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굳이 사과할 필요 없어요. 미진한 내홍은 오히려 그들에게 좋답니다. 시를 쓸 소재는 있어야 할 거 아녜요. 그건 그렇고, 쿠엘탈라스는 좀 어떻죠? 전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하게 보여요. 붉은색과 황금색 나무가 어우러져 굽이진 오솔길에, 나무 향이 진하게 밴 바람을 타고 소용돌이치며 발을 간지럽히던 잎사귀에. . .”
“벌써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내다니, 내 준비가 부족하게만 느껴지는구려.” 로르테마르가 킬킬댔다. 물론 실제로는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그저 실버문과 황금 첨탑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는 고통스러웠다. “내 부재를 느끼고 분개하긴 할 거요. 다만 떠날 때 황급히 진화해야 할 불길 같은 건 없었다오.”
기실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할두런 브라이트윙과 롬매스가 그의 수라마르 방문에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로르테마르가 출발하기도 전에 롬매스의 입에서 “이런 연애 무지렁이를 다 봤나. 멱살 잡히기 싫으면 퍼뜩 출발하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를 터였다.
함께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갈수록 항구의 서늘한 찬 공기는 멀어져만 갔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난간이 도시로 이어지는 길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고, 중무장한 나이트본이 인적이 뜸해지는 시장을 시장을 순찰하고 있었다.
“분개? 말도 안 돼요.” 탈리스라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일지를 쥔 로르테마르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겨우 이틀 묵는 건데!”
“내겐 그것도 사치라오. 오그리마 업무만 해도-”
“로르테마르. . .” 탈리스라가 망토 너머로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르테마르를 옭아맨 긴장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리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고 싶진 않아요.” 나이트본은 그대로 서서 섭정을 바라본 채로 한 발짝 물러났다. 초저녁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어둑한 주변 환경과 맞물려 한층 더 고혹적으로 보였다. 한 소리 듣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해진 로르테마르는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은 탈리스라는 시선을 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단 이틀만이라도 근심을 내려놔 봐요. 그래 봐야 한순간. . . 우리 생애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걸요. 머릿속이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하죠? 옹기종기 모아 물속에 던져버려요. 그런 것들은 돌아갈 때 퍼 올려도 돼요. 이 소중한 며칠 동안만 모래 속에 묻자는 거죠. 알겠어요?”
그는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탈리스라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로르테마르의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거리를 마법처럼 잠시나마 지워버렸다.
로르테마르의 가슴을 옥죄는 저주받을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기 전까지 작렬할 건 자명해 보였다.
“좋소.”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이 또한 우리 생애의 한순간이니 말이오.”
“어디 두고 보죠.” 탈리스라가 고개를 밑으로 갸웃거리며 경고를 남겼다.
“내 약조하리다. 절대로 어기지 않겠소.”
“훌륭해요.” 탈리스라가 다시 로르테마르에게 팔짱을 꼈다. 둘을 시장을 가로질렀다. “경연을 앞둔 이 마당에 정신 상태가 멀쩡해야지 않겠어요? 제 압승이 당연하다고 해도 승부는 정정당당하게 치러야죠.”
로르테마르가 조소했다. “여군주님의 자존심이 높디높으니, 그 무너져 내리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으리.”
“벌써 운율을 맞추는 건가요!” 장난기 어린 비전술사의 목소리가 웃음으로 승화되었다. “참으로 어설프군요. 너무나 쉬운 대결이 되겠어요, 섭정. 먼 길을 왔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생겼으니 가엾네요.”
“그렇다면 여행 중인 시인들을 불러들인 그대의 노력도 허사가 되는 셈이겠구려.” 로르테마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부렸다.
“어머, 허사는 아니죠.” 일렁이며 흔들리는 화로의 보랏빛 불꽃이 지나가는 두 사람을 비췄다. “허사는 아니에요, 로르테마르. 이 순간을 누리게 됐잖아요. 둘이서.”
한밤 궁정은 수수하지만 열정적인 청중으로 북적였다. 탈리스라의 말에 과장은 없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람 예닐곱이 침묵을 지키며 주시하고 있었다. 벌써 입술을 한껏 오므린 것이 당장에라도 심사를 시작할 기세를 풍겼다. 저들이시인이겠군. 로르테마르가 내심 결론을 내렸다. 또한, 사이사이에 친근한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모두 샬도레이였다. 주변을 배회하며 비전주를 마음껏 채워주는 시종 덕분인지 얼굴이 상기된 자도 몇 있었다. 나즈자타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사적인 내기가 어느덧 본격적인 경연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로르테마르는 이를 찬사로 받아들였다. 탈리스라가 자신의 실력에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이리 판을 만든 것일 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대중 앞에서 추태만 보였으리라.
