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최근방문

[LOL] [유니버스] 단편소설: 자운의 아이, 아펠리오스 소설 공개




[광고]
글꼴

 

자운의 아이

by 이안 세인트 마틴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ild-of-zaun/

 

법과 질서의 차이가 무엇일까?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정의 구현에 법과 질서가 필요하긴 한 걸까? 아마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내게 묻는다면, 아니 어린 시절의 내게 묻는다면, 정의란 때려 부수는 것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마침내 법의 전당에 도착했을 때 밖에는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이토록 이른 아침인 경우는 흔하지 않았지만, 나는 보통 그랬듯이 손님과 함께 있었다. 시계학의 도로에 늘어선 상점과 카페의 기물을 파손한 일곱 명 중 둘을 붙잡아 데려온 것이었다. 한 명은 내가 가볍게 툭 치자 곯아떨어졌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한 다른 한 명은 시끄러운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금속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다른 한 명을 향해 어깨 너머로 고갯짓을 했다. "내가 너였다면 네 친구처럼 얌전히 있었을 거야."


"이건 너무 하잖아. 여기가 무슨 녹서스야?" 그가 씩씩거렸다.


"녹서스?"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녹서스면 다행이게. 여기가 녹서스였으면 수치의 방이 아니라 투기장으로 널 데려갔을 거야."


이 말을 들은 그는 상상이 되었는지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다시 반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우리 입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신들의 압제를 폭로하고 체제를 무너뜨리고 말 거야."


"찻집 창문 깨는 게 네가 하고 다니는 짓인데 뭘 어떻게 폭로하겠다는 거지? 넌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거나 깨부수고 다닐 구실이나 찾는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야. 네 행동은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우린 영향력 없는 자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거야! 가난한 사람들과 탄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의 옷차림새를 살펴보았다. 깔끔한 새 옷이었다. 그가 수배를 받은 적은 없었다. "나도 그 가난하고 탄압받는 자운 시민 중 한 명이지만 충분히 내 목소리를 내고 있어."


그가 거리에 가래를 뱉었다. "당신은 체제의 일부일 뿐이야.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챙겨 주면 뭐든 하지. 그러고도 밤에 잠이 와?"


이 건틀릿을 끼고 있으면 간지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를 강타하고 싶은 충동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해질 때가 있다. 참아 보려 했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내 피를 들끓게 했고, 마법공학 주먹이 곧 나아갈 기세로 움찔거렸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너같이 기물 파손하는 녀석들 잡으러 다니는 일만 없으면 꿀잠을 자겠지."


다행히도 문이 가까워졌다.


"여기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자운 시민 한 명 구제 좀 해 주시죠." 녀석의 머리로 문을 두드렸다. 솔직히 마지막으로 두드릴 때는 개인적인 감정이 좀 섞여 들어갔다. 두드리는 소리가 충분히 컸는지 반대편에서 누군가 잠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케플 보안관." 문이 천천히 열리자 눈을 껌벅이는 얼굴이 나타났고, 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왜 이리 빨리 시작한 거야, 바이?" 그가 툴툴거리며 졸린 눈을 비볐다.


"불의는 절대 쉬는 법이 없다고, 친구." 붙잡아 온 녀석들을 문 안으로 끌고 들어간 나는 케플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용의자 두 명을 체포했어. 둘은..." 녀석들은 동시에 코를 골고 있었다. "현재 진압된 상태야."


케플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런 것 같군. 위층에서 케이틀린 보안관이 기다리고 있어."


"그럼 이 말썽꾸러기 혁명가 두 녀석은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지?"


"그래, 조서 작성은 내가 맡지." 두 녀석 중 한 놈은 케플의 손에, 시끄럽게 조잘거리던 다른 한 놈은 발아래에 던져 놓고 가자 케플이 투덜거렸다.


난 그 옆을 지나가며 환한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럼 부탁해."



케이틀린의 사무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삐걱거리는 목조 책상은 산더미처럼 쌓인 황동 압축 공기 튜브 캡슐과 그 안에 가득 찬 각종 서류, 서신 및 칙령 문서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케이틀린은 그 안에서 각종 영장과 위임장, 그리고 상관들과 상인 조합의 요구 사항을 담은 문서들을 뒤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난 문을 닫으며 케이틀린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워져 있을지를 생각했다.


"앉아." 케이틀린이 올려다보지 않고 여전히 무언가를 찾으며 말했다.


'바로 말해야겠어.'


"저 녀석들 때문이야?" 난 의자 위에 있던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오른쪽 기계 손가락을 구부리며 자리에 앉았다. 부츠를 신은 발은 책상 모서리에 올렸다. "녀석들은 며칠 내로 다시 멀쩡히 돌아다닐 거야. 나도 많이 봐준 거라고."


"그 일 때문이 아니야." 케이틀린의 말에서 갈수록 피곤이 짙게 묻어났다. "우리가 최근에 주목하게 된 일이 있어. 꽤 복잡한 일이지. 자운에 대한 건데, 조사가 필요해."


케이틀린을 짓누르고 있었던 건 수면 부족만이 아니었다. 세 거리나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은화를 뚫어 버리는 여자였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무언가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한 거야?" 내가 숨길 수 없는 쓴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틀린이 책상에서 서류를 뒤지는 것을 멈추더니 푸른색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아니, 다른 일이야. 전혀 새로운 일."


"새로운 일이라." 반복해서 말해 봤지만 더는 감이 오지 않았다.


케이틀린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동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관할권에서 엄청 멀리 떨어진 곳이잖아."


"두 도시는 분리된 이후 공생 관계를 유지해 왔어. 비록 겉모습은 달라도 서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지."


사람들은 이를 '분리'라고 불렀다. 보통 분리는 깔끔하고 균형이 잡힌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부유한 상인들이 운하를 뚫는 일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지반의 취약한 부분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이는 자운의 절반이 물에 잠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업 때문에 물에 빠져 유명을 달리한 이들과 이후 상업으로 일군 부가 어떻게 분배되었는지 생각하면 이 분리는 깔끔하거나 균형이 잡힌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균형을 깨는 아주 쉬운 방법은 자운의 하층부로 가서 질서를 뒤흔드는 거지. 최상층은 아니야. 지하동굴처럼 사건을 조작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케이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이미 이야기하고 다뤘던 주제들이야."


"누구랑? 힌트라도 줄래?"


"난 네가 알 필요가 있는 만큼만 말해 줄 수 있어. 그 문제는 네가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나는 비어 있는 압축 공기 튜브 캡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지하도시 일은 지하도시가 신경 써야지."


"이번엔 아니야." 케이틀린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캡슐을 빼앗아 내려놓으며 다시 책상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케이틀린은 평소에 이 정도로 답답하게 굴지 않았다.


"그럼 뭐가 달라진 건데?"


"우리도 몰라. 그걸 알려면 자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지하도시로 직접 내려가야 해.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애매모호하잖아. 남작들은 어쩌고? 필트오버에서 온 보안관들이 자기들 영역으로 들어와서 헤집고 다니도록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아?"


케이틀린이 피곤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겨우 화공 남작 몇 명에 겁먹다니, 내가 아는 바이 맞아?"


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누가 내 머리를 노릴지 알고 싶은 것뿐이라고."


"화공 남작들은 문제 없어."


"아, 그래? 어떻게 문제가 안 된다는 거지?" 난 눈썹을 추켜세웠다.


"도움을 요청한 게 그들이니까."


이 말을 들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새로운 일이 맞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화공 남작들과 우린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아.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보안관 자격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네가 잡아 온 녀석들이 알고 보니 메다르다 가문 출신이었어. 녀석들의 부모는 네 머리를 노리고 있지."


케이틀린이 양피지 재질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편지에 쓰인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성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틀린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내가 이미 설득해 놨으니까. 네가 보안관을 그만둔다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어.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서 다시 네 뿌리를 찾는 거야."


