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미치광이 AI를 멈춰라, 정통 스텔스 액션 + 해킹 ‘에보팅션’
‘에보팅션(Evotinction)’ 또는 ‘연멸(演灭)’은 차이나 히어로 프로젝트 지원 하에 스파이크웨이브 게임즈가 개발 중인 3인칭 스텔스 게임이다. 우주복이 주는 둔중한 인상 탓에 쉬이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이래 봬도 ‘메탈 기어 솔리드’나 ‘스플린터 셀’이 떠오르는 정통파 잠입, 은신 플레이가 특징. 2K 차이나 출신 인력들이 스튜디오 중핵을 맡은 덕분인지 소규모 게임답지 않은 훌륭한 비주얼이 눈길을 끈다. 일부러 주류 장르를 피하는 기획도 전략적이라 풀이된다.
제목이 독특한데, 원제와 영문 명칭 모두 진화 ↔ 멸종처럼 반대되는 단어의 조합이다. 왜냐하면 작중 배경인 HERE이 인류 발전을 위해 어떤 급진적인 연구에 매진하던 자립형 시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시설 전체의 운영 AI가 감염되어 통제불능에 빠졌다는 것. 이대로는 연구소에 고립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됨은 물론 자칫 인류 쇠퇴의 도화선이 될지 모른다. 이에 중앙 시스템을 설계한 장본인 리우 박사가 위험천만한 임무로 뛰어든다.
감염된 중앙 통제 AI를 고치러 잠입한 설계자, 정통 스텔스 게임 '에보팅션'
앞서 ‘메탈 기어 솔리드’와 ‘스플린터 셀’를 언급했지만 리우 박사는 군인도 요원도 아닌 그냥 좀 멀쑥한 민간인이다. 당연히 미쳐버린 살인기계 배후로 넘어가 CQC를 거는 장면은 볼 수 없다. 대신 중앙 시스템을 설계한 천재 공학자로서 HERE 구조에 해박하고 해킹과 재밍 등 각종 전자전도 능숙히 수행한다. 그가 차려 입은 우주복 비슷한 의상이 바로 전자전 보조 장비인데, 주변 일대를 스캔하여 상호작용할 대상을 찾고 원거리서 간편하게 접속하도록 도와준다.
원거리 접속은 게임 플레이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차단벽이 내려왔는데 옆 창문 너머로 조작 콘솔이 보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식의 원격 해킹 퍼즐이 반복해서 나온다. 또한 리우 박사가 근접전에 취약한 만큼 적들을 따돌릴 때도 멀리서 처리한다. 다만 맨손으로 가능한 건 아니라 추가 가젯이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일례로 가장 먼저 얻는 E-블래스터는 사거리가 불과 몇 미터 수준이다. 애초에 단순 작업용을 과충전시킨 무기이기 때문.
군인도 아니고 박사가 어떻게 세상을 구해? 아, 예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 참
평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봉사하던 온갖 기계들, 가령 로봇 청소기와 드론 등을 통틀어 지니라 부른다. 운영 AI가 감염되고부터 소수의 독립 개체나 몇몇 수동 조작하는 것들 외에는 모든 지니가 세작이다. CCTV와 순찰 중인 지니는 붉은 탐조등으로 시야가 표시되므로 거길 피해 움직이는 게 기본. E-블래스터는 한 번 충천하면 두 발 쏘고 끝이라 순찰조를 다 없앨 수도, 없앨 필요도 없다. 다행히 책상이 많고 설비가 복잡한 연구소 특성상 몸을 숨길 장소는 충분하다.
리우 박사와 동료 드론 오즈의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연구소 곳곳에서 데이터 자원을 모아야 한다. 업그레이드는 AI 해킹, 디바이스 해킹, PI 최적화로 나뉘며 여기서 PI-아마도 Personal Interface-는 스캔 범위를 넓히는 등 탐색에 영향을 준다. AI 해킹은 순찰조 지니에게 특정 방향만 보도록 지시하거나 원하는 위치로 이동시키고 심지어 치명적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다만 E-블래스터로 파괴할 때와 달리 일정 시간이 흐르면 기능이 정상화되므로 주의하도록 하자.