“그럼 시작합시다.” 로르테마르가 중얼거렸다. “참 인정사정없구려.”
“아, 연회는 저녁 유흥이 끝난 다음에 진행될 거예요. 외국 지도자를 접대하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닌지라.” 탈리스라가 로르테마르를 집회 장소로 안내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소 극성을 부려도 양해해 주세요. 이런 행사는 의욕을 고취하는 법이잖아요? 새로이 해방된 도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의의도 있고 말이에요. 전 오늘 밤 축제가 노래와 시로 만들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두고두고 기억되겠죠.”
“그럼 실망 끼치지 않게 노력해야겠군.”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농으로 던진 소리라곤 하나 내심 몸이 떨렸다. 섭정에게 첫 번째 비전술사와의 친선 시 경연은 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말하자면 둘만의 농담이요, 견고해지는 유대감의 상징이랄까. 느닷없이 청중이 끼어드는 건 다분히 예상외였다. 더군다나 웬만큼 안목도 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말이다.
“아뇨,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진중한 자세로 임할 필요는 없어요, 로르테마르.” 탈리스라가 마침 곁을 지나던 시종에게서 비전주 두 잔을 넘겨받으며 당부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섭정에게 두 번째 잔을 권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비전주의 풍미를 음미했다. 비전술사의 반짝이는 눈빛처럼 짜릿한 첫맛이 느껴졌다.
“조금 전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걸로 기억하오만.” 로르테마르가 여인을 환기시켰다. 모인 청중은 좌석에 앉아 두 사람이 앞에 서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설혹,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건 아닌지?”
“설마요.” 첫 번째 비전술사가 가볍게 잔을 맞부딪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품위 있는 패배가 낫죠.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지 빨리 보고 싶군요.”
로르테마르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던지고 싶은 욕구를 술잔을 한 번 더 들이켜는 것으로 자제했다. 그때 한 시종이 궁정의 그림자를 비집고 나와 목재로 된 연단을 옮겨 놓았다. 별관의 짙은 자주색 돔 지붕 밑으로 좌석이 나란히 마련되어 있었다. 청중의 배후에는 드높고도 가녀린 조각상이 보였다. 궁정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수라마르 만의 파도 소리는 이루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탑에서 흘러나오는 하프를 비롯한 가수의 목소리와 화음을 이뤘다. 로르테마르의 눈에 지나온 시장은 물론이요, 지금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돔이 무수히 줄지어 선 풍경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자홍색으로 빛나는 것이 대리석에 흩뿌려진 완벽한 포도주 방울을 보는 것 같았다.
연단 준비가 끝나고 탈리스라도 따라 올라와 청중을 바라보았다. 아니, 심사위원단이라고 해야 알맞을까.
로르테마르는 몸을 틀었다. 그는 자작시를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평가받는 것보단 전투에 앞서 사기를 북돋는 연설이 훨씬 몸에 익은 무골이었다.
“수라마르의 훌륭한 시인, 시민 여러분. 이 좋은 저녁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리스라가 잔을 치켜들며 운을 띄웠다. 사람들도 이에 반응해 잔을 들었다. “오늘 저녁은 귀빈께서도 참석하셨답니다! 순찰자이자 지도자이며, 무한한 용기와 동족을 향한 헌신을 두루 품은 신도레이지요. 하나 이 전사의 가슴 속엔 시인의 심장이 뛰고 있으니, 이역만리 떨어진 쿠엘탈라스의 식견과 열정을 함께 나누고자 와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손님을 상냥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낭송을 경청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귀빈이신 만큼, 먼저 발표할 기회를 양보하죠.”
멀쩡한 눈이 움찔거린 로르테마르였지만, 미소를 띠곤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자리에 모인 샬도레이는 손목을 두드리는 식으로 정중한 갈채를 보냈다. 섭정에게 각별한 관심이 있는지, 자신들의 지도자가 성대한 연회를 열어가면서까지 수라마르로 초대한 신도레이 이방인을 유심히 살폈다.
“고대의 경이와 전통이 조화를 이룬 이곳에서 존귀한 예술가, 철학자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오.” 말하는 와중에도 로르테마르의 시선은 그림자에 녹아드는 탈리스라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둠 속에 서 있음에도 그녀가 뚜렷이 보였다.