"재미있네." 케이틀린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고향'이란 말이 튀어나오다니.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지만, 아마 난 여전히 방문자에 불과했던 것 같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법 위에 군림할 만큼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다니. "참 쉽기도 하고."


케이틀린의 목소리에서 경박함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네가 지하도시에 혼자 가게 된다는 뜻이야. 지원은 없어. 그리고 평범하게 보여야 해. 배지와 건틀릿은 반납하고."


"자운으로 내려가라니..." 나는 잠금장치를 풀어 건틀릿을 벗었다. "화공 남작들이 직접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뭔가를 알아서 찾으란 말이지. 건틀릿도 가져갈 수 없다니. 점점 더 재밌어지네." 커다란 마법공학 건틀릿을 책상 위에 턱 내려놓자 캡슐들이 부서지고 종이 서류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믿을 건 너뿐이야."


나는 짜증이 나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이 일을 누가 지시했는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지시를 매일 받는 게 아니잖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말했어, 바이. 믿어 줘."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원하면 같이 가든지. 발로란에서 가장 경치 좋은 여행지로 잠깐 출장을 떠나는 거지."


케이틀린은 말이 없었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가지 못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놀리는 건 항상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놀리면 내가 벽을 주먹으로 쳐 구멍을 내기 전에 화가 가라앉기도 했다.



솟아오르는 포효에 도착했을 땐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내가 떠나자 법의 전당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고 돌까지 던졌지만, 현명하게도 아주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보일 수 있도록 법의 전당 건물에 붙어 침묵했다.


건틀릿 없이 이 도시를 걸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손은 어제부터 계속 꽉 쥐어진 상태였다. 난 법의 전당의 보안관들과 필트오버에 나를 결속시켜주는 모든 것을 놓고 왔다. 이제는 내 모습을 숨겨야 했다. 자운에는 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꽤 많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진 않았다. 난 지하로 내려가서 남작들을 겁에 질리게 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고 적어도 며칠 내로는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차장이 신호를 보내자 마침내 문이 잠겼다. 솟아오르는 포효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기 직전이었다. 거대한 쇠사슬을 잡고 있던 마법공학압식 권양기의 결속이 풀리자 솟아오르는 포효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난 아래층 자리에 앉아 암녹색 창문 밖을 응시했다.


필트오버 전역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빛이 반사되어 철과 유리로 뒤덮인 탑들이 반짝였지만, 깊숙한 골짜기 안쪽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자운의 최상층에 그대로 드리운 빛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희미해졌다.


발을 옆으로 치우자 바닥에 투박하게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일종의 거미 형상 같은 것이었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최상층에 다다르자 벌써부터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입에서는 화학 물질의 맛이 느껴졌고,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 댔다. 새롭게 지어진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층부터 지어진 하얀 거대 석탑의 유리에 빛이 비쳐 반짝였다. 탑의 지하층에서는 기계공과 인부, 기타 일꾼들이 마법공학 수정을 지상층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 땀 흘리며 합성 및 가공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운에 남는 것은 적어도 냄새로만 보면 잿빛 대기보다 열 배는 위험할 듯한 농축된 유출액뿐이었다.


이 첨탑을 소유한 자가 누군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페로스 가문은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합성 수정을 생산했지만 더 이상 산업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요즘엔 심지어 포잉데스트레스 같은 화공 남작들도 상인 조합의 도움 없이 싸구려 모조품을 만들려고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판이었다. 하지만 이 첨탑은 흔히 그렇듯 남작들과 상인 조합이 힘을 합쳐 건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간층으로 내려가는 도중 창밖의 무언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지나다니는 통로에서 그라피티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희미해진 그라피티들 위로 유독 선명한 상징 하나가 눈에 띄었다.


거미였다.


바닥을 다시 보니 똑같은 상징이 보였다. 창문 밖에는 거미 상징이 계속해서 보였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진동하다 멈추며 중간층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난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내리는데도 내가 그대로 남아 있자 몇몇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벨을 울리며 출발을 알렸다. 차장이 계단을 내려와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나를 발견했다.


"곧 하강할 예정입니다만." 차장이 불안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동굴로 내려가시나요?"


주위를 살펴보니 문 너머에 비어 있는 승강장이 보였다. "내려가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군요."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몰라요." 차장은 고글을 눈썹 위로 들어 올리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요즘 지하동굴 상황이 좋지 않아요. 위에 머무는 게 좋을 거예요."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요?"


차장이 축음기를 만지작거리며 날 내려다봤다. "경솔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난 잠깐 그녀를 바라봤다. "글쎄, 제가 감수하죠."


그녀는 내가 생각을 바꾸기를 바라며 기다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위쪽으로 올라갔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우르르 소리를 내며 지하동굴 방향으로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가면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간층을 지나니 조명 상태가 더 열악해지며 화학공학 등의 개수가 점점 더 적어졌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마치 반딧불이가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솟아오르는 포효의 조명 장치로 주변을 겨우 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게 소용이 있는 일인지는 불분명했다.


지하동굴은 단 한 번도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 오래전, 홍수에 도시의 절반이 휩쓸려 유명을 달리한 자들의 무덤이 되고 다른 절반이 쓰레기 매립지로 변해 버리기 전까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적을 잘못 두거나, 너무 많은 약속을 어기거나, 패자에게 마지막 남은 돈을 걸면 이곳에 오게 된다. 여긴 절벽 끝에 몰린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위쪽 사람들은 그들을 찾으려 굳이 아래를 굽어보지 않았다. 이곳은 안전하지는 않아도 위쪽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조명이 깜빡거리다 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암녹색 창문 쪽으로 다가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밖을 봤다. 잠시 후 조명이 다시 켜지자 통로 벽면 전체가 무언가로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거미. 온통 거미뿐이었다.


아까 봤던 조잡한 거미 표식과 똑같았다. 위에서는 가끔 볼 수 있었지만, 여기는 사방에 거미가 새겨지거나 그려져 있었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거미들은 마치 자신들이 차지한 어둠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내 안에서 한기와 함께 약간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케이틀린이 날 이곳에 보낸 이유는 분명 이 거미와 관련이 있었다.


"종점입니다." 솟아오르는 포효가 쇳소리를 내며 멈추자 차장의 목소리가 축음기를 통해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자 난 버려진 승강장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화학공학 등 하나가 그곳에 있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승강장으로 발을 옮기자 등 뒤로 문이 빠르게 닫혔다.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던 솟아오르는 포효는 곧 다른 조명들처럼 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되어 사라졌다.


자운에 고요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지하동굴도 마찬가지였다. 부식된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소리와 함께 멀리 있는 공장과 고철 처리장에서 윙윙대는 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 셋이 들려왔다.



솟아오르는 포효의 통로를 뒤덮고 있는 거미 상징은 부랑배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걸친 낡은 옷에 거미 상징이 보였다. 목과 얼굴 부분에도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붉게 부어오른 거미 문신이 있었다. 그들은 무장하고 있었고, 이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한 명은 쇠사슬을, 다른 한 명은 긴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의 손에는 변색되어 광택이 흐릿해진 칼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나이가 어려 아마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녀석들이 누구든 간에,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어리석은 짓을 하고도 남을 신참들이 분명했다.


"길이라도 잃었나?" 칼을 들고 있는 놈이 물었다.


"글쎄, 길을 잃은 것 같진 않은데." 난 별일 없는 척하며 패거리의 자세, 건강 상태, 기질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 곧 누가 대장이고 누가 부하인지, 누가 도망가고 누가 맞서 싸울 놈인지 파악했다.


그들을 지나치려 하자 칼이 앞길을 막아섰다. 칼 위로 화학공학 등의 노란빛이 비쳤다.


부랑배가 날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땐 길을 잃은 것 같은데? 혹시 '목소리'를 들으러 온 거야?"


난 세 명을 한꺼번에 보기 위해 앞으로 살짝 발을 옮겼다. "어떤 목소리를 말하는 거지?"