시설 내 모든 지니가 적으로 돌변한 상황, 바이러스 이름은 알기 쉽게도 RED
디바이스 해킹은 지니 자체를 겨냥하는 대신 주변 기물을 활용한다. CCTV로 안전한 경로를 찾거나 로봇청소기 위에 큰 서랍을 얹어 움직이는 엄폐물로 만드는 식이다. 아니면 다수의 지니들 머리 위로 스프링클러를 오작동시켜 일망타진해도 된다. 꼭 정해진 답은 없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는 게 ‘에보팅션’이 지닌 매력이기 때문. 물론 아직 해금된 능력이 별로 없는 시연에선 몸을 잔뜩 숙이고 도망치기 바빴지만 말이다.
혹여 붉은 탐조등에 걸리더라도 인식하기까지 몇 초간 여유가 있으니 얼른 벗어나면 괜찮다. 지금 자신이 잘 은신 중인지 궁금하다면 화면 우측 상단 스텔스 게이지로 확인하자. 어떤 센서는 범위를 넘어서는 즉시 발각 상태로 바뀌는데, 의외로 당장 게임 오버가 아니라 순찰조에게 공격당할 뿐이다. 열심히 뛰어서 어디 방구석에 숨은 뒤 기다리면 발각 → 수색 → 은신 순으로 상황이 해제된다. 또한 맵이 일정 구간마다 나뉘어져 그 경계 너머로 쫓아오진 못한다.
최소한의 공격 수단은 지녔으나 기본적으로 허리 굽히고 살금살금이 답이다
시간 제약 탓에 그다지 깊이 즐겼다곤 못하겠으나 때늦은 정통 스텔스 신작이 반가운 건 100% 진심이다. 필자는 가장 흠모하는 게임인을 한 명 꼽으라면 코지마 히데오일 정도로 한때 이 장르에 빠져 살았다. 차이나조이 전날 모여서 시연한 차이나 히어로 프로젝트 작품들 가운데 오직 ‘에보팅션’만이 앞장서 총,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소위 액션 대작으로 넘쳐나는 시장에 색다른 도전은 언제나 환영한다. 오히려 소규모 개발사가 자기 색깔을 내보이기에 좋은 장르라 본다.
그럼에도 하나 걱정이라면 이처럼 정적인 플레이 호흡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게이머의 흥미를 붙들어놓을 수 있느냐다. 아무리 스텔스 게임이라도 한 번씩 분위기를 환기해줄 필요는 있다. 그 옛날 저명한 워렌 스펙터가 ‘데이어스 엑스’를 만든 이유도 ‘시프’서 주구장창 숨어만 다니는 데 지쳤기 때문이다. 선배인 ‘메탈 기어 솔리드’를 봐도 그야말로 최고의 보스전을 자랑하지 않나. 그런데 ‘에보팅션’은 앞서 공개된 트레일러서 시연 이상의 스펙타클을 확인하기 어렵다.
간만에 정통 스텔스 게임이 반갑긴 한데, 뭔가 더 넣어야 하지 않나 걱정이…
만약 점점 더 감시가 삼엄해지고 복잡다단한 해킹이 요구되는 방향으로 갈 경우 그건 이미 퍼즐 장르나 다름없다. 아니면 스토리가 굉장히 흥미진진해 얼른 다음으로 진행하도록 이끄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연구소를 탐험하다 보면 각종 문서, 녹음을 통해 중심 서사의 외연이 넓어진다. 공식 소개 자료를 보면 ‘영원에 대한 무익한 추구. 진화와 멸종을 엿보다. 엄숙한 생명의 노래’라는 자못 거창한 문구가 나온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스토리에 기대를 걸어보자.
차이나 히어로 프로젝트는 소규모 게임 개발을 독려, 지원하는 만큼 그 과실이 영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애초에 수백 명씩 달라붙어 뚝딱 하나 만들어낼 대기업은 지원 대상이 아니니까. ‘에보팅션’도 차이나조이 2019서 첫 트레일러가 공개됐는데 오는 9월 13일에야 비로소 뭇 게이머와 만난다. 지원 기기는 PS5, PS4 그리고 PC. 과연 가뭄으로 지친 스텔스 게임 팬덤에게 반가운 단비가 되어줄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진눈깨비로 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후반 게임 플레이를 무엇으로 채웠을지, 어떻게 풀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