“첫 번째 비전술사의 사려 깊은 초대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현실이 애석할 따름이오.” 테론이 연설을 마쳤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망토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작은 일지를 꺼냈다. 나룻배를 타고 오는 동안 낭송할 시를 선별할 시간은 충분했다. 청중을 고려하면 진중하고 정치적인 작품이 알맞아 보였다. 로르테마르가 보기에 수라마르의 나이 든 고명한 시인들이 근래 들어 아름다운 첫 번째 비전술사가 떠오를 때마다 휘갈긴, 사적이고 감성적인 작품에 흥미를 드러낼 것 같진 않았다.
“실버문 전통 시를 한 수 써봤다오.” 로르테마르가 청중의 흥미를 돋웠다. “제목은 ‘살모사’라고 붙였소.”
확실히 볼 수 있도록 일지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펼친 로르테마르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탈리스라에게 눈길을 보냈고, 여인은 살짝 고개를 까딱여 그를 독려했다. 섭정은 망토의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깊은 호흡과 함께 낭송을 시작했다.
“살모사를 보아라. 미약한 독을 지녔나니,
강자에겐 위협조차 되지 않는구나. 그 이빨은 허세에 불과하도다.
저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아라. 그런데도 부족한지,
그림자 속에서 먹잇감을 찾는구나. 그렇게 그 속에 몸을 숨겼도다.
살모사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먹잇감을 노리니,
상처 입은 영혼과 육신이 죽음을 앞뒀구나.
그렇게 발 빠른 비애의 나래에 독이 스며드나니,
순진한 척 숨결을 앗는 살모사가 여기 있구나.
그 희생자는 미약하고 지친 자요, 어리고 낙담한 자여라.
찰나의 나약함이 용자의 종말을 불러오고 말았구나.
예기치 못한 화살이 무정하리만치 빠르게 날아드니,
그 빛은 진홍과 황금이 어우러진 뱀을 닮았구나.
저 조그맣고 초라한 살모사를 경계하라.
그 무엇보다 중요한 때에 깨물려 들지니.”
“감사하오.” 앞에 앉은 시인과 귀족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자 로르테마르가 끝을 맺으며 말했다. 탈리스라 역시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붕 아래서 나와, 팔목을 톡톡 두드려 찬사를 표했다. 다분히 절제된 반응이었다. 그러나 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게 익숙지 않았던 로르테마르는 충격에 휩싸인 경멸 어린 침묵이 아닌 경의가 달가울 따름이었다.
“환상적인 시였어요.” 탈리스라가 곁을 지나치며 말을 건네고는 뒤이어 연단에 섰다. “저는 수천 년에 이르는 한밤 궁정의 유구한 관례를 따라 즉흥으로 낭송해 보려고 합니다. 앞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테죠. 한순간의 흥취에 이끌려 시를 써 내려가는 거예요.”
한순간. 로르테마르는 지척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대곤, 청중의 유쾌한 탄성을 끌어내는 탈리스라를 비추는 보랏빛 화로의 불빛을 감상했다. 한순간. 이 또한 생애의 한순간이리라. 그는 즉흥시라는 탈리스라의 선택이 놀라웠지만, 그녀가 특별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탈리스라가 섬세하고 가냘픈 턱을 치켜들더니 양팔을 넓게 벌렸다. 흡사 점점 깊어지는 밤의 포용과 다가오는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다른 시인과 구경꾼들이 그렇듯, 로르테마르도 홀린 듯이 연단의 여인에게 이끌려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밤하늘이 우리를 지켜보네요.
그 가련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일편단심 바라보는 무수한 별들 아래서,
춤추며 술을 들이켜며,
지상을 훔쳐보는 천상에 전부를 내보여요.
손발이 닳도록,
그렇게 또다시.
내가 여기 있는걸요 - 이 손으로 술잔을 움켜쥔 채,
이 입술로 그대의 첫 숨결을 들이켤 거예요.
이 발걸음으로 굴러떨어지는 법을 배우리니,
마음껏 넘어지세요. 붙잡아줄 테니.
마음껏 웃으세요. 함께 웃어줄 테니.
반짝이는 눈빛이 별빛으로 거듭나면,
같은 우주에서 서로를 마주해요.
한마음으로.”