칼을 든 녀석이 코를 찡그렸다. "신자나 순례자라면 알 텐데. 다른 이들은 여기에서 환영받지 못해."


"수작 부리지 말고 집에 돌아가지 그래, 햇볕에 그을린 쓰레기 같으니." 한 녀석이 말하자 다른 녀석들의 동조가 이어졌다.


놈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도 있었다. 패거리의 이름이라든지,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지하동굴 전체가 겁에 질린 이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녀석들을 손봐 주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이봐, 꼬맹이들." 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며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 "여기가 내 집이야."


놈들이 서로를 잠시 쳐다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칼, 쇠사슬, 쇠파이프 순으로 쳐다보며 어떤 녀석을 먼저 쓰러뜨릴지 파악했다. 긴장감이 감돌자 공기에서 암모니아와 기름 냄새가 났다.


'피 냄새를 좀 섞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나는 건틀릿을 놓고 왔다는 것을 잊은 채 첫 번째 주먹을 날렸다. 마법공학 장치인 아틀라스 건틀릿을 오래 장착하고 있으면 그 힘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칼을 든 녀석의 옆머리를 가격하자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에 주저하는 사이 쇠파이프를 든 녀석이 갈비뼈를 후려쳤다.


쇠사슬을 든 녀석은 빙글 돌아 내 다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내 목표는 칼을 든 놈이었다. 내 주먹을 맞은 녀석은 땅을 양손으로 짚고 쓰러져 있었다. 내가 무릎으로 턱을 가격하자 녀석은 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다음 쇠사슬을 낚아채 두 번째 녀석의 몸을 비튼 후 박치기로 코를 뭉개 버렸다. 녀석은 얼굴을 부여잡으면서 나자빠졌다. 이때 쇠파이프를 붕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세 번째 녀석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 몸을 벽 쪽으로 밀어 버렸다.


쇠파이프를 든 녀석이 재빨리 일어서더니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칼을 든 녀석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가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쇠사슬을 든 녀석 쪽을 쳐다봤다. 쇠파이프가 떨어지며 땡그랑 하는 소리와 동시에 녀석이 도망쳤다. 추격하려고 돌진하는 순간, 폐를 조이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가슴 전체를 타고 흘렀다. 그냥 놔주는 수밖에 없었다.


칼과 쇠사슬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발로 칼을 밟아 부러뜨리고 무기들을 승강장 밖으로 걷어찼다. 가슴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채 지하동굴로 향했다.



무언가가 다친 상태로 도망칠 때는 자신에게 익숙한 곳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둥지나 굴, 몸을 보호해 줄 벽이 있는 안식처 같은 곳 말이다.


지하동굴에는 내가 아는 소중한 안식처가 몇 군데 있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분명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어딘가 숨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머릿속에 딱 한 장소가 떠올랐다.


내가 언제 어떻게 고아들을 위한 희망의 집을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고아원에 대해서는 한동안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가는 길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든 기억할 수 있는 법이니까. 설사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난 더 이상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샛길을 통해 이동했다. 멍청해 보이는 패거리 몇몇이 무장을 하고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파괴하거나 망가뜨리지 않아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자기 것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장이 뛸 때마다 쿡쿡 찔리는 느낌에 손으로 갈비뼈 부근을 부여잡았다. 다친 부위를 묶어 놓았지만 계속 부어오르고 있었다. 거의 부러지기 직전인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묶은 부위를 더 꽉 묶는 것뿐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칙칙하고 허물어진 희망의 집이 보였다. 내가 도망쳐 나올 때도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의 상태는 예전보다 더 심각했다.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싸움질이나 도둑질을 하다 잡혀 오곤 하던 기억이 났다. 추억의 장소를 마주하니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이 건물 앞에서 서로를 쫓으며 놀고 있었다. 더 빠르고 건강한 아이들이 사지 중 하나를 잃은 아이나 싸구려 기계 식도를 달고 쌕쌕거리는 아이들을 앞질렀다. 내가 등장하자 놀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 지하동굴에서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사실은 버려진 자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것 중 하나였다.


현관으로 다가간 한 아이는 입구로 이어지는 낡은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다 자빠질 뻔했다. 아이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자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내려다봤다. 아이의 엄마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아이를 보살피기에는 충분한 나이로 보였다.


"계단에서 놀 때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어?" 여자가 아이의 뺨에 묻은 때를 떼어 주며 아이를 혼냈다. "위험하다고 했잖아. 조심하지 않으면 조만간—"


"조만간 머리가 깨지겠지." 내가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말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의 목소린지 깨달은 나는 지금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예전에 내가 알던 수줍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여기서 어떤 꼬맹이한테 항상 하던 말이었지. 그 애는 책을 읽지 않을 때면 공중제비를 돌려고 했거든." 내가 웃으며 말했다.


"공중제비는 포기했어. 하지만 아직도 시간 있을 때 책 읽는 건 좋아해." 그녀가 아이를 안으로 들인 후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내가 계단에 발을 올리자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 정말 너야? 말도 안 돼..."


"응, 나야."


나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그럴 리가 없어. 로는 내 허리춤에도 못 오는 꼬맹이였다고. 그런데 이렇게 크다니!"


"여기에서는 오랫동안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어. 그 누구보다 언니가 잘 알겠지만."


나는 계단을 하나 더 올랐다. "오랜만이야. 다시 보니 반갑네."


로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뭐, 내가 떠났나."


난 계단을 오르는 것을 멈추고 한 걸음 물러섰다. 로의 목소리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떠났을 때 로는 그저 아이에 불과했다. 희망의 집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가 돌봐준 아이. 로만큼은 싸움이나 도둑질 같은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절대 밖으로 같이 데리고 가지 않았다. 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난 이곳을 떠났다.


"법의 전당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로가 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배지라도 보이니?" 내가 팔을 넓게 펼쳐 보였다. "한동안 보안관으로 일한 건 사실이지만 최근에 나왔어."


"나가는 게 취미인가 보네."


이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로, 싸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넌 이제 충분히 컸으니까."


하지만 로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해도 될까? 잠깐 가야 할 데가 있어."


"어딜 가는데?"


문 쪽을 돌아본 로가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는 잠시 침묵하며 날 응시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로의 옷깃에 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작은 고철 조각 위에 뭔가 새겨져 있었다. 거미였다.


"목소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난 로와 함께 무너져 내려가는 인근 지역을 지나 모임 장소로 향했다. 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니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과 밤새워 읽은 책을 통해 얻은 명민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지금 로에게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로의 눈은 강렬한 신념으로 빛났다.


난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여기에 내려온 이유를 말하는 것을 회피했지만, 말을 꺼낼 때마다 몸이 접힐 정도의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로가 웃었다. "왜 이래? 잿빛 대기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거 아냐?"


"쇠파이프로 갈비뼈를 맞았어."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옆구리에 손을 가져갔다. "솟아오르는 포효에서 내리니까 네 친구들이 환영 인사를 하더라고."


로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같아. 탄압을 끝내고 남작들과 상인 조합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야. 우린 깨끗한 공기를 원해.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게 문제지만. 대부분이 갱단 생활을 하다 와서 신경이 좀 날카로울 뿐이야. 여기에도 훌륭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지."


난 수년간 필트오버에서 자운을 감옥, 황무지, 암흑가로 여기는 자들과 함께 지냈다. 필트오버는 자운을 내려다보며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자운의 시선을 느꼈다. 필트오버인들은 자운인들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싫어했다. 또는 내가 체포한 그 애송이처럼 자운인들의 편에 서려고 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보단 확실히 나은 사람들 같군."


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줄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어린아이와 노인,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의 목을 노리던 경쟁 조직 일원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걷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거미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이는 천 조각으로, 어떤 이는 문신으로, 또 어떤 이는 로처럼 핀으로 거미를 드러내 보였다. 그들은 지붕이 없고 단 세 개의 벽으로 버티고 있는 오래된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줄이 길었지만 모두가 침착하게 기다렸다.


문에 다다르자 야수같이 생긴 무장 경비원 둘이 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한 명은 광택이 나는 철제 발톱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한 인사로 맞이해 주었다.


"로, 어서 와." 경비원 중 한 명이 로를 보고 인사했다. 우람한 덩치와는 달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이 여자는 못 들어가."


"들어가게 해 줘. 내 친구야."


"이 여자는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어." 다른 한 명이 경멸하듯 턱을 들어 올렸다. "신뢰할 수 없는 자야."


그들은 내가 필트오버에서 보안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피부가 탔다는 이유로 날 돌려보내려고 했다. 신참들이 분명했다.


"내 친구는 목소리를 들으러 왔어. 내가 보증할게, 토그." 로가 경비원의 눈을 쳐다보며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비켜 줘."


경비원들은 모여서 무언가 이야기하더니 다시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누구에게나 목소리를 들을 권한이 있지. 당신도 환영이야. 하지만 우리가 지켜볼 거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혹시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탈출구를 파악해 놓으려고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곳곳에 구멍이 뚫린 공장 건물은 거의 무너져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위기가 닥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로가 나를 쫓을지, 함께 도망갈지는 알 수 없었다.


거창한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음악이나 봉헌 양초도 없었고, 성금을 모금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여러 사람이 모여 중앙의 돌무더기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 위에는 사내 한 명이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난 로에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라는 게 저 사람이야?"


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하도시를 점령한 자를 살펴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기껏해야 로의 또래로 보였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그는 삐쩍 마른 앙상한 몸에 부랑배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은 끔찍한 일을 겪어 본 눈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온기도 함께 느껴졌다. 마치 나에게만 말해 줄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마지막 사람이 들어오자 목소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로운 분들이 많이 오셨군요."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조용했지만 모두의 귀에 가닿았다. "모두 환영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따라 이곳에 모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의 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저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이 여기에 얼마나 많을지 궁금했다. 거절당하고 학대당한 자들, 그리고 잊혀진 자들이 처음으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과 시행착오, 고통의 흔적이죠. 세상은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우리가 거의 주어진 것이 없는 삶에 만족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현실은 너무 오래 지속됐습니다. 이제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동조하는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보안관으로 일해 보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시 생생하게 들추어냈다.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진실의 이면에서 목소리가 의도하는 게 무엇인지 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짓밟아 왔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화공 남작들은 우리가 사는 곳을 이용해 부를 쌓는데, 정작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물에 풀어진 독입니다. 질병, 고통, 죽음이죠.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정당한가요?"


"아니요!" 사람들은 성난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의 장단에 놀아났다. 옆에 있는 로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분노로 차 있었다. 내가 타고난 반골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공연은 극장에서 했어야 맞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쓰러진 형제자매들을 위해 울거나 우리 아이들의 삶이 착취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화공 남작들은 그들이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진짜로' 모시는 자들을 상대로 정의를 구현할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목소리는 비난하는 듯한 몸짓으로 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렸다. "높이 솟은 저 위쪽 도시의 부패한 상인들. 밝은 태양 빛에 눈이 멀어 이곳 지하동굴에서 저지른 범죄를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끼친 고통. 그들은 그러한 무지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 숨어 삽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실 때 그들은 무지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마치 신에 대해 언급하기라도 한 것처럼 경외심에 차 수군거렸다. 로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다들 이 상황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난 목소리가 하는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로에게 물었지만 로는 여전히 목소리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 그분의 목소리이며,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입니다. 전 그분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손을 얹어 저를 간택했고, 어린 양들을 보살펴 재림에 대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곧 그날이 옵니다. 응징이 아닌 정의의 날이 말입니다."


"그럼 그 피의 대가는 누가 치르는데?"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서 있는 나에게로 향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로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아, 이 빌어먹을 성질머리. 난 소질 없는 첩자야.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 같네.'


난 목소리와 군중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지. 번지르르한 말솜씨로 학대받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해 먹는 자들. 정의라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선동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꼭두각시들이 자기 장단에 맞춰 춤추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지. 그들은 신이 되고 싶어 하니까."


목소리는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우리 교리를 처음 접하신 모양입니다. 교리를 명확히 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매님을 나무랄 수는 없죠."


"명확히 보여." 내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이비 종교 교주가 신자들에게 피를 흘리도록 자극하는 모습이 보여. 자유와 번영을 약속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역에 무장한 불량배들을 배치해 둔 거짓말쟁이가 보여."


"그들이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가 솔직하게 대답하며 내 쪽을 바라봤다. "우리 형제들이 자매님을 공격했다면 미안합니다. 개도 수없이 차이다 보면 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실 겁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이제 다른 방법을 써야 할 때입니다."


그는 양팔을 넓게 벌린 채 돌무더기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자매님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땅히 고향으로 삼고 살아야 할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운의 아이가 보입니다. 필트오버의 부패가 자매님의 온몸을 더럽혔군요. 자매님은 압제자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결코 변하지 않아요. 자매님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힘이요."


그는 확실히 언변의 마술사였다. 난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를 박살 내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그 후에 나 또한 몇 초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무슨 고통을 받든 간에 그건 내 고통이야." 내가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말했다. "난 내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짊어졌어. 다른 이들에게 그 무게를 떠넘기지 않지. 난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나한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남한테 전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목소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웃더니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분께서 자매님을 마음에 들어 하시겠군요. 하지만 이 길이 자매님의 길이 아니라면 지금 떠나십시오.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난 로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좋아, 떠나지. 하지만 당신들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당신들을 도우러 올 신적인 존재는 없어. 이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를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인간일 뿐이야."


목소리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의 슬픔에 가까운 미소였다. "자매여,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실존하십니다. 이제 곧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테지요."



그가 말한 대로 내가 떠날 때 날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떤 위협도 없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동안 날 비난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때 로가 날 따라잡았다.


로가 날 막아섰다. "대체 왜 이래?"


"난—"


"언니는 날 버리고 떠났어. 그러고 한참 후에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기야?"


"그만해. 설마 저걸 다 믿는 건 아니겠지?"


"뭐가 그렇게 믿기 어려운데? 밖에 지하동굴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로, 난 선동자를 알아볼 수 있어. 선동자는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청중을 자극할 수 있는 말이라면 그 어떤 말이든 하고 보지. 하지만 결국 피가 묻는 건 그들의 손이 아니야. 그자는 모두를 현혹하고 있어."


"그분은 우릴 도우려고 하는 거야." 로가 고개를 격렬하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기억나긴 하는 거야? 언니는 빠져나갔지만, 남은 우린 운이 그렇게 좋지 않았어. 우린 떨어져 고립된 채 산다고. 앞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분께선 우릴 자유롭게 할 거야!"


난 보안관처럼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떻게? 그리고 자유를 얻고 나면 이 중에 몇 명이나 살아 있을 것 같아? 그자의 계획이 뭔지 알아?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중요한 일이니까 제발 말해 줘."


로의 눈빛이 변했다. "왜? 누구한테 말할 건데? 애초에 여기는 왜 내려온 거야?"


나는 로가 의심을 거두길 바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두 도시가 분열되지 않도록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고 싶어."


로가 흐느끼듯 웃었다. "언니는 저 위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그동안 내내 태양 빛을 쬐며 살다가 돌아와 우리를 신경 쓴다고 말은 하지만, 도대체 언니가 해 준 게 뭐가 있어?''


"로."


"말해 봐. 도대체 우릴 위해 해 준 게 뭐가 있는지. 우릴 여기에 버려두고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있었는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어째서?"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마치 폐부가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 세상이 비합리적인 곳인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어린아이가 할 법한 질문이었다.


"됐어. 위로 돌아가. 언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그분이 오면 알게 될 거야. 저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겠지."


"누구야?" 내가 로의 어깨를 잡았다. "로 '그분'이 누구야?"


로의 표정이 굳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어. 언니만 빼고. '살상 병기' 말이야."



"살상 병기?"