탈리스라가 낭송을 끝내자 적막이 내리깔렸다. 그 완전무결함을 타고 충격이 전해졌으며, 로르테마르를 비롯한 궁정의 모든 이가 시에 굴종해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같은 폐로 호흡하는 것만 같은 심상이 들었다. 이내 청중은 하나가 되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로르테마르는 일찍이 기립한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섭정의 관심을 끈 건 시의 수준이 아닌, 낭독에 담긴 심오한 감정이었다. 그의 시선에 탈리스라는 고혹적인 연기자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과도 같았다. 악천후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며, 화창한 날씨 아래서는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그런 사람이 바로 첫 번째 비전술사였다. 한데 별빛에 흠뻑 젖어 시에 도취한 여인의 자태는 빛의 여왕을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실로 찬연하군요!” 로르테마르 오른편에 앉은 시인이 탄복을 쏟아내며 그의 머릿속을 감돌던 단어 하나를 낚아챘다. 등까지 타고 내려오는 시인의 은빛 머릿결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했으며, 목에 두른 큼지막한 자수정 목걸이는 눈부시게 빛났다. 로브를 걸친 그는 가볍게 부스럭 소리를 내며 첫 번째 비전술사 탈리스라를 따라 연단에 올라가선 팔을 활짝 벌린 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과찬이십니다.” 첫 번째 비전술사가 오른손 끝마디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제 조수 글란드렌이 한 자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답니다.” 시인이 조수에게 손짓을 보내자 앳된 나이트본 소년이 총총걸음으로 연단에 나왔다. “아! 이 친구가 글란드렌이랍니다. 단 한 소절도 놓치고 싶지 않더군요. 첫 번째 비전술사님의 작품에 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참으로 많습니다. 아니, 청중 중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물론 비전주를 더 곁들여야겠지요. 어찌됐든 함께 담론을. . .”
로르테마르는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꾹 억눌렀다.
“사양할게요.” 탈리스라가 시인의 팔뚝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타일렀다. “레딘, 먼저 가볍게 식사를 드는 건 어떨까요? 귀빈께서도 배가 곯으실 거예요. 속을 채우고 좀 풀어진 다음 섭정께 질문을 마음껏 던져도 괜찮지 않겠어요?”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레딘이 다시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글란드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좌석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비전술사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레딘은 결례를 범한 게 로르테마르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향해 차가운 눈총을 쏘아 보냈다. 첫 번째 비전술사와 단둘이서만 시를 논하는 것이 훨씬 좋은 섭정으로선 굳이 개의치 않았다. 고루한 시인의 의견 따위 무슨 알 바가 있으랴. 반면에 탈리스라의 의견은 더없이 중요했다.
“그럼 결정됐군요. 다시 모이는 시간은, 그래, 두 시간 후로 할까요?” 탈리스라가 청중에 허물없는 어조로 말했다.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울상을 짓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첫 번째 비전술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들의 구겨진 얼굴을 스윽 지나, 로르테마르의 팔을 당기며 자리를 피했다. 오로지 비전주를 접대하는 시종만이 신중하게 거리를 지키며 두 사람을 쫓아갔다.
“독심술도 부릴 줄 아나 보오.” 로르테마르의 키득이는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은 궁정을 벗어났다. 그렇게 원형 탑을 에둘러지나 길을 따르니 좁은 계단이 나왔다. “시의적절한 중재였소.”
“심성은 선한 사람들이에요.” 탈리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으론 시인들의 생각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예술적인 사고방식으론 나이트본 사회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들이니 말이죠. 다만, 레딘은 유난히. . . 말을 길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의 일장 연설을 견디려면 만찬을 든든히 먹어둬야 해요.”
굽이치는 계단의 정상에는 아담한 난간뜰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불어 두 개의 의자가 구비된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욕을 돋울 전채 요리로 데친 밤배와 모래삐삐 알 절임이 차려져 있었다. 시종이 주변을 배회하며 대기하는가 싶더니, 이내 로르테마르가 첫 번째 비전술사의 착석을 도와주자마자 바로 잔을 채워주고는 계단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로르테마르는 하릴없이 있다 다시 연주를 시작한 하프 연주자의 곡을 들으며, 잠시 항구의 전경을 안주 삼아 조용히 잔을 들이켜는 순간을 만끽했다. 눈을 감으니 온기와 평온이 그를 휘감았고, 이러한 감각이 충격으로 와닿은 까닭인지, 다시금 눈이 뜨였다. 자신을 늘 뻣뻣하게 만드는 불안한 긴장감을 놓아주기 직전까지 간 로르테마르였지만, 이 친근하면서 불손한 오랜 친우는 기어코 자리를 지켜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로르테마르?” 탈리스라가 섭정을 응시하며 물었다. 잔의 가장자리 위로 여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냥 그대 첫 번째 비전술사의 명령을 되새기고 있었다오.”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현실감이란 녀석이 잠깐 난입해서 말이오. 내 금방 내쫓으리다.”