최상층에 밤이 찾아왔다. 케이틀린은 필트오버의 보안관으로 의심받을 만한 모든 물건을 두고 두 도시가 만나는 지점으로 왔다.


"뭔지 좀 알 것 같아?"


케이틀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알아봐야겠는걸. 또 알아낸 건 없어?"


나는 내가 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벽을 뒤덮은 문양들. 지하동굴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세력. 모임에서 목소리가 한 말들.


"그들은 조직화되어 있어. 그리고 화가 나 있지. 일은 반드시 터질 거야. 문제는 '언제' 터지느냐 하는 것이지."


케이틀린이 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 갔다. "알았어. 그럼 그 일이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알겠어?"


"나도 모르겠어."


케이틀린이 목소리를 더 낮게 깔고 다시 물었다. "그자들이 마법공학에 대해 언급했어?"


"마법공학?"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 이 일이랑 무슨 상관—"


그녀에게 내 시선이 고정됐다. "그래, 마법공학. 보석, 수정, 마법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알아야 할 일이야."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하기 싫은 질문이었지만, 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머릿속을 맴돌 그런 질문이었다. "케이틀린, 네가 찾는 게 뭔지 알고 있어?"


그녀가 날 바라봤다. "우린 같은 편이야, 바이."


"그게 어떤 편인데?" 케이틀린이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날 더 불안하게 했다. "이 일에 개입된 건 화공 남작들만이 아니지? 그들이 불량배들과 다투는 모습을 오래 지켜봐 왔지만 우린 지금까지 손가락 하나도 꿈쩍하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났고, 넌 마법공학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있어. 상인 조합이 장사에서 손해를 볼까 봐 두려워서 우리에게 자운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 거야?"


케이틀린은 말이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군."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전부 알려 줬어." 날 훑어보던 케이틀린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다쳤네."


"괜찮아질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새벽빛은 이 아래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 대신 깜빡이는 화학공학 등은 희망의 집 현관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관에는 지난번에 본 남자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나 기억하니? 로의 친구야. 바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우리는 조심조심 서로의 거리를 좁혀 갔다. 상기된 뺨으로 입을 삐죽 내민 아이는 두 팔로 가슴을 끌어안고 있었다. "율리."


"율리구나." 계단 몇 개를 사이에 둔 채로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율리, 로 누나 어디 있는지 아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떠났어요."


순간 등골이 서렸다. "어디로?"


아이가 날 쳐다봤다. 꾀죄죄한 얼굴에서 상처받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화가 난 채로 집에 오더니 친구 몇 명이랑 같이 떠났어요."


"율리, 이건 진짜 중요한 일이야." 나는 아주 천천히 아이가 앉아 있는 계단 쪽으로 손을 뻗어 올렸다. 아이가 그런 날 지켜봤지만 피하려 하지는 않았다. "로 누나가 친구들이랑 어디로 갔는지 알아?"


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누나는 이제 때가 됐다고 했어요. 나도 가고 싶었는데 난 여기에 있어야 한대요."


"어디로 간 거야?" 난 아이가 혹여라도 겁에 질리지 않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지만,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율리가 중간층 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새로운 탑이요. 누나가 저기에서 마법의 돌을 만든다고 했어요. 하나 가져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집에 돌아올 때 모든 사람한테 나눠 줄 만큼 충분히 가져올 거라고 했어요."


내 발은 이미 뛰고 있었다.



중간층으로 올라가려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도착한 후 어디로 가야 할지는 분명했다.


첨탑. 자운 시민들을 탄압하는 자들을 상징하는 건축물. 첨탑은 두 도시에 걸쳐서 자리하고 있었지만, 자운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 번 돈은 대부분 필트오버 사람들이 사용했다. 첨탑 맨 위에 있는 돔에서는 상인 조합의 대표들이 아래의 노동자들을 관리했다.


오늘 그들이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첨탑 하층부가 피로 붉게 물든 장관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지면에는 이미 주검들이 즐비했다. 필트오버는 마법공학 수정의 최종 목적지였지만, 화공 남작들 역시 그들의 영역에 첨탑이 있다는 이유로 일정한 몫을 배당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첨탑을 지키기 위해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경비원들을 다수 배치해 두고 있었다.


사이비 종교 신봉자들이 문으로 달려가 마치 파도처럼 경비원들을 끌어낸 것이 분명했다. 길 양쪽으로 주검이 여럿 보였다. 경비원들은 화학공학 무기로 무장하고 훈련과 경험으로 단련되어 있었지만, 뭉툭한 물건을 무기로 삼아 미친 듯이 달려드는 광신도들을 막을 순 없었다. 그들은 이를 보복의 기회로 여겼다.


첨탑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안을 보니 모임에 있던 사람들이 상자를 운반하거나 원형 금속 통의 받침대를 살펴보고 있었다. 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으로 가자 첨탑에서 가져온 상자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상자 더미 위에 서 있었다. 갈기갈기 찢긴 옷을 입은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에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싸움을 한바탕 치른 모양새였다. 그는 쇠지레를 사용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푸른빛을 내는 작은 광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합성 마법공학 수정이었다.


"오늘은 뜻깊은 날입니다!" 목소리가 수정 하나를 손에 들며 승리에 취해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수단을.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균형을 찾고, 정당하게 우리의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때 돌에 금속이 긁히는 불쾌한 소리가 나면서 그의 축하 연설이 중단되었다.


모든 눈이 첨탑의 벽으로 향했다. 검은 형상이 엄청난 불꽃을 일으키며 내려오고 있었다. 멀리에서도 그 육중한 크기가 짐작되었다. 한쪽에는 팔 대신 거대한 대포가 장착되어 있고, 벌어진 기계 다리들 위에 몸통이 얹어져 있었다. 기계 다리의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어 첨탑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상체가 인간의 형체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살에 희미하게 빛나는 녹색 의료용 관과 금속 장치가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마치 괴물의 것 같았다.


혹은 거미 다리 같기도 했다.


'살상 병기'. 사람들은 마치 기도문을 외우듯 그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목소리라는 자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거나 사기꾼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만의 군대를 키우기 위해 가짜로 어떤 존재를 지어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진짜였다. 갑자기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해졌다.


살상 병기가 지상에 내려앉자 자욱한 먼지가 일고 돌들이 튀었다. 사람들은 경외심에 차 침묵했다. 그가 거미 다리를 딸각거리며 예언자에게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비켜섰다.


목소리가 황홀해하며 속삭였다. "오셨군요. 드디어 오셨어요."


"그렇다, 목도하는 자여. 내가 왔도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뜨거운 쇳덩이 장치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구경꾼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비집고 들어가 로를 찾다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목소리가 마법공학 수정이 가득 들린 손으로 상자에서 뛰어 내렸다.


목소리가 활짝 미소 지었다. "위대한 살상 병기이시여. 자녀들이 피 흘려 얻어 낸 이 제물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이는 우리의 자유를 찾아 줄 열쇠입니다."


목소리가 살상 병기의 손에 수정을 쏟아붓고는 칭찬을 기대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것들을 내게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지?" 살상 병기가 손을 기울이자 수정들이 땅에 떨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목소리는 귀중한 보석들이 먼지 속에 떨어져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이해 안 될 게 없을 텐데."


"저희는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모았습니다. 이걸 팔면 무기와 군대를 살 수 있습니다."


"꼭 '그들'처럼 생각하는군." 비난하듯이 말한 살상 병기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난 오늘날 필트오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선조들을 존경한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던 그들은 이 세계의 마법을 활용할 힘을 가지고 마법을 원하는 대로 부렸지. 그들은 진정 위대한 자들이었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혼란스러웠다. 구세주가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만들어 낸 도구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들은 도구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결국 잠식당해 스스로 도구의 노예가 되었다. 이 수정에 너무나도 의존한 나머지 수정이 없으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명이 무너질 정도가 되었다."


그가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부유함은 악덕이지 힘이 아니다. 내가 그날 찾았던 소년은 선택받을 자격이 있어 보였다. 내가 착각했던 것인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살상 병기가 손으로 목소리의 턱을 감싸 쥐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살상 병기의 몸 전체가 치명적이고 날카로운 무기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애원했다. "저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그날 저를 살려 주셨잖아요."


살상 병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하지만 내 판단이 항상 맞는 건 아니야. 실수를 했다면 바로잡을 뿐이지."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짧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들린 후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살상 병기는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를 내팽개쳤다.


그가 군중을 향해 말했다. "난 우르곳이다. 난 너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나에 대해 상상하고 꿈꾸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이름과 칭호. 해방자. 신. 하지만 난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런 것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다. 난 '관념' 그 자체다."


사람들이 전부 몰려가 그를 원으로 둘러쌌다. 그는 금속 통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문 안쪽에는 더 많은 금속 통이 놓여 있었다. "난 이 세상을 비추는 자다. 숨을 쉴 때마다 모두의 영혼 속에서 강과 약이 치열하게 벌이는 경쟁의 울림이다. 나는 신이 되어 줄 수는 없다. 그건 내 힘을 넘어서는 일이니까. 내가 너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너희 스스로가 신이 될 힘을 가졌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무언가 불쾌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우르곳이 자신의 입과 눈을 가린 마스크와 연결되어 있는 의료용 관을 가리키더니 금속 통을 들어 보였다. '유독성 물질'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금속 통에 들어 있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난 이것을 들이마셨고, 정복했다. 진정한 자유는 내면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탄압하는 적들에게 우리가 던져야 할 메시지다."


우르곳이 군중을 바라보았다. "너희 중 누가 나를 따를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내면의 고통을 감내할 힘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우르곳! 우르곳! 우르곳!"


"좋다." 우르곳이 금속 통의 안전장치를 손으로 쥐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집게발처럼 되었다. "시작하지."


우르곳이 안전장치를 부수자 손가락 사이로 가스가 새어 나왔다. 그가 금속 통을 찢어 구멍을 내자 녹색 연기가 신도들을 감쌌다. 난 사람들이 몰리지 않은 뒤쪽에 있었다. 곧 사람들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로." 나는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밀치며 속삭였다. 사람들은 입과 코에 분홍색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난 파괴된 장비 보관소에 버려진 산소마스크를 찾아 썼다. 독가스 때문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주위가 온통 쾨쾨한 녹색 안개로 가득 차자 시야가 제한되었다. 사방에서 부르르 떨고 몸부림치며 자빠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로를 찾아 탈출시켜야 했다.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리고 난 로를 찾아냈다.


로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스가 스멀스멀 올라와 마침내 가슴팍까지 닿았다.


"로!"


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내가 알던 수줍음 많은 그 여자아이였다. 로는 믿음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안 돼!" 나는 로 옆으로 달려갔다. 로의 피부가 검어지더니 혈관들이 독에 중독돼 새까매졌다. 로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나는 쓰고 있던 산소마스크를 벗어 로에게 씌워 주려 했다. 로는 쓰러지면서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를 거부했다. 로의 신념, 그 철두철미한 믿음은 숨을 거둘 때까지 로를 지배했다.


독가스가 사라졌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신체 일부가 강화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투박한 황동으로 만든 기계 식도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입에서 피와 탄 설탕 맛이 났다. 때가 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일어나라." 우르곳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군대가 힘겹게 일어섰다.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이제 세상이 똑같은 시험을 치르도록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가 첨탑 꼭대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노동의 결실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그 결실을 전달해야 할 때이다."




우르곳이 첨탑을 봉쇄하자 신도들이 공기 여과 장치 속에서 금속 통을 전부 개봉하기 시작했다. 독가스가 마치 끔찍하게 생긴 녹색 뱀처럼 탑을 조여 오며 한 층씩 타고 올랐다.


난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기 전에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산소마스크가 벗겨지지 않도록 부여잡고 꼭대기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올라가면서 얼마나 많은 주검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이 지나기 전에 나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심판에 대한 대가라면 마땅히 치르겠다.


이제 나는 경주를 하고 있었다. 신도들과 우르곳이 꼭대기에 있는 돔을 향해 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조합의 관계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두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도 똑같이 목숨을 잃을 터였다. 두 도시 간의 공생 관계, 위태로운 평화가 깨지고 폭력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는 자들은 마침내 그 구실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자운은 이길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야 진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돔의 문을 연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탑 꼭대기에는 반짝이는 유리 돔이 있었다. 공들여 섬세하게 장식되어 맑은 하늘처럼 보였다. 그곳엔 부유함이 넘쳐흘렀다. 비싼 주문 제작 가구와 은쟁반에 담긴 달콤한 과일이 방을 가득 채웠다. 조합 대표들은 연구실이나 업무실에 사는 것이 아니라 궁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겁에 질린 필트오버인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케이틀린?"


케이틀린이 모자를 살짝 젖히며 인사했다. "이곳 최상층에서는 자운과 필트오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지. 가끔 관할권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헷갈린단 말이야."


난 케이틀린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과 앞으로 닥칠 일을 알려 줬다.


그녀는 커다란 가방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이게 필요하겠네."


건틀릿을 작동시키자 부웅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앞으로 있을 싸움을 준비하며 주먹을 쥐니 뼈마디의 고통도 사라졌다. 그때 독가스가 들어와 눈을 찌르고 폐를 조였다. 몇몇 조합 대표들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케이틀린은 표정이 굳더니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총을 꺼내 들었다. 순간 총이 발사되는 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발사된 총알은 공기를 가로질러 돔의 강화 유리를 뚫었다.


총알에 뚫린 구멍을 중심으로 가기 시작한 금은 번개처럼 삽시간에 유리 표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돔이 산산이 조각나자 형형색색의 유리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기압의 변화로 인해 가스가 밖으로 분출되었다.


잠깐 숨을 쉴 수 있었지만 곧 가스가 입구를 다시 채웠고, 신도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서성거리며 무기를 준비하다 멈추더니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입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마침내 우르곳의 육중한 윤곽이 드러났다. 우르곳이 아름답게 꾸며진 돔 안으로 몸을 수그리며 들어오자 신도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우르곳은 가스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자갈 소리 또는 미끄러지는 기어 소리 같았다. "이 사람들을 시험에서 제외시켰다고 생각하나? 너희가 시험에서 제외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내가 직접 너희를 시험하러 왔다. 너희가 쓰러지고 나면 그다음은 저자들 차례야."


케이틀린이 총을 잡았다. 약실에는 장밋빛을 내는 마법공학 수정이 장전되어 있었다. 그녀가 뒤에 있는 필트오버인들을 어깨 너머로 쳐다보았다. "서둘러 최상층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세요. 이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주먹을 서로 부딪치자 건틀릿에서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보라! 귀한 무기로구나. 하지만 그건 네 주인들에게 부여받은 힘일 뿐 정작 너 스스로는 약하지." 우르곳이 나를 쳐다보며 외쳤다.


내가 피식하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거 없어도 난 강해. 없어도 너 하나쯤은 쓰러뜨릴 수 있다고. 단지 이걸로 싸우면 더 재미있을 뿐이야."


우르곳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여자애와 같이 있는 걸 봤다. 자운의 아이여, 넌 두 세계에 속해 있어. 언젠가 하나를 선택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말이 너무 많군. 당장 널 쓰러뜨려서 네가 한 짓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마침내 내 안의 분노가 튀어나왔다.


싸움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순간순간만 기억날 뿐이었다. 금속의 마찰음. 내 주먹이 갈비뼈에 부딪치는 소리. 우르곳이 팔의 대포를 발사할 때 들리는 굉음과 폭발음. 건틀릿이 요란하게 작동하는 소리.


케이틀린과 내가 신도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자 마침내 우르곳만 남게 되었다. 화염과 총탄, 날카로운 쇠사슬로 무장한 금속 괴물. 누가 이 돔을 살아서 빠져나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케이틀린이 투망을 발사했다.