탈리스라가 아름다운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하세요. 이왕 하는 김에 불필요한 허례허식도 같이 내쫓아 주면 좋겠군요, 로르테마르. 탈리스라라고 불러요. 자, 시인들이 당신에게 이것저것 즐겁게 캐묻기 전에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마음대로 해도 좋소.”
로르테마르의 대답에 탈리스라의 눈이 번득였다. “오늘 그 시는. . . 캘타스 선스트라이더의 실패를 주제로 담아낸 거죠?”
“정확하오.” 로르테마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비전주로 데쳐 부드러워진 배를 살짝 베어 물었다. 그는 앉은 채 자세를 바꾸었다. 오늘 밤은 즐거움을 위한 밤이 아니었던가? 섭정의 기분이 음울함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과거가 떠오르는 모양이군요. . .”
“요즘 들어 그가 자주 생각난다오.” 로르테마르가 시인했다. “우리 동족이 전례 없이 약해졌을 때 당한 배신도 함께 말이오. 비단 우리 동족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적인 배신감까지. . . 난 그를 믿었소. 젠장, 그를 따른 것도 모자라 신뢰해 버렸고, 하마터면 동족이 지옥 마력으로 더럽혀지게 방조할 뻔했소. 그게 그의 명령이었으니까.”
탈리스라가 부드럽게 공감을 내비쳤다. “그런 상처는 느리게 아물기 마련이죠.”
“독이 스며든 상처는 훨씬 오래 걸린다오.” 로르테마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심지어 예상치도 못한 순간 다시 덧나기도 하오. 그 기억이 어찌 안 떠오르겠소? 공통점이 눈에 선한 것을. 호드의 군대는 쇠진할 대로 쇠진했고, 국고는 바닥을 보이는 데다, 자원은 빠듯하기 이를 데 없는 형편이오. 이런 시점에 타격을 입었다간. . . 뭐, 결과는 충분히 연상될 거요.” 섭정이 콧잔등을 쥐어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또 우울한 현실 타령이나 늘어놓고 말았구려.”
탈리스라의 미소는 옅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녀는 비단 소매를 걷어내곤 탁자 반대편으로 팔을 뻗어 로르테마르의 손을 잡았다. 섭정은 잠시 그 가녀린 손을 바라보다 이내 손바닥을 맞잡았고, 순간 탈리스라의 손결이 그림자를 내쫓는 등불이라도 된 듯 어두운 생각이 흩어져 사라졌다. “제 시가 당신 내면의 무언가를 끌어내길 소망했는데, 아무래도 그 의미를 완전히 놓치신 것 같군요. 애통하지만 레딘에겐 사본을 모조리 소각하라고 일러야겠어요.”
“무슨 소리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내 실책 때문에-”
“실책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탈리스라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며 빠르게 답했다. “의기소침해할 거 없어요.”
로르테마르가 곤혹감을 드러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 물론이오. 난 괜찮소. 살짝 당황스럽기야 해도, 괜찮다오.”
“괜찮다, 라.” 탈리스라가 단어를 읊조리더니 몸서리를 쳐댔다. 이윽고 탈리스라의 손이 뒤로 빠지기 무섭게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그리워진 로르테마르였다. 탈리스라는 의자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혀 미려한 쇄골을 드러내 보였다. 그녀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새하얀 문신이 밝게 빛났다. “로르테마르, 당신의 실책 같은 건 없어요. 전 오늘 밤 당신 앞에서 가슴에 담아뒀던 모든 걸 털어놨어요. 흘러가겠지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즐거움을 우리도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요량이었죠. 전쟁이란 원래 오고 가는 거예요. 맞아요,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는 시대는 분명 있어요. 하지만 전 오랜 세월을 살며 흥망성쇠를 거친 우리 동족이 다시 부흥하는 광경을 지켜봤어요. 저 자신이 새로이 만개하기 전의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메말랐던 때도 있었죠. 그 오랜 시간과 혼돈 속에서 비탄과 환희를 두루 겪었지만, 괜찮았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네요. 고통과 즐거움에 완전히 잠겨 들었을 뿐.”
섭정이 술잔을 홀짝였다. 하나 바람과 달리 그를 무디게 만들어 주진 않았다. 되려 탈리스라의 소망대로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참 비루한 표현 같긴 하오. 괜찮다는 말은. 시 구절에 넣거나-”
“인생에서 쓰기엔 적절치 않죠.” 여인이 대신 말을 맺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다시 한번 섭정 쪽으로 몸을 기울여 끄덕였다. “로르테마르, 전 당신이 동족을 위해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곤 땅이 꺼지도록 가라앉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어요. 왕자의 실책은 당신의 실책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 될 일이죠.”
로르테마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벌거벗겨지기라도 한 듯 오한이 몰려왔다. 실버문의 장벽 뒤에 머물 때면 안락함과 안전을 느끼는 그였다. 어디 그뿐인가? 도시에 삼켜져 꿈에서나 대낮에서나 그를 괴롭히는 망령으로부터 몸을 숨긴 것만 같았다. 하나 수라마르에는 그를 지켜주고 숨겨줄 장벽 같은 건 없었다.
“우리 동족과 내가 겪은 배신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소.” 내가겪은배신.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오. 아주 오랜 시간이.”
탈리스라가 천천히 눈썹을 추켜세웠다. “얼마나 오래요?”
“회복이든 용서든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오.”
섭정은 또다시 뻗어오는 탈리스라의 손을 잡지 않을 뻔했다. 하지만 옹졸한 짓인 데다, 안 그래도 그녀의 손길이 그리운 참이었다. 두 손가락이 얽히는 사이 로르테마르는 눈을 감았다. “상처 얘기를 좀 더 해보죠. 아물고는 있나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친숙한 내것이라는 핑계로 하루가 멀다시피 독이 스며든 상처를 다시 열어젖히고 있나요?”
로르테마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손등을 몇 번이고 간드러지게 어루만지는 탈리스라의 엄지손가락이 꼭 소원을 이뤄주는 돌에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 섭정은 왕자가 배신을 저지르던 순간을 돌아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동족을 짓밟고 행진하는 언데드 군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고, 처음부터 캘타스를 의심하며 로르테마르의 충성심을 조롱하던 이들의 서슬 퍼런 험담이 귓가에 울렸다. 알레리아 윈드러너의 방문을 허락했던 일 이후로는 매일 밤 태양샘이 공허에 오염되는 끔찍한 환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섭정은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이 여인도 그에 못지않게, 혹은 더 많이 감내했음에도 스스럼없이 미소짓는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본디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무언가로 자신을 이끌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상처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오. 엄연히 내 것이기도 하고.” 로르테마르가 시인했다. “이젠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소. 상처마저 없애면 빈손이 될 테지.”
“빈손은 아니죠, 로르테마르.” 탈리스라가 중얼거렸다. “눈을 뜨세요. 뭐가 보이는지 말해봐요.”
로르테마르의 눈은 이미 뜨여 있었으나, 탈리스라의 의중은 사뭇 달랐으리라. 끝내 그는 하해와 같은 인내심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을 굳세게 바라보았다. 과연 괜찮아지는날이 다시 오긴 할는지 섭정은 의문이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빙빙 둘러 말하기만 한 것 같구려.” 로르테마르가 무미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몰랐소. . .”
“맞아요, 몰랐죠. 새까맣게 몰랐죠.”
느닷없이 닥쳐온 쑥스러움 때문일까, 로르테마르는 탈리스라의 눈을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여인은 당찬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고, 섭정도 못내 시선을 맞췄다.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났다.
로르테마르는 탈리스라의 손을 계속 맞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로소 그 또한 근심, 슬픔, 기억 그 이상의 것을 취할 준비,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넘어 즐거움에 잠겨 들 준비가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령이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잰걸음으로 쏜살같이 계단을 타고 올라온 그는 로르테마르에게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가까스로 멈췄다. 앳된 얼굴과 수라마르의 예복 차림을 한 샬도레이 청년이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난간뜰로 구르듯 튀어나오는 광경이 펼쳐졌다. 전령에 뒤이어 시종 역시 불과 몇 걸음 차이로 돌아와,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연신 사죄를 해댔다.
“서, 섭정님께 전언이 왔습니다. 송구하지만 급한 용건이라 합니다. 즉시 오그리마로 출두해 주셔야-” 마침내 전령이 기류를 읽었는지, 그의 창백한 시선이 로르테마르와 탈리스라 사이를 재빠르게 오갔다. 곧이어 맞닿은 두 사람의 손을 보곤 침을 간신히 넘기는 소리를 내었다.