투망에 휩싸인 우르곳은 포효했다. 나는 팔을 양쪽으로 결박당한 우르곳이 순간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돌진했다. 온 힘을 담아 주먹을 날리자 돔의 가장자리까지 그의 몸이 밀려 나갔다. 하지만 아직 그를 떨어뜨릴 수는 없다. 아직은 아니었다.


투망 끝을 잡고 우르곳의 엄청난 무게를 버티자 내 몸도 가장자리 쪽으로 끌려갔다. 난 그를 떨어뜨리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거미가 얼마나 빨리 나는지 한번 볼까."


"잠깐!" 케이틀린이 뒤에서 소리쳤다.


"여기에서 끝내야 해, 케이틀린."


케이틀린이 금속 막대를 손에 들고 내 옆에 멈춰 섰다. "진정한 힘은 힘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거야. 지금 이자를 죽게 내버려 두면 우리도 이자와 똑같아지는 거지."


그녀가 투망 사이에 막대를 끼워 넣어 우르곳이 꼼짝 못 하게 고정했다. 난 케이틀린의 말을 듣기 싫었다. 내가 원하는 건 정의였다. 하지만 정의를 구현한다 해도 그가 빼앗아 간 것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난 침을 뱉고 바닥에 막대를 박았다.




지협에서 바람에 날려온 돌무더기는 '섬'이라고 부르기엔 상당히 애매했다. 황량하고 소금기 가득한 그곳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세대 전 필트오버의 권력자 중 한 명은 이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곳에 감옥을 세웠다.


보안관으로 다시 복귀한 나는 케이틀린에게 우르곳을 이송해 달라 부탁하고 지하동굴로 향하려 했다. 희망의 집으로 가서 그곳을 내 건틀릿을 재건하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틀린도 이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까. 내가 이곳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직접 보기를 바랐다.


"힘든 결정이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한 일의 결과를 직접 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야 네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변화. 이 단어가 내 목구멍에 맴돌았다. 그리고 '발전'의 결과로 독가스에 질식사한 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우린 그자를 격리해 필트오버와 자운이 혼돈에 빠지는 것을 막았어."


"혼돈 속에서 뭔가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케이틀린이 살짝 한숨을 쉬며 날 바라봤다. "아마도. 아니면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려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할 거야. 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고 볼 수 없어. 그래서 우린 싸워야 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거지. 그게 법이 하는 일 '우리'가 하는 일이야. 우리는 질서를 수호해야 해."


법. 질서.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정의 구현에 법과 질서가 필요하긴 한 걸까? 어린 시절의 내게 묻는다면 아마 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잘 모르겠다.


케이틀린이 말했다. "우르곳을 추종하는 세력도 약해질 거야. 야심 있는 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추종 세력을 와해시키겠지. 서로 싸우느라 바빠서 우리에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거고."


"케이틀린, 넌 거기에 없었잖아."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그 어마어마한 수와 신념을 보지 못해서 그래. 절대로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우리는 감방이 내려다보이는 지지탑 위에 서 있었다. 양옆에 늘어선 감방 안은 전부 비어 있었다. 그때 보안관들과 간수들이 중앙 통로로 우르곳을 끌고 왔다. 바닥부터 지붕까지 꽉 채운, 마치 거대한 피스톤처럼 생긴 강철 관이 이제 우르곳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우르곳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는 감방에 끌려가는 동안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살아있는 채로 얼마나 많은 부품을 제거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가능하지 않을까?" 케이틀린이 우르곳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내게 물었다.


"직접 해 보지 그래." 우르곳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게 겨우 그런 협박이 다가 아니라면 말이야."


케이틀린이 총을 메며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넌 우리 덕분에 여기 있게 된 거야. 앞으로는 우리가 말할 때 먹고, 말할 때 자고, 말할 때 숨 쉰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방금 내가 말한 것 외의 행동을 한다면 그땐 너도 끝이다. 이해했어?"


우르곳이 웃었다. "날 파괴할 힘이 네게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런 힘은 네게 없어. 있어 본 적도 없고. 넌 절대 그런 힘을 가지지 못해."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내야겠군." 케이틀린이 기술자에게 고개로 신호를 보냈다. 기술자가 스위치를 누르자 우르곳 위로 관 하나가 내려와 쾅 소리와 함께 지면과 빠르게 결속되었다.


우리가 떠나는 와중에도 철창 너머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방 구역 입구에서 멈춰선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우르곳은 죄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거미줄에서 차분히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보였다.

 

image.jpg

 

 

아펠리오스 소설: 네가 바로 무기다

by 데이비드 슬래글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aphelios-color-story/

 

아펠리오스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쉬며 훈련을 시작했다.


동굴 지붕의 갈라진 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펠리오스의 귓전을 때렸다. 물은 돌로 된 땅바닥을 적셨고,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그는 바닥의 돌에 새겨진 신성한 문양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명과 궤도의 상징이었다. 그는 심지어 눈을 감고도 둥그런 달의 문양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검을 몇 번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손안에서 월석의 단단함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볍게도 느껴졌다. 이는 물질 세계의 달과 영혼 세계에 비친 달의 그림자가 천상의 장막을 통해 찰나의 순간 처음으로 겹쳐졌을 때 생겨난 마법의 힘이었다. 이날 온 세상에는 월석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두 달은 각자의 궤도를 따라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펠리오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궤도를 받아들이고 훈련을 계속했다.


이제 그의 검술은 그의 숨결처럼 빨라져 갔다. 그는 수년 동안 달의 문양을 그리는 베기 검술을 연마했고, 심지어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자멸 직전까지 갈 정도로 훈련에 매진했다. 검의 형상처럼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날아다니는 그의 손끝에서는 베기 공격과 쳐내기 검술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도록, 또 자신의 검을 다루기 위해 희생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펠리오스..." 내 얼굴이 보이지. 내 입술은 떨리고 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어.


"아펠리오스." 내 눈에 비친...





월석검이 붉게 빛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형체가 앞을 지나가자 아펠리오스가 휘청거렸다. 환영인 걸까? 기억의 일부일까?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얼마나 많은 자를 죽여 왔던가. 순간 월석검이 아펠리오스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자신을 인도해 줄 무기가 없어진 아펠리오스 역시 이내 바닥에 무너졌다.


모든 것이 돌아왔다. 그가 억누르려 했던 모든 것이. 그가 적에게 휘둘렀던 검은 더욱더 날카로운 날로 돌아와 그를 베었다.


알룬... 아펠리오스의 여동생이 천상의 장막 너머로 손을 뻗었다. 알룬은 아펠리오스에게 그 모습을 보였지만,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펠리오스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을 꾹 눌러 삼켰다. 그는 순간적으로 돌에 새겨진 궤도와 운명의 상징을 내려칠 기세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내 주먹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움켜쥔 손이 풀렸다.


아펠리오스가 제자리에 서서 머리를 쓸어 넘기자 하늘 위로 떠오른 달이 보였다. 달빛은 마치 그를 부르는 듯 사원 내부 깊숙한 곳까지 드리워졌다. 그의 힘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랬다.


때가 된 것이었다. 이제 그의 신념이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다.


루나리의 힘은 천상의 장막을 가로질러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영혼 세계와 그 안의 비밀을 간직한 마법... 아펠리오스는 지난 세월 검술을 연마하면서도 혼자서는 달의 힘을 온전히 끌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사원 연못에서 키운 어둠꽃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그 정수를 부식성 영약 안에 담았다. 영약은 작은 그릇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훈련용 검을 옆에 놓고 그릇을 달빛이 비추는 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둠꽃의 독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목이 고통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게 돼.


모든 것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지. 독이 전신을 타고 흐르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구역질이 나고 미친 듯이 기침을 해. 몸이 달의 힘을 받기 위해...


내 힘을 받기 위해 열리는 거야.


"아펠리오스." 내가 속삭이자 내 영혼이 너의 영혼에 닿아. 넌 장막 너머에 있는 내 존재를 느끼고 손을 들어 올리지. 내가 너무 멀리 있다는 사실과 그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채.


허공에 들어 올린 손을 쥐면 무기가 생겨.


바로 내가 보낸...


중력포지.


"아펠리오스." 온몸을 타들어 가게 하는 독을 마신 너를 느끼며 속삭여. 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내가 어떤 희생을 부탁했는지 아니까...





폐부를 찌르는 고통 속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쉰 아펠리오스는 마침내 동굴 속 사원에서 나와 어둠이 깔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 고통과 싸우고, 또 그 고통을 끌어안는 과정에서 그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사원 위아래로 타곤 산의 모습이 펼쳐졌다.


냉기를 머금은 찬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며 눈보라를 일으키다 반짝이며 사라졌다. 그 바람에 아펠리오스의 스카프와 망토가 휘날렸다. 달빛이 더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를 인도해 줄 빛이었다.


이는 달을 통해 비치는 그녀의 빛이었다.


아펠리오스가 원했던 것을 그녀가 전해 준 것이다.


중력포는 단순한 월석검이 아니었다. 아펠리오스는 훈련을 할 때 검으로 긋고, 찌르고, 돌렸다. 중력포로 똑같은 검술을 쓰면 그 효과는 훨씬 더 클 터였다. 단순한 찌르기만으로도 검의 힘과 아펠리오스의 검술, 알룬의 마법이 합쳐져 엄청난 힘을 낼 것이다.


아펠리오스가 중력포로 암흑 구체를 쏘자 타곤의 천상 마법으로 공중에 떠 있던 거석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는 단숨에 도약하여 섬 꼭대기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 뒤로 일은 작은 눈보라가 심연 속으로 흩뿌려졌다. 그가 암흑 구체를 발사할 때마다 또 다른 거석이 끌려왔다. 하나씩 밟으며 도약해 나가자 뒤쪽에서 거석들이 서로 부딪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은 걸렸을 거리를 그는 순식간에 올랐다. 물론 그 누구도 이곳을 오르려고 하진 않을 테지만.


오직 솔라리와 힘을 원하는 자들만이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펠리오스는 밤의 시간에 무관심한 채 정적만이 흐르는 솔라리의 주거지 위를 지나쳐 갔다. 그는 어떻게 솔라리의 광신도들이 루나리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었는지, 태양을 숭배하는 길을 걸으면서 어둠을 두려워할 수 있었는지 오랜 세월 의문을 품어 왔다. 이 어둠은 루나리만이 마주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분명했다.


광신도들의 존재는 달빛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펠리오스가 마지막 거석으로 도약한 후 설원 위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는 솔라리 한 무리가 뜨겁게 타오르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루나리가 '타오르는 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밤이 되면 루나리 이교도들을 불태워 처치했다. 솔라리의 성직자들은 낮이 되면 이 세상에는 태양뿐이라며 달을 부정했다. 검은 두건 아래에 숨겨진 그들의 얼굴은 그 판단력만큼 냉철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들은 진홍색 옷차림을 하고 쇠붙이를 걸친 이방인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방인은 아펠리오스가 환영 속에서 본 그자였다.


달빛은 이 설원에서 멈춰 이방인의 발을 비췄다.





"아펠리오스." 난 다시 말해. 마법을 모으며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속삭이지.


"내가 옆에 있어..."





아펠리오스는 공중에 떠 있는 거석에서 뛰어내려 타오르는 자들을 공격했다. 중력포의 어둠이 퍼지자 그들의 무기가 더 밝게 불타올랐다. 놀란 솔라리 무리는 소리치며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암흑 구체에 의해 땅에 결박된 상태였다. 아펠리오스가 중력포를 내려놓자 그의 손에 새로운 무기가 나타났다.





"절단검." 내가 속삭여.





아펠리오스는 적들의 타오르는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착지했다. 초승달 형상의 절단검을 뒤쪽으로 휘두르자 빛줄기가 발사되어 거석을 폭발시켰다. 타오르는 자들은 겁에 질린 채 초승달의 힘으로 산산이 조각난 거대 돌기둥들이 내리꽂히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펠리오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불타는 창으로 반격하며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펠리오스는 공격을 피하며 절단검을 계속 휘둘렀다. 그리고 다른 쪽 손을 천상의 장막 너머로 뻗어 또 다른 무기를 쥐었다.





"반월검." 난 밤을 향해 속삭이지.





반월검이 호를 그리며 날아가자 남은 솔라리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펠리오스는 회전하며 되돌아온 검을 잡았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방인이 네 앞에 서 있어. 그가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어. 그의 옆에는 타오르는 자들이 찾던 달처럼 휘어진 검이 놓여 있지.


그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지만, 네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게 돼. 너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불타오르는 자들이 창으로 낸 어깨의 상처를 치지. 고통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서.


넌 그를 죽이고 싶지 않지만, 죽여야만 해.


네 얼굴은 감각을 잃어서 흐르는 눈물을 느끼지 못해. 하지만 내 눈물은 느낄 수 있지.


"아펠리오스." 난 장막 너머로 소리 높여 마지막으로 말해. 지금 우리 궤도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어.


너의 눈을 통해서 달빛에 드러난 검의 비밀이 보여. 그 검이 버려진 이유가 말이야.


그녀가 달리고 있어...


그녀를 찾아야 해.





진홍색 옷차림의 이방인이 솔라리 무리가 쓰러져 있는 눈밭 위에 누워 있었다.


아펠리오스는 헉하고 숨을 내쉬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을 들으며 달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다시 무감각해졌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검을 주워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image (1).jpg

 

 



댓글 | 0


댓글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글쓰기
공지
스킨
ID 구분 제목 글쓴이 추천 조회 날짜
2157097 공지 게시물 갯수 제한은 없습니다. (106) _smile 80 192656 2018.06.05
234396 기타 국내외 언론 및 웹진 불펌 금지. (17) 루리 29 1245050 2009.07.28
2202852 LOL 롭스 357 00:34
2202851 정보 돌삔 10 1426 2020.01.22
2202850 e스포츠 e스포츠소식통 1 1495 2020.01.22
2202849 정보 Nockiss 3 3589 2020.01.22
2202844 정보 도돌2표 1 692 2020.01.22
2202842 정보 닷리루웹컴 1814 2020.01.22
2202839 클로저스 SikJungDok 1 1049 2020.01.22
2202838 정보 @Crash@ 1359 2020.01.22
2202837 정보 클틴이 2 2054 2020.01.22
2202836 정보 친친과망고 2350 2020.01.22
2202834 정보 Uniana 1 2160 2020.01.22
2202832 정보 onlyNEETthing4 6 3384 2020.01.22
2202831 LOL e스포츠소식통 3 4562 2020.01.22
2202830 정보 도돌2표 4 2811 2020.01.22
2202829 LOL e스포츠소식통 1 3859 2020.01.22
2202828 정보 닷리루웹컴 1775 2020.01.22
2202827 LOL 가면라이더 쿠우가 3687 2020.01.22
2202826 정보 오늘은 이걸로 13 12659 2020.01.22
2202824 정보 롭스 2 2121 2020.01.22
2202823 e스포츠 눈꽃사슴 2828 2020.01.22
2202819 WOW 아타호-_- 2 5664 2020.01.22
2202818 정보 [GAMES] 10 3383 2020.01.22
2202815 LOL 롭스 6 2430 2020.01.22
2202814 오버워치 Naeri 4 1556 2020.01.22
2202813 소울워커 아룬드리안 1 1967 2020.01.22
2202812 던파 성인만화 1 2777 2020.01.22
2202811 LOL e스포츠소식통 3 959 2020.01.22
2202809 정보 키키™ 2 1318 2020.01.22

글쓰기 173001개의 글이 있습니다.


1 2 3 4 5 6 7 8 9 10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