“이만. . .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리하도록.” 로르테마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속히 복귀하마.” 섭정이 멈춰 섰다. 그는 첫 번째 비전술사를 힐끔 바라보곤 말을 정정했다. “여력이 생기는 대로 돌아가겠다.”
“물론입니다, 섭정님. 방해를 용서하시길. 제 불찰입니다, 섭정님-”
“태양샘의이름으로어서물러가거라.”
로르테마르의 역정에 탈리스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종이 황급히 소년을 떠밀어 내보낼 동안 그녀는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몇 방울의 땀을 제외하면 전령의 자취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 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로르테마르가 탈리스라를 따라 헛웃음을 내었다. “무슨 얘기를 하다 말았는지 아시오?”
“잠깐이면 충분해요.” 탈리스라가 섭정의 온기 어린 왼쪽 옆구리에 팔짱을 꼈다. 여인이 다른 한 손을 섭정의 가슴팍에 얹자 로르테마르는 심장이 터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시인들을 따돌리고 전령이 나타나도록 꾸민 게 혹시 당신의 영리한 계획은 아닌지 궁금한걸요. . .”
“그럼 그대 곁을 괜스레 일찍 떠나는 형국밖에 안 되잖소.” 섭정이 고개를 내렸다. “가정 자체가 상처를 주는구려, 첫 번째 비전술사. 여하간 상처 얘기는 그만하기로 했으니.”
“우리 화제가 뭐였죠?” 탈리스라가 채근했다.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따뜻한 숨결이 그의 턱을 매만질 정도였다.
로르테마르가 심호흡을 들이마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깨닫는 것.”
“정답이에요.” 탈리스라가 속삭였다. 그녀의 비단결처럼 하얀 속눈썹이 밑으로 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시선을 치켜들자 로르테마르와 눈길이 마주쳤다. 섭정은 자신이 마다해온 이 기회가 얼마나 오랜 시간 끝에 찾아온 건지 호기심이 들었다.
탈리스라는 처음으로 할 말이 없는 듯해 보였다. 애태우거나 자극하는 것도, 재촉하는 것도 일순간 사라졌다. 로르테마르는 침묵을 한껏 만끽했다. 그는 탈리스라의 시를 떠올렸다. 그녀는 시가 한순간의 여운만을 남기길 바랐지만, 로르테마르의 머릿속에선 떠나갈 줄을 몰랐다.
내가여기있는걸요- 이손으로술잔을움켜쥔채,
이입술로그대의첫숨결을들이켤거예요.
이입술로. 로르테마르는 시의 내용이 오롯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 부름에 기꺼이 응하리라. 입술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갈망에 사무쳐 숨이 가빠졌다. 순간 수많은 의구심이 그를 괴롭혔지만 로르테마르는 이내 훌훌 털어내 버렸다. 고통이, 반발이,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 하나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두 사람의 순간 속에서 여인은 그를 원했고, 로르테마르를 이끌기엔 그걸로 충분했다.
로르테마르는 탈리스라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에 저항하지 않았다.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든 저항하지 않았다. 여인의 숨결에서 묻어나오는 미묘한 기대감도, 누가 어떤 방향으로 머리를 숙일 것인지 같은 사소한 문제도 그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전주와 시가 머무르던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로르테마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꼈다. 탈리스라의 손가락이 그의 턱을 어루만졌고, 이내 온 수라마르가 두 사람의 한순간을 위해 고요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로르테마르는 이 순간을 놓지 않았다. 입맞춤을 나눌 동안 세상이 기다려야 하리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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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리아 격아에서 이미 충분히 존재감을 어필하긴 했었음 볼진이나 겔리윅스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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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테마르 탈리스라한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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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게임에서야 다수지만 실제로는 거의 호드 쩌리 취급받고 있으니 거기서 자기 자리 지키는것만 해도 대단한 정치력을 지닌 수장임 이제 좀 행복해지겠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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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스라 연배 생각하면 티란데급이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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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할두런 브라이트윙과 롬매스가 그의 수라마르 방문에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로르테마르가 출발하기도 전에 롬매스의 입에서 “이런 연애 무지렁이를 다 봤나. 멱살 잡히기 싫으면 퍼뜩 출발하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를 터였다. 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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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갈진돗개
판다리아 격아에서 이미 충분히 존재감을 어필하긴 했었음 볼진이나 겔리윅스에 비하면.. | 20.05.30 07:5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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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리아도 그렇고 격아도 그렇고 존재감좀 드러내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다시 들어가던데 | 20.05.30 08: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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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팩마다 주연으로 활약하는 캐릭터는 한정적으로 정해져있으니 매번 비중을 몰아줄 순 없을듯 드군때는 전부 나가리 군단때는 벨렌 그나마 격아와서는 수장들 존재감 많이 올라오긴했지만 어둠땅되면 다시 줄어들듯 | 20.05.30 08:2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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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확팩 때 캐릭터를 온전히 밀어주는게 아니라 확팩 내 이벤트에서 힘줘서 밀어줬는데 다음 이벤트에서는 코빼기도 안보인다는게 문제에요. 로르테마르도 천상의 종 이벤트때 힘줘서 등장했다가 그 이후로 다시 공기비중 됐던걸로 기억하는데.. | 20.05.30 08:4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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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천둥의섬부터 들불까지 그때부턴 볼진이랑 바인이 바톤터치 받아서 쿠데타 이야기로 진행되죠 | 20.05.30 08:4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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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언스는 맥카토크 빼면 스토리 비중이 적절하게 분배되어있는데 호드는 소수 캐릭터가 비중 다 잡아먹고 다른 캐릭터는 공기 비중으로 남기거나 소모시키는게 불만임 | 20.05.30 08:5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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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란데도 군단 초반이랑 격아와서 그나마 존재감 생긴거고 마그니 같은 경우는 탈 얼라 하고나서야 겨우 존재감 생겼음 딱히 얼라 수장만 챙겨주는것도 아님 | 20.05.30 08:5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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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수장들 비중이 대격변 이전까지 진짜 ㅈ도 없었다는게 문제 불성때는 벨렌이 엔딩 마무리한거빼면 수장들 등장 전혀 없었고 리분때는 가로쉬 바리안 찔끔 대격변때는 스랄 몰빵 | 20.05.30 09: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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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렌은 불성, 군단 때 스토리 비중 거의 다 먹고 들어갔고, 가로쉬는 판다리아, 드레노어 자체가 가로쉬 스토리였긴 했으니 논외로 치고.. 바리안은 솔직히 인게임보다 소설이나 코믹스에서 비중 먹고 들어갔다고 보면 되지만 호드는 진짜 실바나스, 스랄, 가로쉬 3인 체제로 돌아갔음 | 20.05.30 09: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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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때 벨렌 태양샘 엔딩때 말곤 등장 전혀 없었음.. 군단때 불군이랑 본격적으로 붙으면서 겨우 주목받은거 소설까지 따지면 볼진 수도사 전직기나 케른 사망 일화를 담은 소설속 바인이라든지 호드 수장들도 챙겨주긴했음 | 20.05.30 09: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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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착각했네요 드레노어 평행세계 벨렌 말하려던 거였는데.. | 20.05.30 09:2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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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해보니 드군 벨렌도 있었네요 호드쪽은 스랄이 서리불꽃마루 담당이였지만 벨렌보다 임펙트가 부족하긴했죠 듀로탄과 가나르가 주역이라 | 20.05.30 09: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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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에서 정상인 포지션 잡느라.. | 20.05.30 11: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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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테마르 탈리스라한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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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게임에서야 다수지만 실제로는 거의 호드 쩌리 취급받고 있으니 거기서 자기 자리 지키는것만 해도 대단한 정치력을 지닌 수장임 이제 좀 행복해지겠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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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맛
탈리스라 연배 생각하면 티란데급이니 ㅎㅎㅎ... | 20.05.30 10:4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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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체제였는데 왕가가 몰락해서 계속 섭정으로 있어야됨 | 20.05.30 09:3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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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르테마르 본인피셜, 실버문은 더이상 왕을 모시지 않을거라고 함. 근데 사실상 1인자 본인피셜이면 오피셜이니까 ㅋㅋ | 20.05.30 10: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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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할두런 브라이트윙과 롬매스가 그의 수라마르 방문에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로르테마르가 출발하기도 전에 롬매스의 입에서 “이런 연애 무지렁이를 다 봤나. 멱살 잡히기 싫으면 퍼뜩 출발하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를 터였다. 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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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수명깎일 일만 한가득이었으니.. | 20.05.30 11: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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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자 시절이나 캘타스 시절 행동대장 하던 사람이 갑자기 섭정이 됬으니 | 20.05.30 11: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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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완전 얀웬리... | 20.05.31 16:4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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